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요란한 호주 어머니날, 썰렁한 아버지날

[해외리포트] 가정에서 소외받고 TV로 럭비나 즐기는 호주 아버지들

등록|2008.09.05 09:39 수정|2008.09.08 11:49

▲ 아버지날에 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호주 아빠. ⓒ 아버지협회



9월 1일, 호주는 봄의 길목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서둘러 봄나들이에 나서는 사람들은 뜻밖에도 중년남자들이다. 첫번째 일요일이 아버지날이고, 9월에 호주의 대표적인 남성 스포츠인 럭비 결승리그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럭비 결승리그가 벌어지는 동안 호주는 럭비 열기에 빠져든다. 한국 프로야구의 한국시리즈와 비슷하다. 그런데 아버지날과 럭비 열기는 궁합이 잘 맞는다. 요란스럽게 치러지는 5월의 어머니날과는 달리, 별다른 콘텐츠가 없는 아버지날을 럭비경기 관람으로 그럭저럭 때우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내 앞집엔 녹색당원 게리 웬트워스가 산다. 그리고 옆집엔 노동당원 사이몬 타운젠트가 산다. 나를 포함하여 세 사람은 '좌파동맹' 비슷한 연대의식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호주 남성들의 위상을 함께 걱정하는 날이 더 많다.

그러나 9월 3일, 맥쿼리대학교에서 열린 '가족공동체와 아버지'라는 이름의 학술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한 마이클 그로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아버지들한테 무슨 할 말이 있는가? 1년 내내 럭비와 크리켓 등에 열광하면서 아버지의 역할을 내팽개친 당연한 결과"라고 호주 아버지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풍경 1] 성대한 어머니날... "364일은 시녀처럼 부려먹지 않나"

2004년 5월, 옆집 사이몬 집 풍경이다.

어머니날 아침, 사이몬과 두 아들딸은 까치발로 걸어 다닌다. 엄마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들은 일단 부엌으로 모인다. 엄마가 평소에 가장 즐겨먹는 메뉴를 정해서 아침상을 차리기 위해서다. 음식 맛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평소에 아빠도 요리 솜씨를 갈고 닦는데다가, 학교에서 사내아이들에게도 요리는 기본이고 바느질까지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리가 끝났다고 아침상을 차리는 일이 마무리됐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뒤뜰에서 꺾어온 수선화나 튤립 한 송이로 쟁반을 예쁘게 장식해서 엄마를 최대한 감동시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평소에 즐겨읽는 신문 섹션을 펼쳐들면 아침식사 준비는 일단 완료된다. 축하 카드와 선물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침대에서 상체만 세운 채 엄마가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자녀들은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한다. 아빠는 또한 신문기사를 읽어 주며 엄마의 식사 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 이름 하여 '침대에서 아침을'이다.

그렇게 아침식사를 마친 엄마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선물 꾸러미를 뜯어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은 다음 가족들과 행복한 포옹을 한다. 여왕 부럽지 않은 순간이다.

그러나 그 날의 여왕이었던 엄마는 항변했다. "1년에 딱 하루다. 나머지 364일은 여왕은커녕 시녀처럼 부려먹는다. 어머니날을 1주일에 한 번씩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 아버지날, '침대에서 아침식사'를 즐기는 모습. ⓒ 아버지협회


[풍경 2] 시들한 아버지날... "오늘이 아버지날이었어?"

2007년 9월, 시드니 근교 윈저에 위치한 에드먼드 오웬(42, 시인)의 아버지 집 뒤뜰에서 열린 아버지날 바비큐 파티 풍경은 제법 시끌벅적했다. 아버지가 친구들 부부 8쌍을 초청하고 2인조 밴드도 불렀기 때문이다.

시드니에 사는 에드먼드 형제는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아버지의 집을 찾았다. 그들의 집에서는 아버지날과 관련하여 아무런 계획이 없었고, 오랫동안 아버지를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잔뜩 가져갔다. 그들은 아버지 친구들의 바비큐 파티를 도와준 다음, 아버지를 근처 클럽으로 모시고 가서 선물을 전해드렸다.

그날 아침, 에드먼드의 형 제이슨 오웬(44)은 붉은 장미 한 송이와 럭비 결승리그 티켓을 아버지날 선물로 받았다. 그러나 에드먼드의 가족들은 그날이 아버지날인 줄도 몰랐다. 일요일이라서 늦잠을 자는 아내와 아들이 깰까봐 조심스럽게 형의 집으로 갔다가 엉겁결에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받았을 뿐이다.

한국이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삼고 미국 등의 나라들이 6월에 아버지날을 지내지만, 유독 호주와 뉴질랜드만 9월 첫째 일요일로 정했다. 그러나 호주의 아버지날은 그냥 정해져 있을 뿐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어머니날과 달리 언론에서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일부 쇼핑센터에서 특별 코너를 만들고 럭비경기장에서 스페셜 이벤트를 하는 게 전부다. 그나마 사람들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갈수록 시들해지는 형편이다.

▲ 선술집에서 아버지, 형과 함께 아버지날을 자축하는 에드먼드 오웬 시인(가운데). ⓒ 윤여문


[풍경 3] 초등학생 로지가 쓴 시 '아버지날에'

감동적인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멜버른에 사는 로지(초등학교 5학년)가 아빠에게 헌정한 시 '아버지날에'다. 한국의 삼행시처럼 두운법(앞의 운에 맞춰서 쓰는 방식)을 활용해서 쓴 시다. 서양문학에서는 이런 시를 아크로스틱 포엠(Acrostic Poem, 이합체시)이라고 한다. 다음 시의 앞 글자를 모으면 'HAPPY FATHERS DAY'가 된다.


