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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한자말 덜기 (47) 순수

[우리 말에 마음쓰기 409] ‘순수한 마음’, ‘순수 서평’ 다듬기

등록|2008.08.26 11:54 수정|2008.08.26 11:54

ㄱ. 순수 1

.. 그 초가집에는 눈송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순이’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  《엄광용-초롱이가 꿈꾸는 나라》(이가서,2006) 12쪽

 ‘소년’과 ‘소녀’라는 말은 틀리거나 잘못 쓰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동화나 동시를 쓴다고 할 때에, 또 아이들한테 읽힐 글을 쓴다고 할 때에, 이 같은 낱말이 얼마나 알맞춤한가를 헤아려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어린 사내가 ‘少年’입니다. 어린 계집이 ‘少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아이’라고만 하거나 ‘사내-계집’이라 하거나 ‘사내아이-계집아이’라고 했습니다. 이리 쓰던 말이 어느 때부터인가 한자말 ‘소년-소녀’한테 잡아먹힙니다.

 ‘순이’라는 이름은 계집아이한테 붙이니, 굳이 계집아이임을 밝히지 않고 “순이라는 아이”라고 적어 주어도 넉넉합니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은 “마음이 순수한”으로 고쳐 줍니다.

 ┌ 순수(巡狩) :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
 ├ 순수(純水) : 부유물이나 불순물이 거의 섞이지 않은 물
 ├ 순수(純粹)
 │  (1) 전혀 다른 것이 섞이지 아니함
 │   - 순수 성분 / 순수 결정체 / 순수 농축액
 │  (2)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   -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를 지녔다
 ├ 순수(循守) = 준수(遵守)
 ├ 순수(循首) : 참형에 처한 죄인의 머리를 끌고 다니며 백성에게 보이던 일
 ├ 순수(順守) : 도리를 따라 지킴
 ├ 순수(順受) : 순순히 받음
 ├ 순수(順修) : 미혹을 버리고 진리에 따라 수행하는 일
 ├ 순수(順數) : 차례로 셈
 │
 ├ 눈송이처럼 순수한 마음
 │→ 눈송이처럼 맑은 마음
 │→ 눈송이처럼 해맑은 마음
 │→ 눈송이처럼 깨끗한 마음
 │→ 눈송이처럼 하얀 마음
 │→ 눈송이처럼 고운 마음
 └ …

 국어사전을 살피니, 모두 아홉 가지 ‘한자말 순수’가 보입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쓰는 ‘순수’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임금이 나다니는 일이나, 맑은 물이나 도리를 지키거나 차례로 세는 일을 ‘순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주 옛날에는 한문을 쓰던 지식인이 이와 같은 말을 하면서 살았는지 모릅니다만, 오늘날에는 이런 여덟 가지 ‘한자말 순수’는 쓰일 까닭이 없어요. 구태여 국어사전에 이런 낱말을 남겨 놓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덜어내야지요. 되살릴 만한 값이 있지 않을 뿐더러, 어느 누가 쓰는지 알 노릇조차 없는 찌꺼기입니다.

 ┌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를 지녔다
 │
 │→ 어린아이와 같이 해맑았다
 │→ 어린아이와 같이 맑았다
 │→ 어린아이와 같이 깨끗했다
 └ …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다는 “순수 성분”이나 “순수 결정체”에서는 ‘순수’를 살려 두어야지 싶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티없다’를 넣어서 “티없는 성분”으로 적을 수 있습니다. “맑은 결정체”라 적어도 어울립니다.


ㄴ. 순수 2

.. 2001년 봄부터 2002년 겨울까지 읽은 책들을 망라했을 뿐만 아니라, 순수 서평만으로 590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책을 엮어냈다는 사실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  (김기태) 《기획회의》(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183호 87쪽

 ‘망라(網羅)했을’은 ‘두루 모았을’로 다듬고, ‘방대(尨大)한’은 ‘어마어마한’으로 다듬으며, “590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量)의 책”은 “590쪽에 이르는 큰 책”이나 “59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으로 다듬어 줍니다. “엮어냈다는 사실(事實)이”는 “엮어냈다는 대목이”나 “엮어냈음이”로 손질합니다. ‘서평(書評)’은 ‘책 이야기’나 ‘책소개글’로 고쳐 봅니다.

 ┌ 순수 서평만으로
 │
 │→ 책소개글만으로
 │→ 오로지 책소개글만으로
 │→ 책소개글 한 가지만으로
 │→ 다른 글은 없이 책소개글만으로
 │→ 다만 책소개글만으로
 └ …

 생각이 가난하다고 말이 가난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낱말 숫자가 100이나 200밖에 안 되더라도, 이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낱말로도 너르고 깊은 생각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 알고 있는 낱말 숫자가 1만 이나 10만이 된다고 하지만, 자기 생각을 더 넓거나 깊거나 살뜰하거나 훌륭하게 펼치지 못하면서 말자랑이나 글치레로 빠지기도 합니다.

 ┌ 책을 이야기하는 글 하나로 590쪽짜리 두툼한 책을 엮어냈다
 ├ 책 이야기 한 가지로 590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을 엮어냈다
 ├ 책을 말하는 글만 모아서 590쪽이 넘는 큰 책을 엮어냈다
 └ …

 온갖 말로 놀랍도록 자기 생각을 펼칠 수 있으나, 말치레만 가득하고 자기 생각은 한 줌도 못 담아내기도 합니다. 말 지식은 많다고 하지만, 말에 담는 넋이나 얼은 가난하여 겉만 번지르르하기도 합니다. 거침없이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가만히 살피면 알맹이 하나 없는 쭉정이이곤 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말을 어떻게 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과 넋을 담아내고 있는가요. 이보다, 우리 삶은 어떤 쪽으로 흐르고 있는가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어떻게 다잡거나 추스르면서 무엇을 바라보면서 걸어가고 있는가요.

 나와 이웃을 두루 헤아리는 삶이면서, 나와 이웃을 고이 살피는 말이 되고 있습니까. 내 배만 부르면 된다는 얌체 같은 삶이면서, 내 마음대로 주절거리면 그만이라는 투로 읊조리는 말이 되고 있습니까.

 ‘순수’라는 한자말을 써서 자기 생각을 더 깊거나 넓게 보여줄 수 있다고도 하겠지요. 그러면 ‘순수’라는 말을 안 써서는 자기 생각을 더 깊거나 넓게 보여줄 수 없을까요. 우리한테는 알맞는 토박이말이 없어서 꼭 이 한자말을 받아들여서 이야기를 엮어 나가야 하는가요.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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