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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못 가본 아빠 위해 눈물 흘린 딸

우리집은 효자 유전자 이어받은 집

등록|2008.09.24 14:00 수정|2008.09.24 14:45
어젯밤 근무를 한 남편이 서른여섯 시간 만에 돌아와 피곤한 모습으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몹시 지쳐 보이더군요. 말할 기운도 없는지 아무 말 없이 그냥 묵묵히 밥을 먹었습니다. 남편과 달리 우리들, 딸들과 난 좀 흥분해 있었습니다. 내일 큰딸이 수학여행을 가기 때문에 마트에 가서 과자, 음료수와 김밥 재료를 사왔고, 옷가지를 챙기는 등 여행 준비를 하느라 좀 부산했습니다.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 남편을 향해 작은 애가 빅뉴스를 전할 모양으로 아빠를 불렀습니다.

"아빠, 내일 언니 수학여행가요."

남편은 그제야 무거운 고개를 들고 큰애를 바라보더군요.

"그래, 어디로 가?"
"남도요."
"남도가 어디지?"
"해남 대흥사 그쪽이요."
"그래, 좋겠네. 아빠가 수학여행가니까 용돈 좀 줘야겠네."

집이 가난해서 수학여행을 한 번도 못 간 남편

그런데 수학여행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다가 우리 집은 갑자기 눈물바다로 변했습니다. 이유는, 남편이 무슨 말 끝에 자기는 한 번도 수학여행을 못 가봤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자기 집이 가난해서 부모님에게 차마 학교에서 수학여행 간다는 말을 못 꺼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애들 수학여행갈 때 그냥 학교 나가서 공부했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한 번도 수학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된 큰딸이 아빠가 불쌍하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난 별로 슬프지 않았는데도 딸이 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내 병 중의 하나가 누가 울면 슬프지 않는데도 맛있는 음식을 보면 침을 흘리듯 저절로 눈에서 눈물이 샘솟고 코가 빨개진다는 것입니다.

나를 본 작은딸이 놀라워했습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O형 작은딸은 예측불가능하고 감정적인 B형 엄마와 언니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는데 지금과 같은 경우도 그랬습니다. 아빠가 수학여행을 못 간 게 분명 울 일은 아닌데 갑자기 우는 게 이해가 안 간 모양이더군요.

그런데 정작 이 소동의 근원지인 남편은 어떤 동요도 없이 조기 살을 발라 밥 위에 올려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내가 남편이라면 한 번도 수학여행을 못 간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며 가슴에서 울컥한 뭔가가 올라올 법도 한데 남편은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초등학교만 해도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세 번이나 수학여행을 가지만 우리 때는 초등학교 한 번, 중학교 한 번, 고등학교 한 번 이렇게 딱 세 번 밖에 안 가는 수학여행인데 남편이 초등학교 때 한 번 정도야 빠질 수 있다 치더라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도 못 갔다는 게 이해가 안 갔습니다.

"진짜 한 번도 안 갔어?"
"중학교 때는 아마 학교에서 다 안 갔을 것 같아."
"그런 일은 없어. 날짜를 연기시키면 시켰지 수학여행을 빼먹지는 않아. 자기가 수학여행을 안 간 거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그때 우리 집이 가난해서 내가 수학여행 간다는 말을 안했을 거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한 번도 수학여행을 못갈 만큼 그렇게 내내 가난할 수 있지?"
"시골에서 돈 나올 데가 어디 있냐?"
"그럼 시골 애들 다 수학여행 못 갔겠네?"
"우리 집은 그 중에서 특히 가난했지."

부모가 준 것에 언제나 감사하며 사는 효자 남편

▲ 효자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 같은 큰 애와 작은 애. 영주 부석사에서 부처님 손모양을 흉내내고 있다. ⓒ 김은주


우리의 대화는 남편이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끝났습니다. 그러나 참 유익한 대화였습니다. 13년을 살아오면서도 안 것보다 이번 수학여행 얘기를 하면서 알게 된 남편이 더욱 살가웠습니다.

