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은평뉴타운... "이러다 전부 경매 나올라"
[현장] 입주율 절반도 안돼... 중도금·잔금 지불 압박에 울상
이명박 정부 들어서 부동산 시장이 급속히 얼어붙으면서, 살던 집을 팔지 못하거나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해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에 입주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최악의 경우 급매물 속출→집값 폭락→대출담보 부실→은행 부실→금융위기의 악순환에 빠져들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지난 19일 발표한 '국민 주거안정을 위한 도심공급 활성화 및 보금자리 주택건설방안'에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 오는 2011년까지 15곳의 뉴타운(재정비촉진지구)을 추가 지정해 도심지역의 주택공급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지, 입주 4개월째를 맞은 은평뉴타운 1지구를 가봤다. [편집자말]
▲ 불꺼진 은평뉴타운입주 100일을 넘긴 9월 20일 밤 9시경 은평뉴타운 1지구의 한 분양아파트. 2개 동 가운데 주로 전용 84㎡형으로 이루어진 왼쪽 동과 달리 전용 134㎡형이 많은 오른쪽 동은 대부분 불이 꺼져있다. ⓒ 김시연
"1년 뒤에 다 경매로 나올지도 몰라요."
입주 시작 4개월을 바라보는 지난 20일 오후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은평뉴타운에서 만난 한 부동산 공인중개사의 말이다. 그는 "입주율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며 "인프라가 안 갖춰진 탓도 있지만, 돈 때문에 못 들어와 고생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첫 뉴타운인 은평뉴타운은 길음뉴타운과 함께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곳. 또한 1억~2억원의 프리미엄(웃돈)을 줘서라도 이 지역의 아파트를 사려고 강남 사람들까지 몰려들었던 곳인 터라, 이 공인중개사의 말은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날 오후 비에 젖은 은평뉴타운은 그의 말대로 입주자가 얼마 되지 않는 듯 다소 썰렁한 분위기였다. 4660세대(2008년 6월 입주가 시작된 1지구 기준) 대단지인데도 차량의 모습은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상가는 단지 중심부를 제외하곤 텅텅 비어있었다. 그나마 대부분 부동산 중개업소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 부동산 업주는 "아파트 입주율이 낮은 탓도 있지만, 상가를 사려는 손님들은 미국 서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문에 꺼리고 있고, 한국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도대체 이 곳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급전세·급월세... 상가는 죄다 '공인중개사무소'
▲ 20일 오후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은평뉴타운 단지 내 상가의 모습. 지난 6월 1일 입주가 시작됐지만, 낮은 입주율 탓에 텅텅비어 있는 상가가 많다. ⓒ 오마이뉴스 선대식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에서 나와 10여분을 걷자 은평뉴타운 L 아파트의 상가가 기자를 맞이했다. 멀리서 보기엔 빈 곳도 있었지만 많은 상가에 간판이 걸려있었고 아파트 외관도 고급스러워 은평뉴타운의 첫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1층 상가를 둘러보니, 입주 4개월 된 여느 아파트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문을 연 27곳의 가게 중 24곳이 부동산 공인중개사무소였다. 2곳은 떡집과 자전거를 파는 곳이었고, 나머지 한 곳은 은행이었다. 맞은 편 아파트의 상가는 대부분 비어있었고, 문을 연 곳은 그나마 은행과 공인중개사무소 뿐이었다.
공인중개사무소 앞에는 전세 시세표가 쓰인 화이트보드가 즐비했다. 이곳은 일반 분양의 경우, 7년간 전매 제한이 있는 터라 매매 시세표는 내보이지 않았다. 공인중개사무소엔 '급전세' '급월세' 등의 문구가 눈에 띄었다.
최아무개 H 공인중개사무소 사장은 "여기 부동산 시장이 완전히 얼어붙었다"며 "6월에 왔는데, 매매는 한 건도 못했고, 전세도 10건도 못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전세를 내놓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여기 들어오려는 사람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3억원 정도로 예상됐던 전용면적 101㎡(분양 41평)형 아파트 전세가격은 2억 아래로까지 떨어졌다"며 "이 때문에 전세금으로 중도금·잔금을 치르려는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고 말했다.
