모든 시민은 기자다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우리 말과 삶 (8)

[우리 말에 마음쓰기 406] '믿음직한 존재', '소중한 존재' 다듬기

등록|2008.08.20 09:55 수정|2008.08.20 09:55

ㄱ. 믿음직한 존재

.. “나… ‘오빠’라면 상냥하구 멋지고, 믿음직한 존재일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다른 것 같아.” ..  《요시다 모토이-연풍 (1)》(세주문화,2002) 71쪽

 가벼운 입말로 되어 있는 만화책을 보면, 요즘 세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을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입말이 고스란히 담기지는 않지만, 만화라는 갈래에서는 되도록 ‘만화 보는 이들 눈높이에 맞추는 입말’로 말투를 살리거나 다듬으려고 애쓰는 편이거든요.

 ┌ 오빠라면 믿음직한 존재일 거라 생각했는데
 │
 │→ 오빠라면 믿음직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 오빠라면 믿음직하겠지 생각했는데
 │→ 오빠라면 믿음직하리라 생각했는데
 └ …

 ‘존재’는 일본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이 일제강점기 앞서도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썼을지 안 썼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처럼 만화책에까지 나올 만한 쓰임새는 일제강점기 뒤부터라고 느낍니다. 이제는 웬만한 문화나 사상이나 철학은 일본을 거쳐서 들어오거나 일본에서 낸 책을 옮기거나 하는 판이니까요. 그나마 요즘은 서양에서 곧바로 들여오기도 하지만, 서양에서 곧바로 들여와서 한국말로 옮기는 책들에 쓰이는 말은 ‘일본책에 쓰이는 한자말’에서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 믿음직한 오빠
 └ 믿음직한 오빠라는 존재

 ‘존재’라는 낱말 말씀씀이는 차츰 널리 퍼집니다. 벌써 만화책까지 파고들었으니까요. 어린아이들도 이런 말을 쓸까요? 어린아이들도 “엄마라는 존재”나 “아빠라는 존재”라고 쓸까요? “우리 엄마는 믿음직해요”라 않고 “우리 엄마는 믿음직한 존재예요”라 할까요? 또, 이렇게 써야 무언가 깊이가 있는 말이 된다거나 철학이나 사상이 담긴 말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 사람은 참 믿음직해서, 우리 회사에서 기둥일세”라 하기보다는 “저 사람은 참 믿음직한 존재라서, 우리 회사에서 기둥 같은 존재일세”라 해야, 뜻이 살아날는지요.

 우리한테 있으면 좋을 말, 우리 삶을 찬찬히 담아내는 말, 우리 생각과 뜻을 알맞게 펼치면서 함께 나누는 말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태껏 ‘우리 삶터에 바탕을 둔 우리 말로 우리 생각(철학)을 펼친’ 적이 없는 겨레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글로는 한글이라 해도 말로는 우리 말이 아닌 어설픈 말, 튀기말, 짬뽕말, 어수선말, 쓰레기말, 바보말 들로.


ㄴ. 가장 소중한 존재

..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선혜에게는 아이들이 가장 소중한 존재다 ..  《김종휘-너, 행복하니?》(샨티,2004) 61쪽

 생각해 보면, 저도 중학교 때는 더러 ‘존재’라는 말을 썼고, 고등학교 때는 곧잘 썼으며, 잠깐 대학교 다니는 동안에도 제법 썼지 싶습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존재’라는 말이 군더더기임을 깨닫고는 크게 뉘우쳤습니다. 참 부끄럽더군요. 그동안 얼마나 멋모르고 살았나 싶어서.

 ┌ 아이들이 가장 소중한 존재다
 │
 │→ 아이들이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 아이들이 가장 소중하다
 └ …

 철학이나 사상이나 문학이나 역사나 예술을 말하는 자리에 으레 쓰이는 ‘존재’입니다. 쓰임새는 나날이 늘 뿐, 줄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궁금합니다. 이 말이 무엇이도 그리 좋은지, 이 말에 어떤 힘이 담겼는지.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는 선혜라는 분한테 아이들은 ‘보물’이나 ‘보배’라 할 만하다고 봅니다. 그래, 보물이에요. 보배입니다. 보석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이 말 그대로 쓰면 좋습니다. 굳이 보물이니 보배니 보석이니 들먹이지 않아도 좋다고, 사람은 사람 그대로 소중하고 좋다고 느낀다면 “가장 소중하다”고 하면 돼요.

 “저한테는 우리 말이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나 “저한테는 헌책방이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처럼 쓸 수 있을까요? 아마 이렇게 쓰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네요. 글쎄, 억지로 쓰려고 한다면 쓸 수야 있으나, 이렇게까지 써야만 우리 말이나 헌책방이 ‘가장 소중하게’ 되나요. 말을 말 그대로 쓰지 못하는데, 자꾸 군더더기를 붙이는데, 속살이 아닌 껍데기에 끊임없이 눈이 가는데 얼마나 살갑거나 애틋하게 다가갈는지요.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