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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없애야 말 된다 (99) 소모적

― ‘소모적인 논쟁’ 다듬기

등록|2008.09.02 16:52 수정|2008.09.02 16:52
ㄱ. 소모적인 논쟁

.. 어떻게 보면 소모적인 논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근저에는 미학적 입장의 대립, 나아가 미학적 입장의 저변에 깔려 있는 정치적 입장의 대립이 존재하고 있다 ..  <곤혹한 비평>(이현식, 작가들, 2007) 93쪽

‘근저(根底)’는 ‘바탕’이나 ‘밑바탕’으로 고쳐쓰면 됩니다. ‘저변(底邊)’도 그래요. 한자를 요모조모 달리 쓴다고 하지만, 뜻이나 느낌이 썩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낱말을 쓰고프다면, 앞에서는 ‘바탕’이나 ‘바닥’을, 뒤에서는 ‘밑바탕’이나 ‘밑바닥’을 써 주면 넉넉합니다. 그나저나, “미학적(美學的) 입장(入場)의 대립(對立)”이나 “정치적(政治的) 입장의 대립이 존재(存在)하고”처럼 어렵게 써야 하나 모르겠네요. 어떻게 보면, 이처럼 쓰는 말투나 낱말이야말로 ‘힘만 빼는 부질없는’ 말놀이가 아닐까 싶어요.

 ┌ 소모적(消耗的) : 소모되는 성질이 많은
 │   - 소모적 전투 / 여야의 소모적인 대치 정국이 계속되고 있다
 ├ 소모(消耗) : 써서 없앰
 │   - 연료 소모가 많다 / 시간 소모가 많다
 │
 ├ 소모적인 논쟁
 │→ 부질없는 말다툼
 │→ 쓸데없는 말싸움
 │→ 힘만 빼는 말다툼
 │→ 보람없는 말싸움
 └ …

써서 없앰을 뜻한다는 ‘消耗’로군요. 그렇다면, 굳이 한자말로 뒤집어씌우지 말고, 말뜻 그대로 쓸 때가 더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연료 소모가 많다”가 아니라 “연료를 많이 쓴다”나 “연료가 많이 든다”로 쓰고, “시간 소모가 많다”가 아니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나 “시간이 많이 걸린다”로 쓰면 한결 낫다고 느낍니다.

 ┌ 소모적 전투 → 힘만 빼는 싸움 / 부질없는 싸움
 └ 소모적인 대치 정국 → 서로 힘만 빼는 정치판 / 서로 쓸데없이 힘빼는 정치판

‘消耗’에 ‘-적’을 붙인 ‘소모적’ 또한, ‘써서 없애기만 하고 효과나 보람이 없다’는 뜻이 되겠지요. 이때에는 ‘부질없는’이나 ‘쓸모없는’이나 ‘쓸데없는’이나 ‘헛된’ 같은 말을 넣으면 뜻이나 느낌이 한결 살아나지 싶습니다. ‘-적’을 붙인 말뿐 아니라 ‘-적’을 안 붙인 낱말도 국어사전에서 깨끗이 털어내 주면 좋겠습니다.

ㄴ. 소모적인 논쟁 2

..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결과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면서 소모적인 논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렸다 ..  <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리처드 파인만/정무광,정재승 옮김, 승산, 2008) 77쪽

“우리의 결과(結果)와 반대(反對)되는”은 “우리 생각과 어긋나는”이나 “우리가 얻은 열매와는 아주 다른”으로 다듬고, ‘주장(主張)’은 ‘말’이나 ‘이야기’로 다듬습니다. ‘논쟁(論爭)’은 ‘말다툼’으로 고쳐 줍니다.

 ┌ 소모적인 논쟁을
 │
 │→ 힘 빠지는 말다툼을
 │→ 허튼 말다툼을
 │→ 쓰레기 같은 말다툼을
 │→ 우스꽝스런 말다툼을
 └ …

세상에 힘 빠지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깨가 축 처지게 하는 일, 두 주먹 불끈 쥐고 싶으나, 주먹이 스르르 풀리게 하는 일이 퍽 많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이곳 인천은, 온 동네를 들쑤시면서 재개발을 한다고 법석을 피우는 터라, 마음 놓고 깃들일 집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돈 없는 사람한테 아파트는 꿈 같은 소리이기도 합니다만, 아파트라는 곳이 사람이 즐거이 살 만한 곳이 아니기에, 돈이 있다고 해도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또, 아파트에 들어간다 한들 두고두고 살 수 있는 집이 아니고 스무 해쯤 지나면 다시 허물고 새로 짓는다고 시끄러우니, 느긋하게 집을 가꾸고 보듬으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집집마다 오래도록 한 곳에 뿌리를 내리면서 살 수 있어야 문화를 가꿀 수 있는데, 한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없게 하니, 집을 빌려서 사는 사람은 빌리는 사람대로 문화가 사라지고, 집임자는 집임자대로 집을 고쳐 줄 생각을 않습니다. 어차피 헐릴 집에 왜 돈을 들이느냐고 콧방귀입니다.

 ┌ 다람쥐 쳇바퀴 같은 말만 일삼다
 ├ 뻔한 말만 되풀이하다
 ├ 새롭게 거듭나지 못한다
 └ …

사람들 스스로 문화를 가꿀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예 문화를 못 가꾸도록 하는 듯 보여지는 지방자치제 정책입니다. 이런 판이니, 사람들이 서로 돕거나 아끼거나 보듬으려는 마음이 자꾸 줄어듭니다. 이웃이 아니라 웬수고, 사람이 아니라 돈으로만 봅니다. 서로가 서로를 따뜻하게 어우르지 못하니, 말이고 매무새고 거칠어집니다. 제 울타리 안쪽만 지키면 되고, 자기 물건만 간수하면 그만입니다. 삶다운 삶이 자취를 감추고, 삶터다운 삶터가 밀려납니다.

말은 삶에서 비롯합니다. 말에는 삶자락이 뱁니다. 말에 우리 모습이 비춰집니다. 메마르고 팍팍하며 거칠고 짜증이 넘치는 세상이 되어 가는 가운데, 우리 말과 글에도 메마름과 팍팍함과 거침과 짜증이 담깁니다. 사랑이 사라지는 세상이니, 말 한 마디에 사랑이 깃들이지 않습니다. 믿음이 뿌리뽑히는 마을이니, 글 한 줄을 믿고 읽을 수 없습니다. 온통 어수선하기만 한 세상이 아닙니다. 온통 뒤죽박죽이기만 한 세상도 아닙니다. 아주 무섭고 끔찍하며 지저분해지는 세상입니다. 우리 세상 모습이 우리가 쓰는 말과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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