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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닭 "내가 졌다"

우리집 닭 성꼬와 진꼬, 살생의 늪에서 헤쳐 나오다

등록|2008.08.21 08:34 수정|2008.08.21 09:01
꼬박꼬박 하루 두 개씩 달걀을 제공하는 우리 집 닭들은 중요한 영양공급원이자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다. 어머니는 아침에 눈을 뜨면 "닭 모시(모이)는 줬나?"고 묻는다. 아들이 굶는지 먹는지 그것보다 닭이 제대로 먹는지에 더 관심을 둔다. 낮에 달걀을 꺼내오는 걸 보시는 날엔 아침에 모이 주는 것을 보셨으면서도 "달걀만 꺼내오고 모시 안 주면 안 된다. 좀 주고 꺼내와야지" 하신다.

우리 닭은 만 한 살을 넘긴 지가 몇 달 된다. 요즘 세태에서 장수하고 있는 셈이다. 닭고기로 키우는 닭의 평균수명이 한 달 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진꼬'와 '성꼬'라고 이름 붙인 두 마리의 닭은 절명의 위기를 몇 번 맞았다.

닭장선라이트를 지붕으로 한 닭장 ⓒ 전희식


작년 여름에 어찌나 남의 밭에 들어가서 남새(채소)를 절단내는지 "다리 몽댕이를 분질러 버리겠다"는 옆집 할머니 앞에서 죄인처럼 나는 닭장을 지어 꼼짝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남을 줘 버릴까 했다. 남에게 준다는 얘기는 성꼬와 진꼬의 운명도 내팽개친다는 얘기가 된다.

닭장에 가두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고, 발을 묶어서 마당에 풀어 놓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닭 발목이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는 잠깐만 풀어 주자는 것이 또 재를 저지르는 화근이 되는지라 누굴 줘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마루에 올라와 똥을 갈겨 놓거나 섬돌에 있는 신발 속에 똥을 눠서 나를 약올리는 것도 한 이유였다.

닭이 이 첫 번째 위기를 넘긴 것은 오로지 내 선의 때문이 아니라 닭을 인수해 갈 이웃이 없어서였다. 이들도 올 여름까지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집에 오는 손님들이 침을 흘리기는 했으나 가을과 겨울, 그리고 늦봄까지는 남의 밭에 피해 입을 작물들이 없어서 들과 산을 오르내리며 날로 통통하게 살이 붙어 나갔다.

날이 더워지고 겨우내 헐벗었던 밭들에 파릇파릇 채소들이 자랄 때 나는 이놈들의 다리 몽뎅이가 부러질까 봐 마당에 말뚝을 세우고 검은 보온망으로 울타리를 쳐서 닭우리를 만들어 줬다. 그러나 이게 곧 파리와 모기의 서식처로 둔갑을 했다.

어머니 주무시는 얼굴에 새까맣게 쇠파리가 앉았다. 에프킬러로 잡거나 파리채로 때려 죽이는 것을 반대하는 나는 어머니의 온갖 구박과 푸념에 시달리면서 닭장을 청소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비라도 오면 질컥거리는 닭장에 달걀 꺼내러 들어가기가 겁날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내게는 구원투수요, 닭에게는 저승사자였다. 서울서 오신 형님이 "그것 참 맛 있겠네. 저런 것은 한 마리에 2만 원 주고 사 먹어도 안 아깝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내 앞에서 잡지 말고 그냥 가져가라고 했더니 이래저래 핑계만 대다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닭장 때문에 파리가 많은 줄은 모르고 파리채를 숨겨두고 안 준다고 나만 원망하고는 닭장 곁에서 만날 닭과 같이 노셨다.

집에 손님들이 여럿 오는 날이었다. 나는 모질게 마음을 먹고 전날 읍내 터미널 옆에 있는 닭집에서 한 마리당 2천 원씩 주면 깨끗하게 잡아 준다고 해서 전화로 방문 시간까지 예약을 하고 기어코 닭을 운명시키기로 했다. 이것이 미수에 그치고 만 내력은 불가항력이었다.