내가 함께 사는 사람이 품성이 꽤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수학여행을 못 보낼 정도로 무능한 부모지만 부모가 주지 못한 것에 마음을 주지 않고 오히려 부모가 준 것에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는 효자라는 사실을, 그래서 더욱 남편을 존경하게 된 저녁이었습니다.

퍼즐 조각이 제대로 끼워 맞춰져 한 편의 그림이 되듯 남편과 시댁에 대해 알고 있던 조각조각의 이야기들이 이제야 꾸러미를 꿰게 된 기분이었습니다. 남편은 일찍 철이 들었습니다.

젊었을 때 시아버지가 노름이니 술이니 해서 돈을 다 없애며 어머님 속을 썩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가족을 돌보기보다는 밖으로 나돌며 친구 좋아하는 아버지를 둔 아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수학여행도 못 갔던 것입니다.

남편이 부유한 집에서 산 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가난하다고는 생각 못 했는데 수학여행을 못 갔다는 말을 듣고야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갔고, 그간 남편이 보여준 지나친 절약정신이라든가 부자에 대한 열등의식도 이제 조금은 이해가 갔습니다.

그런데 내가 남편을 훌륭하다고 한 건 아버지의 유흥 때문에 자신의 어린 시절 잃은 게 많은데도 그걸 원망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어떤 아들보다도 아버지에게 고마워했습니다.

소풍 갈 때 500원만 줘도 되는데 천원을 주셨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장남이라고 더 좋은 옷을 사주었다고 자랑하곤 해서 어머님이 말씀하시는 아버님과 남편이 평소 말하는 아버님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들려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이번 수학여행 사건으로 어머님이 말씀한 아버님의 모습이 더 사실에 가깝고, 남편은 아버님의 좋은 모습만 기억하는 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던 것입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몇 년을 울며 살았던 시아버지

남편은 부모가 자기에게 주지 못한 것에는 아예 마음이 없고 준 것에만 마음이 가는 효자 유전자를 타고 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남편은 어디 가서 맛있는 거 먹을 때면 어김없이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아버지 한 번 데려오면 참 좋아하시겠다고, 아버지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마음이 역력하게 느껴졌습니다. 여행을 가도 아버님을 생각하고, 뭔가 좋은 걸 접하면 어김없이 아버님을 떠올렸는데 참 신기한 게 어머님이 아니라 말썽꾸러기 아버님을 떠올린다는 것입니다.

남들 다 가는 수학여행을 못 보내주고, 대학 갈 때도 등록금으로 노름한다고 다 날려서 혼비백산하게 한 그런 아버지에 대해 웬 정이 그리 깊은지 참 신기했습니다. 오히려 수학여행 다 가고 등록금 걱정을 안 해 본 난 엄마가 나에게 주지 않은 것에 더 마음이 가서 지금도 그런 게 한으로 맺혀있는데 남편의 행동은 참 미스터리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시아버지가 비록 가족에게 무관심한 무능한 가장이었지만 지극한 효자였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남편이 어려서 부모님의 행동을 지켜보고 판단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효자였던 아버지의 유전자가 자식에게 유전됐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아버님은 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매일 울었다고 합니다. 장가들어 자식까지 낳은 다 큰 아들이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 눈이 짓무르도록 몇 년을 그렇게 울었다는 건 효자가 아니면 보일 수 없는 행동이지요.

아버님이 효자라는 건 어머님도 인정하셨습니다. 시할머니가 화를 내시면 아버님은 어머니의 화가 풀릴 때까지 무릎 꿇고 앉아 싹싹 빌었고, 자기 벌어온 돈은 꼭 시할머니에게 보여주고야 썼다는 등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아버님은 효자가 확실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어머님 우리 어머님'하는 아버님을 보면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신에 대한 경배와 그다지 다르지가 않습니다. 조선시대 사회를 지배했던 손가락이라도 잘라서 부모를 봉양하려 했던 효의 정신을 난 우리 아버님에게서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효자 유전자라는 보배를 가진 꽤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저녁이었습니다. 큰 딸 또한 효자 유전자 이어받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불쌍하다며 눈물을 흘린 큰딸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없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아버지를 좋아했습니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이런 좋은 품성을 가진 가계에 시집 온 것에 감사하게 된 훈훈한 저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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