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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땡볕'에 너도 익고 나도 익고

[북한강이야기311] 지금은 온몸을 익힐 때

등록|2008.09.21 11:21 수정|2008.09.21 11:21
가을 땡볕이 만만치 않습니다. 추분(23)이 며칠 앞인데 더위가 물쿨, 후터분하기 그지없습니다. 따가운 가을 햇살이 여름을 잊은 듯 따갑게 내려 쪼입니다. 오늘은 김장배추들이 ‘아저씨, 목말라요’ 물을 달라 보채 싸는 바람에 오전 내내 생쥐꼴이 되어 배추 밭고랑을 기어 다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얄밉도록 파랗습니다.

▲ 목이 타는 배추밭 ⓒ 윤희경


가을가뭄이 길다보니 너나없이 배추를 살려내려고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위기가 기회란 말을 자주 듣습니다. 농사도 이런 때일수록 부지런히 물을 퍼올리는 농부만이 주머니가 두둑해질 수 있는 찬스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새벽은 가을, 한낮엔 아직도 여름입니다. 여름 같은 날이 계속되다보니 입이 삐뚤어져야할 모기들이 심심하면 사타구니를 파고들어와 자존심을 건드리고, 꽃과 덩굴식물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 호박 풍년 ⓒ 윤희경


다른 해 같으면 호박이 마무리 할 단계이지만 아직도 호박꽃 세상입니다. 호박 덩굴은 기세 등등 싱싱하게 살아 울타리를 넘어 사정없이 위로위로 뻗어나갑니다. 급기야는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듯 밀치기 한판 힘이 당당합니다.

호박이 하도 많이 열리다 보니 지천입니다. 아침마다 호박을 한 소쿠리씩 따다 놓고 오는 사람마다 몇 개씩 나눠줍니다. 윗집 할머니, 고물장수와 우체부아저씨, 처음 보는 아줌마까지. 주다주다 주체를 못해 지금은 잘게 썰어 따가운 햇살에 익혀내고 있습니다.

▲ 화초호박 ⓒ 윤희경


여름 들꽃들이 질 줄을 모릅니다. 층 꽃은 가을을 기다리며 여러 층으로 꽃을 쌓아 올렸건만, 가을이 오지 않으니 오늘도 자꾸만 집을 짓습니다. 범의 꼬리도 벌써 꼬리를 내리고 가을을 맞이해야 하는데 가을이 늦다보니 천국계단을 수놓으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저러다간 정말 하늘 끝까지 올라가 온몸이 익을 것만 같습니다.

▲ 범의 꼬리 ⓒ 윤희경


따가운 햇살이 지나간 자리마다 열매가 익느라 뜨거운 쉼을 몰아쉬고 있습니다. 배추들은 목이 탄다며 아우성이고 들꽃들은 가을이 늦다 투정을 해보지만, 곡식과 과일들은 자신들을 채워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배추에겐 좀 미안하지만, 햇살 가득한 과일나라엔 너도나도 익히고 익어서 사랑의 열매가 대롱대롱합니다.

▲ 감 ⓒ 윤희경


연일 계속되는 늦은 땡볕 아래서 배추밭 물을 푸다 밭둑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신을 익혀낸 고개 숙인 수수 대궁들을 바라봅니다. 수수 알 위로 긴 여름을 넘어온 세월과 바람과 땀방울이 등짝을 내리칩니다. 머리를 들고 수수밭 속 수수와 수수밭 위의 수수를 보며 한참 자라 철이 들면 수수처럼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익혀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 깨닫습니다.

▲ 머리숙인 붉은 수수밭 ⓒ 윤희경


뜨거운 여름 햇볕이 침묵으로 키워낸 고개 숙인 이삭의 겸손, 땀 냄새 나는 기다림 속에 열매도 익고, 나도 익고 너도 익고, 가을도 점점 익어갑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농촌공사 '전원생활' 네오넷코리아 '북집'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 강물이 흐르는 북한강상류를 방문하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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