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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방이란 게 생겨? 그래도 애 못 맡겨"

대한민국 워킹맘, 20년 동안 더 뻔뻔해졌다

등록|2008.08.25 15:08 수정|2008.08.25 15:08
요즘 직장 주부의 애환을 그린 SBS 드라마 <워킹맘>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만큼 직장 여성이 화제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직장 여성의 애환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애환은 세월이 흘렀어도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 안소민 시민기자가 30여 년 전 워킹맘이었던 엄마와 이웃에 살고 있는 워킹맘의 사람을 비교해 봤다. [편집자말]

▲ 직장과 육아, 두개를 함께 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워킹맘도 변하고 있다. ⓒ 최은경


# 1978 워킹맘의 일기

1978. 8. 26
내일이 개학날이다. 내일부터 전쟁같은 하루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다행히 1년에 두 번 있는 방학 기간은 교사 주부에게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진희(8)가 다니는 학교에 부임을 받아 진희의 방과후를 어느 정도 돌봐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학교 측에 눈치보이는 일이다.

어쨌거나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나머지 두 아이가 문제다. 선희(6)는 시누이가 봐주기로 했고 상희(3)은 시어머님이 봐주기로 했다. 오늘 저녁에 아이들을 각각의 집으로 데려다줘야 한다. 아이들이 잘 떨어질지 걱정이다.

1978. 9. 3
개학을 한 지 일주일 정도 되어 가지만 아직 적응이 안 된다. 아침부터 부산하다. 식사 준비에 출근 준비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 설거지는 대충 설거지통에 담가놓고 정신없이 집을 나섰다.

수업 중간에 잠깐 교무실로 시어머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 있으셔서 며칠 상희를 보지 못하게 됐다"는 말씀을 하신다. 할 수 없이 상희는 내일부터 시아주버님 댁으로 가게되었다. 동서가 며칠 짬을 내어 봐주기로 했다. 그 동안 어머님이 돌아오시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 봐야 한다. 이럴 때는 '비빌 언덕도 없는' 내 자신이 정말 애처롭다. 산후조리 때도 친정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이처럼 슬프지 않았다. 오늘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아무 정신이 없다. 

1978. 9. 14
어제 선희의 유치원에서 생일파티가 있었다. 물론 가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엄마들이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먹을 것을 싸들고 유치원에 왔다고 한다.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생일파티, 반갑지가 않다.

1978. 9. 20
진희가 많이 아프다. 열이 펄펄 나고 구토를 심하게 한다. 학교에 말씀드리고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집에 가서 약을 먹이고 아이의 열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학교로 향했다. 다시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그렇잖아도 요즘 운동회 준비 때문에 바쁜데 몇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으니 교감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말은 안 하지만 아이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다. '그럴 거면 차라리 김 선생처럼 사표를 내는 게 속편하지 않냐'는 말을 하는 듯 하다. 하지만 교감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알까. 아이들이 아플 때면 마음속으로는 사표를 열두번도 더 썼다 지웠다 하는 것을.

1978. 9. 25
앞으로 몇년 후에는 어린아이들을 많이 봐줄 수 있을 거라는 기관이 생길 것이라는 뉴스를 들었다. 그러나 갓난아이를 어떻게 생판 모르는 남에게 맡기느냐며 시부모님이나 남편은 펄쩍 뛴다. 아이는 그저 엄마 손에서, 할머니 손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에게 맡기느니 차라리 당신이 돌봐주겠다고는 하신다.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엄마인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신다.

왜 자식은 엄마만 키워야 하는 것일까. 나의 직장은 그들 눈에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아니면 내가 좀 유별난 것일까. 무척 혼란스럽다.

1978. 9. 30
오늘은 일요일. 밀린 집안일을 했더니 무척 고단하다. 휴일날 손하나 까딱 않는 남편과는 달리 나는 일요일이 매우 분주하고 피곤하다. 이 일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언성이 높아지고 그러다 보면 "직장을 관두면 될 거 아니냐"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 너무나 뻔하기에 그냥 참고 넘어간다. 시어머님으로부터 "직장 다닌다고 살림 엉망으로 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라도 이를 악물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한다. 날씨가 그새 많이 서늘해져서 이제 손빨래하는 것도 고역이다. 비누도 딱딱해서 거품도 안 난다. 누가 나 대신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었으면…. 아~ 정말 내가 다른 사람 말처럼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1978. 10.4
운동회도 끝나고 가을 소풍만 앞두고 있다. 운동회를 끝내고 났더니 온 몸이 천근만근이다. 어제는 하루 결근했다. 몸살 감기를 호되게 앓았다. 집에 누워있었더니 학교에서 돌아온 진희가 나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진희가 그렇게 좋아할 줄 미처 생각 못했다. 아파 누워있는 엄마라도 집에 있으니 좋긴 좋은 모양이다. 가슴이 괜시리 뜨거워진다.

진희·선희·상희는 나중에 나처럼 고생하지않고 편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 그 때쯤이면 직장주부에 대한 인식이나 제도도 한결 나아질 것이다. 분명 그럴 날이 올 것이다.

