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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마총은 그렇다하고 교자총은 또 뭘까?"

파주3현의 유적을 찾아서 1. 여진족을 정벌한 고려 윤관장군묘

등록|2008.09.18 10:04 수정|2008.09.18 10:04

▲ 경기 파주 광탄 윤관장군 묘역과 입구의 홍살문 ⓒ 이승철


"여진족을 물리친 맹장이라 호랑이 같은 장군인 줄 알았는데 문관이었네?"
"그러게 말에요, 용장이 아니라 지장이고 덕장이었던 모양이네요."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날인 16일 찾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윤관장군 묘역 앞에서 아우가 하는 말이었다.

파주지역 역사유적탐방은 연휴에 잇대어 하루를 더 쉬는 막내아들이 운전하는 차량 안내로 우리부부, 그리고 동생부부와 함께한 여행이었다. 파주지역 역사유적 탐방은 파주3현으로 불리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 황희와 교육자이자 정치가요 주자학의 대가였던 율곡 이이, 그리고 고려시대 여진을 정벌하여 9성을 쌓았던 윤관의 사적 탐방 중 첫 번째로 찾은 곳이 윤관의 묘역이었다.

왕릉 같은 규모에 말 무덤 교자무덤까지 있는 장군의 묘역

윤관은 옛날 국사공부 할 때 배웠던 인물이었지만 그 기억이 어디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었겠는가. 그저 막연히 고려 시절 북방지역을 넘나들며 노략질하던 여진족을 정벌했으니 용맹스러운 무관이었겠지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 묘역 입구 아래쪽 오른편에 있는 말무덤과 가마무덤 ⓒ 이승철


"아니 그런데 이건 또 뭐야? 전마총이면 윤관 장군이 타고 전쟁했던 말 무덤일 테니 그렇다 치고, 교자총은 또 뭐야, 가마까지 무덤을 만들어주었다는 건가?"
"사람이나 짐승이 아닌 교자를 무덤으로 만들어 놓은 곳은 이곳에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정말 그러네요. 요즘으로 치면 평소 타고 다니던 승용차를 묻어 무덤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잖아요?"

묘역 입구 오른편에 있는 전마총과 교자총은 아무래도 낯선 모습이었다. 전마총이야 장군을 태우고 전장을 누볐던 애마였을 테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교자라면 타고 다니던 가마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가마까지 무덤을 만들어주다니, 요즘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묘역은 상당히 넓고 잘 가꾸어진 모습이었다. 묘역 입구 홍살문 오른편에는 커다란 거북 등 위에 세워져 있는 '고려문하시중 문숙공 윤관장군 신도비'가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고려시절 문하시중이면 군왕 아래 최고의 직위였으니 그럴 만하다고 해야 할까?

▲ 위풍당당한 모습의 윤관장군 신도비 ⓒ 이승철


당시 함경도 일대와 요동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던 여진족은 고려에겐 아주 귀찮고 위협적인 존재였다. 윤관은 북방 국경지역에 자주 출몰하여 우리 백성들을 약탈하고 괴롭혔던 여진족을 정벌하여 압록강 건너 공험진에 정계비를 세우고 국토를 넓히는 지대한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여진족을 정벌한 윤관장군, 그러나

윤관의 자는 동현이요, 시호는 문숙공이다.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습유와 보궐이라는 벼슬을 거쳐 숙종이 즉위 하자 좌사낭중으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리기도 했다. 그는 추밀원지주, 어사대부, 이부상서 등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행영병마절도사가 되어 여진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했다.

그는 뒤에 별무반이라는 특수군을 창설하고 양성하여 1107년(예종 2년) 여진 정벌에 다시 나섰다. 10만 명이 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군대를 동원한 이 전쟁에서 그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함주와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숭녕, 통태, 진양의 9성을 쌓아 국경을 튼튼히 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했다.

▲ 윤관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여충사 ⓒ 이승철


이 공로로 그는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상서이부판사, 군국중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여진은 9성 지역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강화를 요청해 왔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9성을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여진에게 돌려주고 말았다. 윤관의 치적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정세가 이렇게 바뀌자 윤관은 여진정벌의 실패자로 모함을 받아 벼슬을 잃고 공신호마저 삭탈되었다. 그러나 예종의 비호로 1110년 수태보, 문하시중, 병부판사, 상주국, 감수국사가 되었다. 완전히 복권이 된 것이다. 죽은 후에는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더구나 윤관은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외척으로 세도가 당당했던 파평윤씨의 조상이었으니 그 후손들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존재였겠는가. 왕릉을 능가할 정도로 크고 넓은 묘역과 사당 등 부속시설들은 번성한 후손들과 그 자신의 그런 치적을 잘 드러내주고 있었다.

