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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초대형 베스트셀러, 한국에서도 인기 얻을까?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1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등록|2008.09.03 09:23 수정|2008.09.03 15:07

▲ <밀레니엄 1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상권 ⓒ 정민호


스웨덴에서 인구의 1/3이 읽었다고 한다. 덴마크에서는 15%가 읽었고, 노르웨이에서는 22%가 읽었다고 한다.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될 때쯤인 2008년 7월 20일에는 아마존 프랑스 종합순위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는 기자 출신 스티그 라르손이 쓴 <밀레니엄>의 성적표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이 책은 흥행보증수표라는 <해리포터>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었다고 하는데 마침내 국내에 소개됐다. 3부작의 첫번째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아르테 펴냄)로 유럽의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노크를 한 것이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경제 전문지 '밀레니엄'의 편집장 미카엘 블롬크비스트가 위기에 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재판에서 졌다. 금융계의 거물을 건드렸다가 명예훼손죄를 선고받는다.

기자에게 신용이란 생명이다. 누가봐도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의 인생은 끝났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밀레니엄'의 경영 및 편집에서 한발짝 뒤로 물러난다. 자신이 죽더라도 '밀레니엄'은 살려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손녀 죽인 범인 찾아주면 약점을 알려주겠다"

그가 그렇게 행동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의뢰가 온다. 반예르 그룹의 전 회장인 헨리크 반예르가 30여 년도 지난 사건을 해결해달라고 청탁하는 것이다. 사건은 사라진 손녀를 죽인 범인을 찾아달라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와서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는 거절하려 한다.

그런데 '미끼'가 그를 놔주지 않는다. 거액의 보상이 있다는 것이야 둘째치고 그에게 치욕을 안긴 금융계의 거물의 약점을 알려주겠다는 대가가 있다. 그것으로 거래가 성립되고 <밀레니엄>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웅장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밀레니엄>이 유럽에서 흥행을 한 이유는 뭘까? 그리고 국내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면 그건 뭘까? 첫 번째는 반예르 가문을 공부하면서 살인범을 찾는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의 '추리'다. 말이 추리지, 사실은 추리라고 할 것도 없다. 남은 것은 자료와 늙은 사람들 뿐인데 무슨 단서가 있다고 추리를 해보겠는가.

그럼에도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는 한다. 자료를 연구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단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한다. 어차피 범인을 잡지 못해도 헨리크 반예르가 약속한 대가를 주기로 했기에 '하는 척'이라도 한다.

그런 초연함 때문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이 놓치고 있던 것을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는 찾아낸다. 그 단서는 잔인하게 살해된 '여성'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들은 '성경'의 어느 문구를 연상시키는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경찰이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었고 그에 따라 미궁으로 남았는데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는 손녀딸이 그녀들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성경'의 어느 문구를 연상시키는 방법으로 살해당한 여자들

누군가 여자들을 그토록 증오해 범죄를 저질렀는데, 손녀딸은 왜 관심을 가진 것일까? 조금씩 진실이 밝혀지는데 스티그 라르손은 이 과정을 흡인력있게 묘사했다. 소설의 호흡을 완벽하게 조절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간장을 태우다가 숨도 쉬지 못하게 하다가 다시 애간장을 태우게 하는 식이다. 흥미로운 사건에 작가의 재주까지 더해졌으니 이야기는 그만의 뛰어난 가독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밀레니엄>은 재밌다고 할 수 있겠지만, 또 하나의 이야기가 더해져 재미는 배가 된다. 그것은 치욕을 안긴 기업에 복수하려는 '밀레니엄'의 음모다. 악당에게 복수하는 '정의의 사도'를 보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이 아무리 진부하다 말할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원하고 있고 <밀레니엄>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하기야 작가가 기자 출신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밀레니엄>의 압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만들던 두 가지 이야기가 합쳐지는 순간이다. 여러 개의 퍼즐이 합쳐져 커다란 그림을 완성하는데 그것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 그 웅장함에 웬만한 사람은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유럽 소설이라는 것, 그로 인해 많은 것이 생소한 탓에 <밀레니엄>이 우리나라에서도 그만한 인기를 얻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사실상 거의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다.

장르소설의 황홀함을 느끼고 싶다면, <해리포터>를 떠올릴 만큼 재밌는 소설을 보고 싶다면, <밀레니엄>을 기억하면 된다. 이 소설이 품은 매력을 보건데, 그 정도는 충분히 보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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