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명품 문화예술 공간 '루체른'
[유럽 명품도시 여행기④] 스위스 루체른의 문화컨벤션센터
▲ 카펠교유럽 최고의 목조 다리, 지붕이 있는 것이 이채롭다. ⓒ 이종민
또 하나의 울림이 좋은 도시 스위스의 루체른. 알프스로 들어가는 길목으로도 유명한 이 도시에서도 명품도시를 만들어 이를 향유하는 주민들의 열정과 진정성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유명한 '루체른 문화컨벤션센터'(KKL)에서.
수많은 음악제가 열리고 각종 모임, 그것도 상당한 품격을 갖춘 모임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루어지고 있는 이 살아 있는 문화예술 공간, 그 이면의 철학과 열의를 읽지 못하고 "루체른에 비는 내리고"만 연발하다 왔다면 알프스를 핑계 삼아서라도 이곳을 반드시 다시 찾아야 한다.
또 이 아담하고 정겨운 도시에 들러, 최고의 목조 다리인 카펠교, 옛 스위스 사람들의 슬픈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빈사의 사자상', 고풍스런 중세의 수려한 건축물들, 아기자기한 골목길, 그리고 이들 모두를 아늑하게 안아주는 호수와 어우러진 멋스런 풍광, 그 포근한 수채화에 취하고만 왔다면 분명 이 도시의 매력 절반 이상은 놓친 것이다. 아무리 황혼에 물든, 아니면 새벽 비에 촉촉이 젖은, 물과 어우러진 그 고즈넉한 경치에 넋을 잃었다 해도 말이다.
▲ 루체른 문화켄벤션센터(KKL)프랑스의 유명한 장 누벨이 설계한 것으로 매년 8-9월 세계적인 음악축제가 이곳에서 펼쳐진다. ⓒ 이종민
물론 루체른은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도시다. 겉모습 자체만으로도 그곳을 찾아가기 위해 쏟는 공력을 충분히 보상하고 남는다. 유럽 대부분의 오래된 도시가 그러하겠지만…. 그래서 '예습'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풍성하게 즐기다 올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그 사전 준비가 괜한 편견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우리와 동행한 취재진들이 그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겠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작정하고 온 것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다. 현지에서 아무리 훌륭한 취재원을 만나도 자신들이 봐야 할 것만 찾아 나서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도시를 찾을 때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그냥 즐기자!' 주의로 사전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에슬링겐에서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가는 긴 버스여정 동안에도 나누어준 자료조차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가이드 없이 비 내리는 먼 길을 가야 하는데 턱없이 낙관적이기만 한 터키인 버스기사(몸집이 좋은 이 기사는 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라며 특히 우리를 반겼는데) 때문에 내내 불안하여 '예습'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다가 스위스로 접어들어 이제 길을 제대로 잡은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쯤에는 비 내리는 차창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정겨운 스위스의 전원적 풍광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자료집 뒤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 카펠교 내부지붕 들보에 스위스 역사적 사건이나 루체른 수호성인들에 관한 판화가 걸려 있다. ⓒ 이종민
그렇게 찾은 루체른에 비는 내리고…. 비에 젖은 마음을 달래야 한다며 술집을 찾아 호숫가와 골목길을 헤매는 동안 내내 참 이쁜 도시구나! 황혼에 물든 모습은 더 아름답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새벽 빗속에서 혼자 둘러본 카펠교 주변의 풍광은 그것만으로도 스위스에 온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다. 어디를 가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애를 쓰는데, 특히 이날 새벽 산책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침식사가 부실하다고 입이 나온 연수일행들의 반응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인구 6만 도시에 세워진 한국소리문화전당 규모의 연주홀(객석1,840석, 공사비 약 1,400억원)을 갖춘 이 종합문화회관에 들러 스위스인 다운 꼼꼼한 과학과 세련된 미학의 만남을 확인하고 나면 앞서 소개한 이 도시의 자랑거리들이 이 '국제적인 문화도시'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내 깨닫게 될 것이다.