로지는 오빠 알렉스와 함께 토스트와 토마토주스를 만들어서 아버지가 침대에서 아침식사를 드시게 했다. 특히 알렉스는 파트타임으로 번 돈으로 아이포드를 사서 아버지께 선물했다. 그뿐이 아니다. 동생이 쓴 시를 녹음하여 아버지가 침대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들으시도록 하여 아버지를 감동시켰다.

▲ 아버지날에 한 편의 시와 침대에서 먹는 아침식사를 선물한 알렉스와 로지 오누이. ⓒ

Have a happy Father's day
And enjoy your gifts,
Poems and
Polish to make
Your shoes shine.

Flop down onto the bed
And sleep
Till you're no longer tired.
Have a great day and
Enjoy yourself 'cause Father's Day comes
Round only once a year
So just relax and have fun!

Dad, Thanks for everything, I really
Appreciate it (especially you BBQ fry ups!)
Yum!!!

(오늘 하루, 행복한 아버지날이 되시기를
그리고 작은 선물들과 시 한 편
반짝거리게 닦아놓은 신발도
저희가 드리오니 기쁘게 받으세요.

침대에 벌렁 누우신 채로
피로가 다 가실 때까지 주무세요.
아버지의 날이 일 년에 딱 한 번뿐이니
오늘 하루, 느긋하게 맘껏 즐기세요.

아빠의 지극한 사랑 감사해요. 특별히
감사하고 싶은 건, 아빠가 만드는 바비큐
정말 맛있을 거예요!!!)

[풍경 4] 호주의 9월을 달구는 '럭비 열기'

▲ '아빠는 스포츠 광'이라는 내용의 아버지날 케이크. ⓒ 아버지협회


호주는 9월 한 달 내내 럭비 열기에 빠져든다.

특히 중년남자들은 "자다가도 럭비 얘기가 나오면 벌떡 일어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럭비에 열광한다. 부인들이 눈총을 보내면서 럭비 시즌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릴 정도다.

더욱이 럭비경기 종류가 세 가지나 된다. 럭비리그·오지룰럭비·럭비유니언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 이웃 남자들은 요즘 영 맥이 빠진 모습이다. 그들이 응원하는 럭비 팀들이 몽땅 결승리그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멜버른 대학교 사회학자 제프 브레이니는 "호주에 맥주와 럭비가 없었다면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가혹한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호주 개척시대의 죄수 역사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가정에서 홀대받는 아버지들에게 해당되는 말이 됐다. 그나마 세상만사를 잠시 잊게 만들어주는 맥주와 럭비가 없었다면, 가족에 대한 아버지들의 불만이 폭발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 측면에서 럭비 결승리그 기간 중에 아버지날이 있는 건 천만다행인 것 같다. 아내나 자녀들의 방해 없이 하루를 느긋하게 지내면서 TV를 시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년 남자들은 친구들끼리 뒤뜰에 모여서 바비큐 파티를 하는 걸 무척 즐기는데, 평소엔 꿈도 못 꾸다가 아버지날에만 그걸 가족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감행할 수 있다.

"아버지 헌신이 값없이 받아들여지는 풍조 바뀌어야"

그렇다면 호주 중년 남자들의 위기는 언제 생긴 현상일까?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호주의 저명한 가족 전문가 마이클 그로브를 맥쿼리대학교에서 인터뷰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 가정문제 전문가 마이클 그로스. ⓒ 윤여문

- 호주 가정에서 우대 순위를 소재로 만든 우스개를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자녀들>애완동물>아버지' 순서라는 중년남자들의 자포자기식 풍자 말이다.

"사실과 다르다. 호주는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사회 관습이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특히 식민지 개척시대에는 아버지 의존도가 아주 높았다. 그러다가 베이비붐 세대가 가장이 되면서 상황이 약간 바뀌었을 뿐이다. 지금도 TV 광고를 보면 아빠는 신문을 읽고 엄마는 요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 그러나 호주는 1960~70년대에 여권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돼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나가게 만들었을 정도인데.
"그건 맞다. 특히 영국에 큰 영향을 끼친 여권운동가 저메인 그리어가 대표적인 학자이고, 그 당시 여권운동의 주제가 같은 역할을 한 'I am woman'을 부른 가수 헬렌 레디도 호주 출신이다. 언뜻 이해가 안 되지만, 실제로 호주가 유럽과 미국으로 여권운동을 수출했다."

- 여성 참정권도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유럽과 미국보다 먼저 쟁취하지 않았나?
"1894년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여성 참정권을 획득한 나라도 호주였다. 첫 번째 국가였던 뉴질랜드와 똑같은 해다. 영국이 1918년, 미국이 1920년이니 대단하지 않은가. 참고로 쿠웨이트는 1999년이다."


- 그렇다면 호주 남성들이 여성들의 기세에 치인 것 아닌가?

"그런 측면이 없지 않지만, 가족 전문가로서 분석해보니 스스로 망가트렸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가부장적 의지가 박약했다는 뜻이다. 한편 호주 남성들이 1·2차 세계대전은 물론이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끊임없이 해외 전쟁에 참여한 것도 원인 중의 하나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 중심으로 가정이 재편됐다는 점에서다."

- 최근 호주 자녀들 70% 정도가 아버지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는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나도 그 조사에 참여했다. 자녀들이 사회화 과정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받는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아버지가 자녀들의 멘토가 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 그런 측면에서 '아버지날'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족 질서의 붕괴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나타난 사회 현상이다. 더욱이 물질 중심의 세상으로 바뀌면서 아버지의 역할이 급격하게 축소됐다. 21세기에 가부장적 가족질서의 부활을 꿈꾸는 건 시대착오적 발상이지만, 아버지의 헌신이 값없이 받아들여지는 풍조는 바뀌어야 마땅하다. 그러기 위해서 아버지날을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