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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없애야 말 된다 (96) 교육적

― ‘방학의 교육적 의미’, ‘교육적인 방법’ 다듬기

등록|2008.08.27 16:48 수정|2008.08.27 16:48
ㄱ. 방학의 교육적 의미

..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교과서와 기계적인 숙제 공부에서 해방시켜 주는 일입니다. 학교 공부를 그대로 연장시켜 하게 된다면 방학의 교육적 의미는 없읍니다 ..  《이오덕-이 땅의 아이들 위해》(지식산업사,1986) 142쪽

“중요(重要)한 것은”은 “중요한 대목은”이나 “깊이 생각할 대목은”으로 다듬고, “기계적(機械的)인 숙제 공부에서 해방(解放)시켜 주는”은 “틀에 박힌 숙제 공부에서 풀어 놓는”이나 “베껴쓰기 숙제 공부에서 놓아 주는”으로 다듬습니다. ‘연장(延長)시켜’는 ‘이어’로 손보고, ‘의미(意味)’는 ‘뜻’으로 손봅니다.

 ┌ 교육적(敎育的) :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주는
 │   - 교육적 기능 / 교육적 열의 / 이 교재는 교육적 효과가 거의 없다 /
 │     교육적인 가치 /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
 │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을 주는 것은 교육적이라고 할 수 없다
 ├ 교육(敎育) :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줌
 │   - 학교 교육 / 교육을 받다 / 교육 환경이 열악하다
 │
 ├ 방학의 교육적 의미는 없습니다
 │→ 방학을 하는 뜻은 없습니다
 │→ 방학으로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합니다
 │→ 방학을 해도 아이들은 배울 수 없습니다
 └ …

세상에 옹근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지난날에는 궂은 모습이었어도, 스스로 깨닫고 고치는 가운데 차츰 나아지거나 새로워지기도 합니다. 지난날에는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스스로 갈고닦지 않거나 게으르면서 오히려 얄궂거나 짓궂어지기도 합니다. 우리한테 훌륭한 말씀을 두루 남긴 이오덕님이지만, 당신이 우리 말과 글을 찬찬히 헤아리지 못하던 때 쓴 글은 얄궂음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예전 글이라 얄궂음투성이였지, 그 뒤 이와 같은 글투와 글씨를 하나하나 추리고 솎고 다듬었습니다. 스스로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고,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 교육적 기능 → 교육 기능 / 가르치는 기능
 ├ 교육적 열의 → 가르치려는 뜻
 └ 교육적 효과가 거의 없다 → 거의 배울 만한 구석이 없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당신 몸만 사려서 대충대충 살지 않은 이오덕님입니다. 일흔을 넘긴 뒤에도, 그동안 쌓은 열매만 따먹으며 살지 않은 이오덕님입니다. 늘 곱씹고 되돌아보고 헤아리면서 조그마한 대목 하나 놓치거나 빠뜨리지 않으면서 담금질을 했습니다. 언제나 고개 숙여 배우는 가운데, 당신 얼과 넋을 갈고닦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교육, 그러니까 ‘가르침’은 자기가 쌓은 지식을 혼자 꿍쳐 두지 않고 누군가한테 내어주는 일만이 아닙니다. 가르침은 ‘배움’이 있어야 가르침이고, 배움은 자기가 얻은 모두를 스스럼없이 내놓아 이웃을 가르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제자리를 잡습니다. 몸으로 살아내는 가르침이요 배움입니다. 온몸으로 부대끼는 삶이 고스란히 가르침이요 배움입니다. 온마음으로 땀흘리고 애쓰는 삶이 바야흐로 가르침이요 배움입니다.

 ┌ 교육적인 가치 → 가르치는 값어치
 ├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 가르치기에 바람직하지 않다
 └ 교육적이라고 → 교육을 생각한다고 / 올바르다고 / 알맞다고

입으로 훌륭한 말씀을 되뇌인다고 하여 훌륭한 사람이지 않습니다. 말은 언제나 누구나 합니다. 훌륭한 듯 들리는 말을 못하거나 안 하는 사람은 없다고 느낍니다. 나라가 어떻고 겨레가 어떻게 사회가 어떻고 문화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 또한 없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자기 말 가운데 터럭 하나만큼이나마 몸으로 옮기면서 조용히 살아내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입이 아닌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가르치려 들면서도 배우려 들지 않습니다. 배우려 들면서 가르치지 못합니다. 들어오기만 해도 어울리지 않고, 나가기만 해도 알맞지 않습니다.

ㄴ. 교육적인 방법

.. 무서워서 나타나지도 못하는 애를 붙잡아 꾸중을 한다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 방법일까? ..  《이숙의-이 여자, 이숙의》(삼인,2007) 371쪽

“꾸중을 한다는 것이”는 “꾸중을 하는 일이”나 “꾸중을 해서야”로 손봅니다. ‘과연(果然)’은 ‘참말로’나 ‘참으로’로 다듬습니다. ‘방법(方法)’은 그대로 둘 수 있는 한편, ‘길’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 교육적인 방법일까
 │
 │→ 교육에 알맞을까
 │→ 교육일까
 │→ 좋은 교육일까
 │→ 올바른 길일까
 │→ 훌륭한 가르침일까
 │→ 아이한테 도움이 될까
 │→ 아이가 무언가 배울까
 └ …

교사는 학생 앞에 서서 ‘교육’을 합니다. 참다운 교육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올바른 교육이 나아갈 길을 헤아립니다.

교육이란 가르치는 일입니다. 교사 자리에서 본다면 가르침입니다. 또, 교육이란 배우는 일입니다. 학생 자리에서 본다면 배움입니다. 그러면서 교사가 학생한테 배우고, 학생은 교사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교사가 아이 앞에서 “참으로 알맞는 교육일까” 하고 생각한다면, “교사인 내가 이렇게 하는 일이 아이한테 올바르게 가르치는 길인가” 하고 되돌아보는 셈입니다. 거꾸로 놓고 보면, “교사인 내가 이렇게 하면 아이는 찬찬히 느끼고 배울 수 있는가” 하고 곱새기는 셈입니다.

제대로 가르치는지 돌아보면서 참삶을 생각합니다. 제대로 배울 수 있는지 가늠하면서 서로 즐겁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서로가 서로한테 길동무이고 길잡이입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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