1998년 예전에 있던 '아트 앤 컨벤션센터'를 부수고 완전히 새롭게 지어 완공한 이 공간이 바로 세계적인 음악축제인 루체른 페스티벌의 중심무대다. 개관 당시 유명한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축하공연으로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던 곳. 이후 2003년 이 축제의 음악 감독이 된 아바도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연주를 시작으로 매년 그의 교향곡을 연주해오는 것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 KKL 내부의 수로루체른 문화켄벤션센터를 삼등분하고 있는 수로, 설계자인 장 누벨이 “내가 물에 갈 수 없다면 나에게 물이 오도록 하겠다!”는 말을 남긴 바로 그 물길이다. ⓒ 이종민
유념할 것은 과시욕 강한 말러의 작품들을 소화해낼 만큼 무대나 음향에 대한 배려를 충분히 했다는 점. 무대 위의 음향판을 조절하여 실내악단은 물론 독주연주자들도 자기 악기의 소리를 모니터하며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으며 객석 어디에서도 동일한 음향을 즐길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계되었다는 점.
특히 파이프오르간 연주 시 그 효과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개폐식 벽을 설치한 것들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이다. 하나의 무대와 객석인데 다양한 형태의 연주가 가능하도록 최대한 가변성을 높여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건물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콘서트홀'과 다용도 '루체른홀', 그리고 '컨벤션센터'가 그것인데 이 세 부분이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 수로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특히 이채롭다. 이 건물 설계공모에 당선된 프랑스의 유명한 장 누벨이 이곳의 지리적 여건을 십분 고려하여 애초 배가 호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형상을 계획했다가 환경파괴라는 반대에 부딪혀 "내가 물에 갈 수 없다면 나에게 물이 오도록 하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변경한 결과물이다.
▲ KKL 공연장 내부거대한 파이프오르간, 정교한 음향판 등 다양한 형태의 연주가 가능하도록 가변성을 최대로 끌어올린 명품 공연장. ⓒ 이종민
▲ KKL 내부에서 바란 본 풍광천장과 바닥이 일종의 프레임 역할을 하며 묘한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다. ⓒ 이종민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호수로 향한 벽면을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유리창으로 처리함으로써 액자를 통해 전혀 새로운 느낌의 호반도시 풍광을 볼 수 있도록 연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전체적으로 주변 건물들이 위로 솟아오른 느낌인데 이 공간은 수면과 하늘과 평행을 이루며 가로로 넓게 퍼져 보이게 설계한 점에서도 건축가의 세심한 배려를 읽을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안내를 맡은 두 분 이 공간 관계자의 설명을, 풍광 우리 안내인이 제대로 통역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음악 전문 용어들 탓만이 아니라 이들의 열정과 진정성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악편지를 쓴다면서 세계적인 음악축제가 벌어지는 곳에 와 달랑 공연장만 보고 돌아서려니 아쉬움이 컸다. 이런 정도로도 이 나라에서는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움칠할 수밖에 없었다. 루체른 말고도 스키 시즌을 벗어난 비수기에 세계적인 음악축제가 열리고 있는 베르비에, 그리고 취리히, 제네바, 베른 등 이름만 들어도 주눅 들게 하는 도시가 하나둘이 아니다.
이들 도시들에 대한 자랑으로 문화회관에서의 버벅거림을 보충하려는 듯한 안내인의 떠벌림이 짜증스럽기도 했지만 문화에 대한 이들의 놀라운 열정과 진정성 그리고 창의적인 역발상(한여름에 독특한 음악제를 기획하여 세계적인 뮤지션들을 끌어들이다니)에 기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 취리히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망연자실 차창만 바라보며 "취리히에도 비는 내리고"만 중얼거렸을 뿐이다.
▲ 빈사의 사자상프랑스혁명 당시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를 지키다가 숨진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스위스의 슬픈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 이종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