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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정 깊은 '강화 사람' 유영갑이 사는 법

[신간] <갈대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

등록|2008.08.27 19:13 수정|2008.08.28 10:01

▲ ⓒ 삶이 보이는 창


1991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해 <푸른 옷소매> <그 숲으로 간 사람들> <달의 꽃> 등을 상재한 소설가 유영갑(50)을 두어 차례 만난 적이 있다. 한번은 문인들과의 여행지에서였고, 또 다른 한두 번은 작가들이 여럿 모인 주석에서였다.

자기 뜻을 앞세우지 않고, 조용히 앉아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점잖은 사람. 동그란 낡은 안경테 뒤로 비치는 눈빛이 선하고 정 깊어 보였다.

그가 네온사인 번득이는 도시에서의 삶을 접고 고향인 강화로 들어가 빈 집을 수리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대략 6~7년 전쯤. 그는 아직도 거기서 바다 내음과 쓸쓸한 가을 하늘을 벗 삼아 홀로 산다고 한다.

며칠 전 책 한 권이 집으로 배달됐다. 서둘러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하니 잘 찍은 사진과 맛깔스런 글이 눈길을 잡아채는 산문집이다. 저자는 유영갑. 그가 술자리에서 만난 인연을 잊지 않고 기자에게 책을 보내온 것이다.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갈대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삶이 보이는 창 펴냄).

책은 오십 살 사내가 유배지처럼 한적한 시골에 살며 맛보는 삶의 씁쓸함과 달콤함, 사람살이의 고단함과 즐거움, 어릴 적 뛰놀던 고향 강화의 풍광과 기억까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책도 사람을 닮는가? <갈대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에 실린 문장들은 유영갑처럼 따스했다. 아래와 같은 대목들이다.

겨울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인내와 끈기를 강요한다. 그런 점에서 이 계절은 내 삶의 어떤 부분과 닮아 있다. 하지만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고통이라는 불방망이에 두드려 맞을수록 내면이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 위의 책 중 소제목 '강화극장'의 한 부분.

하늘에 은동전 같은 달이 떠 있었다. 너른 갯벌과 빈 들판에 서늘한 달빛이 떨어져 교교하고 적막하다. 창문을 열자 바다를 건너온 차가운 해풍이 밀려든다. 검은 띠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가 텅 비어있었다.
- 위의 책 중 소제목 '외포리 가는 길'의 한 부분.

체온보다 따뜻한 글과 정겨운 사진의 행복한 결합

혼자서 조석을 끓여 먹어야 하는 차가운 살림집의 겨울살이에서도 다가올 봄의 희망을 잃어 버리지 않고, 외딴 마을 가는 길에서 만난 텅 빈 도로에서 풍선처럼 부풀어야 마땅할 생에 대한 기대를 떠올리는 사람. 이처럼 문장과 사람이 한결같이 순박한 유영갑은 착하고 정 깊은 작가다.

이번 책은 이처럼 훈훈한 문장 외에도 아마추어의 실력을 훌쩍 뛰어넘는 유영갑의 사진을 보는 기쁨까지 준다. 그가 렌즈를 통해 본 강화의 바다와 벌판, 그곳에 기대 삶을 이어온 강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정겹고 따뜻하다.

때로는 자신의 보잘것 없는 살림살이를 한탄하고,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강화 사람' 유영갑은 행복하다. 왜냐? 유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나 하나만이 아닌 '우리'를 위해 기쁘게 밥 한 술 덜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고향에서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봄과 여름이 다르고, 심지어 비 내리기 전과 비 온 후가 또 다른 아름다운 강화의 풍광 속에서 도를 닦듯, 수채화처럼 살아가는 유영갑. 그의 내면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산문집 <갈대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도시의 일상을 사는 독자들을 다독이며 위로할 듯하다.

책에는 그가 지천명에 이르러 깨달은 생의 진리가 곳곳에 담겨 있다. 그렇다. 고통이건 쾌락이건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인간의 불행은 자신이 유한하고 한정적인 존재임을 망각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지.

겨울밤이 점점 깊어갔다. 쏴아아. 저 만주벌판을 건너왔음직한 매서운 삭풍이 휘몰아친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바람소리를 들었다. 묵묵히 눈보라를 견뎌내고 있을 뒷산 기슭의 메마른 나목들이 떠오른다. 나무들은 알고 있을 터이다. 혹한의 시간이 지나가면 언 땅이 풀리리라는 것을.
- 위의 책 54p의 한 대목.


문학평론가 김정화는 "무거운 기억과 퇴락한 공간들도 유영갑의 눈에 비치면 작은 서정으로 반짝이면서 우리가 잊거나 잃었던 풍경들을 고스란히 복원해낸다"는 말로 <갈대 위에는 눈이 쌓이지 않는다>의 출간을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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