입주 못한 사람들은 분양금 연체료·은행이자로 고통
은평뉴타운 단지 내부에 들어서니, 아파트 입주율은 절반도 안 되는 듯 보였다. 한 아파트 우편함을 살펴보니 40곳 중 비어 있는 곳이 30개가 넘었다. 다른 아파트도 마찬가지였고, 그렇지 않은 곳이 적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은 "보통 입주 3~4개월이면 거의 다 입주하는데, 여긴 50~60% 정도"라고 귀띔했다.
단지 내에서 한 택시 운전기사를 만날 수 있었다. 김현식(가명·49)씨는 "택시 운전하면서 이 곳 주민들이 돈 때문에 걱정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며 "후분양이라 중도금·잔금을 3개월 안에 치러야 하니, 돈을 마련하기가 어렵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살던 집을 팔거나 전세를 빼서 중도금과 잔금을 치러야 이 곳으로 오는데, 부동산 경기가 안 좋아 집을 못 팔고 전세도 못 빼서 SH공사에 잔금의 14%에 이르는 연체료를 물어야 하는 사람이 많다"며 "아파트를 팔려 해도 전매제한이 있고 전세도 안 들어오니 큰일 났다고 얘기한다"고 전했다.
그는 "집값이 떨어지면 은평뉴타운 사람들 속이 끓겠지만, 집값이 비정상인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1996년에 1억6500만원에 산 영등포의 106㎡(32평) 아파트를 2005년 2억6500만원에 팔았다. 하지만 그 아파트는 2년 뒤 2배가 됐다. 그는 "서민들은 집을 어떻게 사라는 말이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 중도금·잔금을 치르지 못해 은평뉴타운에 아직까지 입주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은평뉴타운의 은행들은 중도금·잔금을 대출해주겠다며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 오마이뉴스 선대식
은평뉴타운에 전용면적 84㎡(분양 34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는 한 50대 여성은 "분양가 3억5000만원에 프리미엄을 얹어서 원주민인 친척한테 샀고, 중도금·잔금을 치르기 위해 전세를 놓았다"며 "그런데 전세가 1억8천만원밖에 안 될 줄은 몰랐다, 돈이 부족해 은행에서 연 7% 이자로 돈을 빌렸는데, 부담이 크다"고 밝혔다.
아들 부부와 함께 전용면적 134㎡(분양 53평) 크기의 아파트에 사는 김인자(71·가명) 할머니는 "분양가 7억원 중에서 5억원을 대출받았는데, 아들 월급으로 이자 내고나면 남는 게 없다"며 "주변에 이자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보면 남 일 같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집값 떨어지고 규제 풀리면 은행도 걱정
주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아는 듯 은평뉴타운에 있는 상가에 크게 자리잡은 은행들은 '중도금대출 상담·접수중' '잔금대출' 등의 광고판을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에 내세웠다.
한 은행의 이아무개 차장은 "보통 중도금은 4월에, 잔금은 7월에 치렀다. 대출을 해준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체가 발생할 시기는 아니다. 아직까진 큰 문제 없다"며 "은행들은 소득수준에 따라 최대 40%까지 대출해준다. '묻지마 대출'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비우량 담보에도 대출을 많이 해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면서도 "거품이 꺼져 집값이 큰 폭으로 떨어지면 은행에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며 말을 이었다.
"경기가 안 좋은 상태에서 규제가 풀려 LTV(주택담보대출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가 완화되면 대출 수요가 늘지만, 돈을 못 갚는 경우가 많아지고 입주를 못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건설사들이 연쇄적으로 부도가 나는 등 악순환이 올 수 있다."
▲ 9월 20일 밤 9시경 은평뉴타운 1지구의 한 분양 아파트. 134㎡형 이상 17세대 가운데 불이 켜진 곳은 단 두 곳뿐이었다. ⓒ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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