묘역 아래쪽 옆에 있는 사당 여충사는 정문과 옆문이 모두 굳게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사당 담장 축대엔 작고 빨간 열매가 촘촘히 열린 나무 한 그루가 가을을 알리고 서있다. 윤관장군의 묘는 비스듬한 언덕을 올라 저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 규모나 석물 등 왕릉을 능가하는 윤관장군묘 ⓒ 이승철


홍살문 안으로 들어서 잘 가꾸어진 잔디를 밟고 무덤으로 올라갔다. 장군의 무덤은 봉분 아래에 장대석 모양의 호석을 두르고 봉분 뒤로 흰색 돌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준다. 봉분 정면에는 상석이 놓여 있고 왼쪽에 묘비가 서 있었다. 

한 계단 아래에 양쪽으로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는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었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각각 양편에 10개가 넘는 동자석과 문인석, 그리고 무인석과 석양, 석마 등 동물상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이 어느 왕릉으로 착각이 될 정도였다.

청송심씨문중과 400여년 다툼의 단초가 된 심지원 묘역

왕릉처럼 커다란 무덤 뒤로는 특이하게 흰색 돌로 쌓은 담장이 둘러 처져 있었는데 돌담장은 심지원일가의 묘역과 경계를 지우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또 담장 주변에는 수백 년씩 자랐음직한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묘역은 나지막한 산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어서 풍광이 매우 아름다웠다.

▲ 여충사 담장과 표지석 ⓒ 이승철


"윤관 장군은 역시 대단했던 분인가 봐요? 묘역도 왕릉 못지않은 걸 보면?"
"당사자야 물론 대단한 분이지. 북쪽 국경을 자주 넘어와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못살게 하여 왕과 조정에 근심거리였던 여진족을 정벌한 분이니까. 그러나 묘역을 이렇게 크고 대단하게 꾸밀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후손들이 그만큼 번성했기 때문일  거야."

실제로 조선시대 한때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묘역이 지금처럼 대단하게 꾸며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윤관의 치적이나 무덤을 증명할 수 있는 비석이나 묘석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무덤이 불확실하게 된 사연은 잘못된 후손 때문이었다. 중종임금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때 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는 문정왕후가 죽자 파직당하고 귀양 가서 죽음을 당했다.

▲ 여충사 정문인 진국문 ⓒ 이승철


그때 윤원형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그의 선조인 윤관장군 묘를 파헤치려고 했다. 그러자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손들이 유골이나마 온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봉분을 헐어 평장을 하여 위장한 것이다. 물론 비석이나 다른 석물들도 치워버렸다. 장군의 묘를 파헤치려고 왔던 사람들은 묘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 100여년이 지난 후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세도가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청송심씨 심지원(1593- 1662년)이 돌아가자 그 후손들은 명당으로 소문 난 윤관장군 묘 바로 위쪽에 묘를 쓰게 되었다. 심지원 일가와 후손들은 이곳이 윤관장군의 묘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 묘역으로 인해 두 가문 간에는 4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묘역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외척세도가 윤원형 때문에 후손들에 의하여 봉분이 사라지고 비석도 석물도 사라진 장군의 묘는 오랫동안 잊혀진 묘가 되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조선 영조 23년(1747)에 후손들이 장군의 묘지 찾기에 나서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에 공인되었다. 지금 윤관 장군묘역 주변에 세워져 있는 비석과 석등 등 석물들은 대부분 이후에 후손들이 만들어 세운 것이다.

▲ 묘역아래 공터에 서있는 커다란 두 그루의 느타나무 쉼터 ⓒ 이승철


"그럼 저 전마총이나 교자총은 실제 무덤이 아닐 가능성이 많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많지. 장군의 묘도 잃었다가 몇 백 년 후에야 찾아냈는데 말 무덤이나 가마 무덤이 어디 확실했겠어?"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묘역에는 묘와 교자총, 전마총 외에도 영당과 재실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 묘역은 1980년도에 묘역정비 사업을 하여 영당과 신도비, 그리고 재실을 개축하였다.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오다가 묘역 아래쪽에 있는 여충사를 다시  둘러보려 했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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