약속 시간에 차를 몰고 가려하니 전화가 왔다. 닭집 아저씨가 갑자기 전주 시내 볼일 보러 가니 다음날 오라는 것이었다. 다음날은 손님들이 돌아가는 날이라 내가 먹지도 않을 닭을 두 마리나 잡을 이유가 없었다.

이때쯤 우리 닭은 어머니 주장에 의하면 하루 네 개씩 달걀을 낳고 있었다. 닭장에 이틀 만에 들어가서 달걀 네 개를 꺼내오는 나를 불러서는 닭 한 마리가 하루 두 개씩 알 낳는 닭은 우리 닭 뿐이라면서 엄중하게 닭을 돌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닭을 신주 모시 듯하기 시작했다. 닭이 어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음은 내가 함부로 닭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과 같다.

똥냄새와 파리 떼의 극성을 견디다 못한 나는 어머니와 닭들을 이간질 시키는 공작을 벌였다. 마당에 닭을 살며서 꺼내 놔서 아무데나 똥을 싸게 한다든가 마루에 함부로 올라와도 못 본 체 했다. 내 공작은 실패했다. 아무 성과도 없이 나만 양쪽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때마침 아랫동네 사는 후배네가 수탉이 너무 극성이라 암탉들이 곤욕을 치른다면서 암탉 한두 마리가 더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이때다 싶어 얼른 가져 가라고 해 버렸다. 그리고는 재차 어머니와 닭을 이간질했다.

어머니 안 볼 때 달걀을 다 꺼내 와서는 달걀도 안 놓는 닭이 모이만 많이 먹는다고 어머니 앞에서 닭을 비난했다. 파리떼는 다 저 닭장에서 날아온다고도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어쩌랴. 어머니는 이미 아들보다 하루 네 개의 달걀을 낳는 닭을 더 신뢰했다.

청소도 안 하고 파리채 숨겨 놓은 나 때문에 파리가 많아진 것이지 어찌 닭 때문이냐고 닭을 노골적으로 편들었다. 어느 닭이나 한 여름에는 알을 안 낳고 쉬는 법이라고 닭의 입장을 옹호했다. 이런 모자간의 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로 온다던 아랫마을 후배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완벽하게 항복하는 것이었다. 닭장의 똥들이 파리떼 서식처가 되지 못하도록 비를 완전히 가리면서도 볕이 잘 드는 선 라이트 지붕을 만들어 줬고 바닥에 왕겨를 듬뿍 넣어 똥을 누는 즉시 파묻히게 했다. 닭은 두 발로 헤집는 속성이 있어 바닥을 왕겨로 깔면 똥을 금세 덮어 버리게 된다.

읍내 건재상에서 9천원짜리 선 라이트 네 장과 각목 한 다발을 사 와서 궁궐 같은 닭장을 지었다. 닭장을 짓는 동안은 이 녀석들이 지네들이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나 완승했음을 만끽하면서 내 발치에서만 맴돌았다.

문짝을 만들어 달고 모이나 물을 주는 구멍을 하나 뚫었다. 달걀을 꺼내는 일은 닭장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할 수 있도록 닭장 망 옆에 달걀통을 만들어 붙였다. 닭장을 만드는 동안 어머니는 마루에서 시공업체 감리사처럼 쉬지 않는 잔소리로 '닭 궁전' 건축을 감독했다.

불경에 보면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할 뿐 아니라 살생의 역할을 남에게 넘겨서도 안 되며 다른 사람이 하는 살생을 묵인하거나 방조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구사일생으로 여러 번이나 절명의 순간을 넘긴 성꼬와 진꼬는 처음 데려 올 때의 내 다짐을 되살려 주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령 닭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 이들을 데려 오며 한 내 다짐이었다.

나를 살생의 유혹에서 여러 번 구해 준 음덕을 생각해서라도 이 약속만큼은 지켜야 하리라.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삶이 보이는 창>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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