▲ 영상통화 핸드폰 광고 '육아문제'편. ⓒ KTF


#. 2008 워킹맘의 일기

2008. 7. 25
오늘부터 아이들의 놀이방 방학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놀이방은 교사들이 교대로 근무를 하기 때문에 쌍둥이 은지·현지(3)의 방학은 3일밖에 안 된다. 방학이 시작되는 오늘은 옆집 현숙이 이모네, 내일은 앞집 놀이방 선생님 친구분 댁, 모레는 같은 반 지운이라는 친구의 엄마가 오전 동안 봐주기로 했다. 오후에는 피트니스 센터에 가야 한다고 하니 오후에는 내가 반차를 내고 조퇴하는 수밖에 없다. 앞집·옆집·뒷집을 전전해야 하는 신세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방학이 3일이기에 망정이지, 그 이상이었으면 어땠을 지 생각만 해도 '대략난감'이다.

2008. 8.4
오늘 교육이 있었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다. 놀이방 선생님께 전화로 사정을 말씀드리고 아이들을 조금 더 맡아달라고 부탁드렸다. 교육이 끝나고 놀이방에 아이들을 데리러가니 어둑신한 놀이방에 우리 아이들만 있었다. 늘 보던 익숙한 풍경이다. 한두번 보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목울대가 뻐근해진다. 집에 오자마자 땀범벅이 된 아이들을 씻기고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밥을 먹고 난 뒤 대충 청소를 마치고 아이들을 재우자 밤 11시가 넘어가고 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물어 가고있다.

2008. 8. 13
민규(5)가 저녁에 유치원 이야기를 하면서, 같은 반 경희라는 아이가 방학 동안 부모님과 여행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그런가 하면 성진이네는 박물관에 가서 함께 엄마와 함께 하는 도자기 체험학습에 등록을 마쳤다고 한다. 평일 오후에 하는 그 프로그램은 나 같은 직장 엄마는 꿈도 꾸지 못한다. 부럽다. 우리 민규와 쌍둥이들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고 싶은데 몸이 직장에 매여있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직장을 다녀서 가장 힘들거나 아쉽다고 생각할때는 바로 이런 때다.

2008. 8. 20
아이들을 재우다 잠이 들었나 보다. 티브이 소리에 잠을 깨보니 밤 11시가 가까운 시각이다. TV에서는 염정아가 주연인 <워킹맘>이라는 드라마가 방영 중이다. 드라마 속 가영(염정아 분)이의 상황은 좀 억지스럽다. 아무리 자기 일도 중요하다지만 그렇게까지 하면서 친정 엄마에게 애를 맡겨야 할까.

물론 그 심정이야 이해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엄마가 애를 봐주겠다고 해도 나는 반대다. 나뿐 아니라 내 주위 동료들도 대부분 놀이방이나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긴다. 친정 엄마께는 미안해서이고, 시댁에는 눈치가 보여서이다. 아니면 시댁이 너무 멀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엄만 작년에 수술을 받으신 후 눈에 띄게 기색이 수척해지셨다. 젊은 시절 직장을 다니셨던 엄마는 우리들 육아 문제 때문에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그 고통을 또 안겨드릴 수는 없다. 요즘 어떻게 지내실까. 안부전화 잊지말아야 겠다.

2008. 8. 22
아이 목욕을 두 번이나 시켜야 했다. 원래 아이들 목욕은 남편 몫이긴 하지만 요즘 야근이 계속되는 바람에 내가 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을 재운 뒤 컴퓨터를 켰다. 다음주 교육에 보충할 자료와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자꾸 감긴다. 그냥 자고 싶지만 안 된다. '아줌마'라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공부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민규, 은지, 현지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될 것이다.


1978년 워킹맘의 일기는 실제 주인공인 나의 친정엄마(정선환, 58세, 전주 반월동)를 모델로 쓴 글이다. 2008년 워킹맘은 나의 딸아이가 다니는 유치원 한 학부모(은미자, 29세. 전주 삼천동)씨가 모델이 되어 주었다. <워킹맘>을 보냐는 질문에 워킹맘을 볼 시간도 없다는 그녀와는 시간이 맞지 않아 밤 10시가 넘어서 전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취재를 하면서 30년을 넘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워킹맘에도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차이점은 30년 전에는 아이는 '무조건' 엄마나 가족, 특히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돌봐야한다 고정관념이 강했다. 이에 비해 요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친정엄마나 시어머님의 육아를 기대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예전에 비해 놀이방이나 어린이집과 같은 탁아시설이 늘어난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은미자씨는 "엄마가 아이를 돌봐준다고 하면 맡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엄마에게도 엄마의 인생이 있다며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다. 특히 요즘은 건강이 안 좋으셔서 맡길 형편도 아니다"고 말했다.

둘째, 30년 전에는 가사일도 전부 직장 여성의 몫이었던 데 반해 요즘은 그나마 부부의 가사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남녀가 공평으로 가사를 해야한다는 의식을 기본으로 서로 절충해 가며 돕고있다. 

셋째, 30년전 워킹맘들이 죄의식으로 주눅이 들어 직장생활을 해야했던 데 비해 요즘 워킹맘은 비교적 당당하다. 직장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기 위한 욕구도 강하다. 은미자씨는 "아줌마들 특유의 오기와 고집으로 일을 더 잘 할 수 있다. 아줌마들도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엄마가 일을 한다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주고 엄마가 직장을 다님으로 해서 일어나는 갈등은 서로 타협점을 찾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워킹맘에게 육아문제는 현재진행형, 네버엔딩 스토리다. 해답이 없는 숙제와 같다. 과연 2038년 워킹맘의 육아일기는 어떤 빛깔을 띄고있을까. 또한 오늘날 워킹맘 세대가 할머니가 되었을때쯤 또 한번 육아문제로 머리를 싸매지는 않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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