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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아이들을 보며 느끼는 '가을'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부모님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등록|2008.09.19 14:07 수정|2008.09.19 14:07

▲ 하영이와 호연이 ⓒ 이민선


"차렷, 열중 쉬엇, 앞으로 갓…. 하나 둘 해야지~ 이 녀석 군기가 빠져 가지고… 엎드려뻗쳐."
"네, 선장님. 하나 둘… 누나, 근데 엎드려뻗쳐는 하기 싫어."

두 녀석 노는 모습을 보니 웃기다 못해 어이가 없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추석을 보내고 올라오면서 하영이는 호연이 군기를 바짝 잡는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이 녀석 감히 친누나를 몰라봐! 군기 바짝 잡아야겠어"라고 하면서.

'선장님'이라는 호칭은 텔레비전 만화 <스펀지 밥>을 흉내 낸 것이다. 언제부턴가 호연이는 누나에게 선장님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물론 놀 때만이다. 하영이는 애원 반, 위협 반 하며 끝내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이 녀석 감히 친누나를 몰라봐!"

"안돼 꼬맹아, 넌 오늘 누나에게 혼 좀 나야 돼. 엎드려뻗쳐 안 하면 앞으로 안 놀아 줄  야……. 한 번만 해봐, 딱 한 번만!"
"알았어 누나! 아참, 네 선장님."
"다시 한 번 말해봐. 내가 좋아? 영숙이 언니가 좋아?"

이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영이 녀석이 샘을 내고 있는 것이다. 영숙이는 호연이 사촌 누나다. 추석날 온 가족에 모였을 때 생각없는(?) 어른 중 한 명이 곤란한 질문을 했다. "호연아, 영숙이 누나가 좋아 하영이 누나가 좋아"라고.

순진한 호연이는 아무 망설임 없이 "영숙이 누나"라고 대답했다. 모처럼 만난 어린 동생을 살 부드럽게 대해주는 '영숙이 누나'에게 마음이 더 끌렸나 보다. 영숙이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다 큰 조카딸이다. 이때부터 하영이 눈에서는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엎드려뻗쳐 자세로 호연이 녀석은 쉽사리 대답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이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이다. 과연 호연이가 어떤 대답을 할까! 자못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10초… 20초… 30초… 1분이 다 지나도록 호연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무 영악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순진한 것인지! 이쯤에서 하영이를 말릴까 하다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선택의 순간에 호연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누나, 아니 선장님. 이제 일어서도 돼."
"안돼. 대답하고 일어나."

이제 아빠가 개입해야 할 차례가 왔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엎드려뻗쳐를 시키는 것은 장난이 아니라 가혹행위다.

"그래 하영아, 이제 호연이 일어나라고 하자, 자~ 이제 일어서 호연아."

이 말을 듣자마자 호연이는 구세주를 만났다는 듯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내친김에 호연이 갈등도 끝내주기로 했다.

"호연아, 하영이 누나가 더 좋다고 대답해. 그러면 누나가 좋아할 거야."

이 말을 듣자마자 호연이는 "하영이 누나가 좋아"라고 냉큼 대답했다.

병원 가야 돼 vs 가기 싫어 안가

▲ 어머니와 아버지 ⓒ 이민선


추석 연휴 마지막 날, 팔순 부모님이 부부싸움에 버금가는 설전을 벌였다. 아버지는 병원에 가야 한다고 강변하시고, 어머니는 갈 필요가 없으니 가지 않겠노라고 맞섰다.

얘기는 이렇다. 몇 달 전 어머니는 밭일을 하다가 허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그대로 쓰러졌다. 어머니 허리는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의사는 연골이 닳아서 없어졌고 골다공증 때문에 허리뼈 일부가 주저앉았다고 말했다.

수술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유일한 치료 방법은 골다공증 치료제를 먹으면서 일하지 않고 편히 쉬는 것이다.

그러던 중, 어머니 허리 치료를 포기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귀가 솔깃할 만한 희소식이 들렸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이 서울에 있는 OOO병원에서 수술 받은 후 놀라울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다는 소식이었다.

그 병원에 이미 예약을 해 둔 상태였다. 연휴 다음날인 16일이 진료 예약일이었다. 병원에 가려면 1시간 내로 내 차를 타야 하는 터였다. 병원 예약하는 것도 내 일이고, 어머니 모시고 병원에 가는 것도 물론 내 일이다.

한 가지 일을 더 해야 했다. 부부싸움 일보직전까지 가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중재하는 일이었다.

"엄마, 병원 간다고 당장 수술하는 게 아니라 일단 검사만 받아 보자는 거야, 그리고 아버지 수술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일단 담당 의사를 만나서 의견을 들어볼께요."

그제서야 두 분은 언성을 낮추고 합의를 하기 시작했다. 합의 결과는 일단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보자는 것이다.

작년과 다름없고 재작년과도 별 차이가 없는 마흔 살의 가을

▲ 가을 ⓒ 이민선


결국 어머니는 내 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 유명하다는 OOO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났다. 의사 소견은 쓰러지고 난 후 찾아갔던 병원 의사 소견과 대동소이 했다. 연골이 닳아서 없어졌고, 골다공증 때문에 허리뼈 일부가 주저앉았다는 것.

예전에 치료 받았던 병원에서 촬영 기록을 복사해 가지고 다시 찾아가기로 약속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아버지는 하루라도 빨리 수술 날짜를 잡으라고 가끔 전화로 재촉하신다. 난 그때마다 수술 여부와 날짜는 의사가 잡는 것이라며 아버지를 다독인다.

호연이에게는 내친김에 곤란한 선택의 순간을 피해가는 법을 가르쳐 줬다. 만약 누군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으면 "둘 다 좋아요"라고 대답하라고 충고했다. 그래도 끈질기게 "누가 더 좋으냐?"고 묻는 어른이 있으면,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예요"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쳤다.

한낮에는 찜통더위가 계속되고 있지만 분명히 가을이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가을 냄새가 실려 온다. 마흔이 되고 난 이후 두 번째 맞는 가을이다.

마흔이 되기 전 늘 궁금했다, 내게 어떤 가을이 다가올지가…. 궁금증은 풀리고 나면 항상 싱겁다. 작년과 다름없고 재작년과도 별 차이가 없다.

이번 가을에도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커 가고 부모님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고 기특하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한다는 것이 이미 많이 성장했다는 증거다. 이제 호연이도 서서히 유아기를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부모님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 쓸쓸해진다. 이젠 병원을 옆집 드나들 듯해야 할 만큼 쇠약해 지셨다. 난 이런 아이들과 부모님을 보면서 세월을 느낀다.  이렇게 올 가을도 깊어간다.
덧붙이는 글 안양뉴스 유포터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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