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한 정자에서 판소리 '산나물가(歌)' 즐기고 싶어
[산채원 촌장 일기 14] 일에 치인 내가 가끔은 불쌍해 보일 때도 있다
▲ 구절초 핀 집앞 정자구절초 핀 집앞 정자 부근엔 노란꽃창포, 벌개미취, 봉숭아, 각시취, 구절초 따위 꽃이 철따라 피었다. 판소리 여섯 째 마당을 쓸 예정인데 일곱 마당은 누가 쓰려나 ⓒ 산채원 촌장
오늘도 산에서 일을 했다. 새벽 3시를 넘겨 일어나 하루를 계획한다. 6시 반 무렵 인부를 태우러 가는데 해발 500미터 현장에 도착하는 시각이 7시다. 작업 지시를 하고는 또다시 움직인다. 광주 직장에 다니는 아내를 태워다주기 위해서다.
새참거리를 챙겨 다시 산으로 돌아오면 8시다. 그 때부터 나는 온종일 산에서 해가 질 때까지 산다. 나물을 심고 풀을 베고 칡넝쿨을 떼고 나무를 솎아낸다. 기계톱, 예초기부터 낫질에 괭이나 호미, 삽이 내 연장이다. 새참을 챙겨주는 일도 내 차지다.
▲ 보고회화순군 읍면특성화사업보고회가 백아산 자락에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우리 면은 산나물이었다. 내년엔 100여 가지 산나물을 차려놓고 작은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 산채원 촌장
1년 가운데 보름 남짓 빼고는 인부들과 씨름하는 것도 내 몫이다. 하루 일을 계획하고 한 달, 두 달을 지나 1년 그리고 2, 3년 후를 내다보며 지역주민과 면사무소, 군청 공무원들과 조율하기도 한다.
3년 전 처음 고향으로 내려올 때까지는 그냥 평범한 농부이고 싶었다. 산나물, 산채라는 '블루오션' 지대를 조그맣게 개척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웬걸 누구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한량이고 싶었던 내게 무수한 일을 주는 거다. 무지막지하게 많은 일감을 던지고는 다 해치우라 한다.
기껏 1만평 지으려던 소박한 꿈은 이내 산산조각이 나고 현재 3년 밖에 되지 않은 내게 20만평이라는 거대한 면적에 식솔들이 주인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제발 좀 와달라고 말이다. 여기에 앞으로 2년 동안 15만평씩을 더 늘려야 하니 일이 태산이다. 머리가 온통 일 덩어리로 그득하다. 업보던가. 일복 타고난 사람 말이다.
▲ 곤드레 씨앗곤드레나물(고려엉겅퀴) 씨앗을 털고 있다. 산채원에는 200여 가지 산나물이 20만평에서 자라고 있다. 요즘엔 씨앗 베어 말리느라 해가 짧다. 그래도 비가 좀 오면 좋으련만... ⓒ 산채원 촌장
비오면 영화 한 편 볼 수 있겠거니, 따뜻한 방에 축 늘어져 탁배기에 농주 한 사발 따라 부침개나 부쳐 먹는 여유를 가져보지 못하니 이건 뭔가 핀트가 한참이나 빗나간 게 아닌가. 기껏해야 맘 놓고 연중 이틀이나 쉴까 말까하는 삶은 내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그런데 3년 전 고향에 내려와서 왜 이리 살고 있는가. 무리하게 말이다. 느긋하게 5년, 10년을 준비하면 될 터인데 예기치 않게 일이 커졌으니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서서히 지쳐가는 자신이 가끔은 불쌍하기도 하다. 남들 말로 사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 이 무슨 까닭인가.
주위에서 쳐다보는 눈이 있어서가 아니다. 전생에 일 못 해서 이승으로 쫓겨난 사람은 분명 아니다. 내겐 목표가 있다. 개인 삶이 아니라 주위 나아가 지역사회, 멀게는 우리나라 전체에 관심이 있다. 산나물과 약초, 들꽃 200여 가지로 확 바꾸고 싶다. 선택한 일이 어엿한 농업의 한 분야로 당당히 자리 잡아 농업을 바로 세워 식탁 혁명을 이루고 싶다. 나아가 도시인의 건강한 삶을 돕고 싶다. 자연이 키운 음식 재료가 세계 1등이 되지 말란 법이 없잖은가.
▲ 반디나물반디나물(파드득나물)을 낫으로 베고 있다. 올 해 받은 씨앗을 뿌리면 1만평은 되겠지. 산나물을 낫으로 베면 수확량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 식탁엔 또다시 산나물 향기가 맴돌 것이다. ⓒ 산채원 촌장
이 거대한 꿈이 이뤄지려면 자나 깨나 산나물에 미쳐야 한다. 나물이 자라는 생태를 더 공부하고 맛을 직접 느끼고 다른 사람에게 즐겨 먹을 수 있도록 꾀를 내야 한다. 생나물만 먹을 게 아니라 음식도 전통방식에 맞춰 다양하게 연구하여야 한다.
산나물로 김치, 부각, 물김치, 차, 향수, 장아찌, 죽, 구절판, 밥에 떡까지 두루 재조명 하는 것도 숙제다. 소포장에 승부를 걸고 광고비 들지 않는 판매망 구축 또한 풀어야 할 문제다.
몇 년 만 더 산을 오르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는가. 사시사철 누구에게나 숲속 산나물 맛을 보여주려면 당분간 일에 파묻혀 사는 게 맞다. 아무리 좋은 품질이라도 양을 대지 못한다면 말짱 헛것이 됨은 자명하다.
만 3년을 재배단지 확대로 납품량을 확보한다면 그 뒤엔 내 농장이 산나물 거점이 되는 건 시간문제다. 사람들이 편히 즐기도록 갖추고 근사한 정자에서 판소리 여섯째마당 '산나물가(歌)'를 즐기는 여유가 결코 꿈은 아닐 터.
▲ 곰취 꽃곰취나물 꽃은 하마 져서 곧 씨앗을 거둬야 한다. 봄과 여름엔 산나물, 가을엔 들꽃이 된다. 나무 그늘 아래 자연이 키워줘서 지금도 뜯어서 쌈을 싸먹을 수 있도록 억세지 않고 부드럽다. 사촌 격인 곤달비는 약간 덜 써서 도시인에게 인기가 있다. ⓒ 산채원 촌장
허약한 내 다리 근육이 튼튼해지는 건 덤이다. 백아산 골짜기에서 진달래 화전 부쳐 두릅, 개두릅, 옻순에 산마늘, 곰취, 곤달비, 곤드레, 취나물, 더덕, 도라지 향에 푹 취해볼 날이 머지않았다. 사는 힘이 저절로 나는 축제판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직 농협 자금 한 푼 빌리지 않았고 땅 한 평, 집에 투자한 것 없이 에오라지 산나물 늘리는 일에만 매진하였으니 이만하면 반쯤은 성공한 농사 아닌가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전라남도청 발행 <전남새뜸> 9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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