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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인간] 1500명 일본 병사들, 쿠데타를 일으키다

김갑수 항일역사팩션 (105회) 제2부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2008.08.25 14:56 수정|2008.08.25 14:56
동경의 총성, 젊은 장교들의 쿠데타

그러던 중에 도쿄 시내에는 폭설이 내렸다. 시내 전부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아침 일찍 요란한 총성이 겨울의 냉기를 찢었다. 시민들은 시내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전화로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친척이나 친구가 사는 곳에서도 총성이 울렸다고 했다. 그 날 아침 도쿄에서 총성이 난 지역은 최소 10여 군데 이상이었다. 시민들은 총성이 터진 곳이 모두 정부 요인들이 사는 동네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침 첫 총소리가 터지고 불과 24시간 동안에 일본제국의 내무대신, 재무대신, 교육총감 등이 죽었고 굴뚝 속에 숨은 수상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뿐만 아니라 천황의 측근들마저도 살해되었다. 아울러 경시청과 육군성과 참모본부 등이 1500명의 육군 병사들에게 장악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천황의 궁정대신을 죽인 것은 실수였다. 이 쿠데타를 주도한 것은 겁 없는 육군 청년 장교들이었는데, 그들은 관동군 수뇌부와 교감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일본제국이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중국과의 전쟁에서 비겁하게 몸을 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미국, 영국 등 서구 열강의 눈치를 보는 나약한 정부를 방치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미국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침체해 있는 일본 경제를 정부의 무능으로 몰아갔다. 그들은 각료, 정당, 재벌 등 타락한 지배 계층을 제거하고 천황이 친정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사를 명치유신과 버금가는 '소화유신'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의 서슬에 공포를 느낀 정부와 군 수뇌부는 그들을 사태 수습의 계엄군에 편성시켜 권력을 쥐게 함으로써 그들의 의혈 거사는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숭배해마지 않던 천황이 쿠데타군에게 직격포를 날렸다.

"철없고 흉악한 것들이 내 오른 팔 같은 궁정대신을 죽이더니, 이제 내 목까지 조이려 드는구나."

천황은 쿠데타군을 즉각 제압하라고 명령했다. 천황의 명령으로 사태는 일순 역전되고 말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본인들의 타고난 종교적 기질이 바탕에 있었다. 천황은 일본인들의 종교와 같았다.

일을 그르친 것을 안 주동 장교들은 영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며 천황에게 자결 명령을 내리는 칙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구한다.

"죽든지 말든지 너희들 맘대로 해라."

천황은 칙사 파견을 거부하고 주모자 17명을 사형시켜 버렸다.

그들은 죽었지만 경악스럽게도 일본 국민들의 여론은 그들 편으로 휩쓸려 들었다. 그들이 외친 '대화혼'에 일본 국민들은 공감한 것이다. 그 결과 불과 1년 후 파시즘의 광기가 일본 열도를 달구게 된다. 결국 일본은 350만의 전체 병력 중에서 200만이 넘는 병력을 대 중국전에 투입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이 점령한 것은 광활한 대륙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륙을 연결하는 철도와 정거장에 불과한 선과 점의 점령일 뿐이었다.

매란국죽과 친화한 조상들

김영세는 일본 장교들의 쿠데타를 소화정변이라고 지칭하기로 했다. 일본의 소화정변은 여러 모로 조선의 갑신정변과 흡사했다. 주체가 청년이라는 점, 국왕을 부정하지 않고 이용하려 했다는 점, 정적을 기습 살해했다는 점, 사상적 지원자가 있었다는 점,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 그리고 자기 것을 전면 부인했다는 점, 더욱 중요한 것은 정변이 있고 나서 10여 년 후에 나라가 망했다는 점이었다.

김영세는 마당 귀퉁이에 피어 있는 국화를 보고 있었다. 샛노란 국화였다. 그는 장미든 국화든 꽃덩이가 굵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벌써 계절이 초겨울로 접어들었고 첫눈도 내렸건만 국화는 여전히 싱싱하고 샛노랬다. 서리가 내릴수록 국화는 오히려 더 고와지고 있는 듯했다. 김영세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꽃덩이가 작은 토종 국화였다.

풍상(風霜)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운 황국화를
금분(金盆)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桃李)야 꽃인 양 마라 님의 뜻을 알겠다.

명종이 옥당(홍문관)에 하사한 국화를 보고 신하 송순이 쓴 즉흥시였다. 김영세는 도리와 국화의 대조가 잘 이루어진 시라고 생각했다. 도리란 복숭아꽃과 오얏꽃으로서 봄에 화려하게 피는 꽃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변절자를 가리키는 비유였다.

