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석빙고 일곱 개 중 두 개가 있는 곳은?
<창녕의 문화재를 찾아서 4> 창녕석빙고((보물 제310호), 영산석빙고(사적 제169호)
▲ 창녕 석빙고(보물 제 310호)석빙고는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겉모양은 마치 큼지막한 고분처럼 보이나, 내부는 석재를 써서 장방형의 빙실(氷室)을 이루고, 계단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답사자의 눈으로 볼 때 창녕 석빙고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주변 조경도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다. ⓒ 박종국
요즘 세상에 얼음은 단지 겨울철 생색내기가 아니라 한여름에도 쉽게 만날 수 있고, 냉차나 찬 음식을 만드는 데 빠지지 않는 감초가 되었다. 전천후다. 하지만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얼음을 어떻게 얼려 먹었을까. 사람 힘으로 얼음을 만드는 재주가 없던 옛날에는 겨울 추위로 생긴 얼음을 창고에 넣어 짚과 풀로 덮고 꽁꽁 닫아 갈무리했다가 조금씩 잘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여 그러한 생활지혜를 발현시킨 얼음 창고가 바로 ‘석빙고’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총 7개의 석빙고( 경북의 청도, 현풍, 경주, 안동, 경남의 창녕, 영산, 북한의 황해도 해주)가 남북한에 존재하고 있다. 모두 18세기에 만들어져 경북 경주, 경남 창녕 등 경상도 지역에 몰려 있다. 반 지하에 내부 공간은 12 미터, 폭 5미터, 높이 5미터 안팎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석빙고의 위치에 중요한 특성이 있다. 석빙고는 우리 유산 중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것으로, 외견상 단순한 고분 형태다. 석빙고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과학문화재임에 틀림없다.
▲ 창녕 석빙고(앞쪽에서 바라 본 전체 모습) 현재 석빙고는 대부분 그 옆에 축조 시기를 알 수 있는 비석이 있어 축조 연대와 관계자를 정확히 알 수 있는데, 창녕 석빙고 비문에 쓰인 내용은, 당시 현감(懸監) 신서(申曙) 등이 1742년(영조 18) 2월 초하루에 영건(건물을 세움)하여 그 해 4월에 끝마쳤다고 되어 있다. ⓒ 박종국
최근 에너지 고갈과 환경문제가 전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자연에너지 개발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에너지는 실용화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이미 지혜를 발휘하여 한여름에도 얼음을 즐겼다. 매년 2월말 강가에서 두께 12cm 이상의 얼음을 잘라내 석빙고에 저장한 뒤 6월부터 10월까지 수시로 그 얼음을 꺼내 더위를 물리쳤던 선조들, 석빙고가 한여름 무더위를 견딜 수 있었던 비결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로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겉모양은 마치 큼지막한 고분처럼 보이나, 내부는 석재를 써서 장방형의 빙실(氷室)을 이루고, 계단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 창녕 석빙고 입구 모습지금 창녕석빙고는 출입구를 감가놓아 석빙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애석하다. 이유는, 이미 울진석류굴이나, 단양의 고수동굴을 비롯한 여러 동굴에 사람이 드나듦으로써 종유석의 빛깔이 거무튀튀해졌다는 증거 때문이다. ⓒ 박종국
그러나 현재 창녕석빙고는 출입구를 잠가놓아 석빙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애석하다.(그 이유는, 이미 울진석류굴이나, 단양의 고수동굴을 비롯한 여러 동굴에 사람이 드나듦으로써 종유석의 빛깔이 거무튀튀해졌다는 증거 때문). 답사내방자에 따르면, 빙실길이 11m, 너비3.6m, 홍예높이 3.7m의 규모이며,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좌우 벽은 아래에 장대석으로 4칸을 쌓았으며, 마주보는 앞쪽 벽면은 쌓은 4칸 위에 길지 않은 돌로 3칸을 더 올렸다. 그런 연후에 빙고(氷庫)에 넣는 얼음은 여름을 능히 견뎌낼 수 있는 두께(4치) 이상의 것을 썼다.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한데, 차진 흙을 깔았다. 또 얼음 녹은 물을 밖으로 빼기 위해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만들어 두었다. 천장은 무지개돌(홍예)을 4군데 틀어 올린 다음 장대석으로 건너질렀다. 무지개돌은 석빙고의 특징이다. 얼음에게 기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게다가 공간을 넓게 쓰지도 못한다. 그래서 천장을 평면이 아닌 원형으로 만들어 기둥이 없어도 되게 한 것이다. 또한 천장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공기가 드나들게 하였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인 이치로 만들어진 석빙고에는 여름철에도 얼음이 가득했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당시 양반층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권이었을 뿐 서민들에게는 보고도 못 먹는 장떡이었다.
▲ 창녕 석빙고 천장 환기구멍 석빙고 내부는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한데, 차진 흙을 깔았다. 또 얼음 녹은 물을 밖으로 빼기 위해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만들어 두었다. 천장은 무지개돌(홍예)을 4군데 틀어 올린 다음 장대석으로 건너질렀 으며, 천장을 평면이 아닌 원형으로 만들어 기둥이 없어도 되게 했다. 또한 천장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공기가 드나들게 하였다. ⓒ 박종국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6년(505년)에 “비로소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보아 자세하지는 않지만 얼음 저장이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을 명기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 때도 빙고(氷庫)가 있었으며, 초기에는 돌이 아닌 나무창고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얼음이 빨리 녹고, 해마다 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 때문에, 세종 2년(1420년)에는 서울 동·서빙고를 석빙고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낮은 언덕에 커다란 고분처럼 보이는 ‘석빙고’가 일반 형태가 됐다.
▲ 영산 석빙고(사적 제169호)영산 만년교에서 동쪽 함ㄴ박산 약수터로 가는 500m 거리에 있다. 만든 시기나 수법은 창녕 석빙고(1742)와 거의 같은 18세기 중엽이다. 남쪽으로 문이 나 있고, 문쪽이 바닥보다 높으며, 그 반대쪽이 낮은 무덤 형태이다. 봉토 주변에 자연석을 쌓아 호석을 둘렸고, 정상에는 두 곳의 배기공이 있다. 문은 지표에서 한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게 된 돌계단 끝에 있으며, 옹벽은 돌 세 벌을 쌓아 주변을 정리하였다. 거칠게 다듬은 거대한 돌로 벽을 쌓고, 세 틀의 홍예를 바깥쪽으로 내고, 그 위에 판석을 덮어 공간을 차지 하였다. ⓒ 박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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