김영세는 변하지 않는 것을 최고로 여겼던 선조들의 문학 작품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물과 바위와 소나무와 대나무에 그의 조상들은 친화감을 느꼈다. 이 모두가 일관성을 보이는 자연물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조상들은 누구보다 일찍 꽃잎을 터트리는 매화와 무엇보다 정결한 난초와 그 어떤 것보다 곧은 대나무를 국화와 함께 4군자라고 하여 예찬의 대상으로 삼았다.

김영세는 날이 저무는 것도 모른 채 노란 국화를 완상하고 있었다. 그는 사악한 것들의 공통된 속성을 생각해 보았다. 일관되지 않아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사악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김영세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둘 있었다. 그는 방을 향해 조카를 불렀다. 김문수가 방문을 열고 마당에 있는 삼촌을 보았다.

"삼촌, 춥지도 않으세요?"

김영세는 조카에게 좀 내려와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조카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더니 두꺼운 잠바를 입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둘 있다."
"아, 네."

조카는 대답하면서도 최소한 둘은 더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미소가 일었다. 김영세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카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이 점퍼에 손을 찌른 채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일본은 지금 파시즘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 파시즘의 원조, 기타 이키

일본의 쿠데타 주동자 17명 가운데 유일한 민간인이 있었다. 그는 청년 장교들에게 숭배 받았던 기타 이키라는 사람이었다. 19세에 오른 눈을 잃어 외눈박이가 된 그는 1906년 23세 때에 <국체론 및 순정자본주의>라는 제목의 저서를 자비로 출간한다. 이 책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론에 버금가는 역작', '기성학자 계급에 대한 정복'이라는 등의 극찬을 받는다.

기타 이키는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손중산이 만든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했다. 그는 손중산이 신해혁명에 성공하자 상해로 가서 중국국민당 대표였던 송교인 등과 친교를 맺고 이후 8년 간이나 중국 혁명을 도왔다. 기타 이키는 일본 정부가 손중산의 혁명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는 영일동맹을 파기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서 영국을 동양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중국으로 하여금 힘을 길러 소비에트와 전쟁을 할 수 있게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다.

동양은 서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있는데, 이 해방의 전 과정은 동양의 맹주 일본이 사상적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기타 이키는 말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라는 호전적인 명분으로 위장하면서 동양의 패권을 일본이 잡아야 된다는 논리를 정당화한 것이다. 이 주장은 일본 젊은 장교들을 감동적으로 사로잡았다. 결과 일본의 젊은 장교들은 중국에 대한 무력 침략을 지상 과제로 믿게 되었고 이것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이념적 원동력이 되었다.

기타 이키는 손중산이 원세개와 협상하자 중국 혁명 정신이 퇴색했다고 비난하고 상해로 돌아와 저작에 몰두했다. 얼마 후 그는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의 혁명 사상과 세계 질서 개조 방법론을 담은 책이었다. 이 책은 그의 귀국과 함께 붐을 일으켜 일본 우익의 영원한 바이블이 된다.

기타 이키는 일본의 유신을 위해 당, 군, 재계, 관료의 제거를 주장했다. 그는 천황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동원하여 일본의 헌법을 3년 간 무효화하고 귀족원과 중의원을 해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정액 이상 납세자에게만 있던 선거권을 25세 이상 모든 남자에게 부여해 선거를 해서 국가개조의회를 구성하자고 주장했다.

기타 이키는 일본이 아시아의 수령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한국이 언어와 풍습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에 딸린 지방이므로 북해도와 동등하게 서간도 정도의 지위를 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과 러시아의 압박에 맞서기 위해 대영토가 필요하므로 극동 시베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점령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무제한의 군비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타 이키는 <국가개조안원리대강>을 완성하고 난 후, 자기의 할 일은 모두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실천은 젊은이들의 몫이라고 하더니, 암자에 틀어박혀 법화경을 암송하면서 소일한다. 그는 언제나 신비롭고 카리스마적인 분위기를 내는 옷과 헤어스타일로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맞이했다. 그는 자신에게 보살의 칭호를 쓰도록 했다. 젊은이들이 그를 보살이라고 부르게 되자 그는 어느 날 말했다.

"보살의 출현은 혁명의 성취를 예언한 것이다."

기타 이키는 군국주의 파시즘을 선동했고 일본의 정책은 거의 그의 주장을 따라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200회 정도까지 계속됩니다. 작가 김갑수는 최근 전작 장편 <오백 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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