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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참호에는 적이 없다

[서평] '적'의 본질을 그린 그림책 <적>

등록|2008.09.25 11:48 수정|2008.09.25 11:48

'적'그림책 '적'의 표지이다. 가슴에 훈장을 잔득 달고 있는 장교의 손엔 피가 뚝뚝 떨아지고 있다. 훈장과 피묻은 손이 대비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 ⓒ 문학동네


그림동화 <적>은 표지부터가 인상적이다. 가슴 가득 훈장을 단 커다란 몸집을 가진 사내의 손은 피로 물들어 있다. 사내의 가슴에 달린 훈장이 다른 사람이의 피로 얻어진 것이라는 의미가 상징적으로 전달된다.

그림동화 <적>에서 말하는 적은 실제 전쟁에서 서로 싸우는 상대편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적이 정말로 나의 적일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전쟁터에서 나와 싸우는 상대편은 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극한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은 나와 같은 인간일 수 없는 짐승 같은 존재여야 한다. 내가 적을 죽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뿐이다.

전쟁은 길어지고 상대편 참호 속에 갇힌 적 때문에 나 역시 참호 속에 갇힌다. 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참호 밖으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서로 경계하는 총성만 간간히 울리며 길고 지리한 전쟁만 계속되던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적을 죽이고 전쟁을 끝내기로 한다. 달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 적의 참호로 쳐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적의 참호에는 적이 없었다. 나처럼 굶주림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적도 내 참호로 쳐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적의 참호에서 발견한 것은 적이 아니었다. 적의 참호 속에는 내 참호 속에 있던 것처럼 말린 고기 몇 점과 막대 비타민 몇 개, 그리고 가족사진이 있었다. 적은 극악무도한 괴물이 아니라, 나처럼 가족이 있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괴물 같은 적은 지휘관이 준 전쟁에 필요한 지침서에만 적혀 있을 뿐이다. 적의 지침서 안에 그려진 괴물은 적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었다.

'적'이라는 글자는 다의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이나 학교, 스포츠 경기에서 나와 경쟁상대에 있는 사람을 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쟁에서의 적처럼 극명하게 대립해 있지는 않다. 전쟁에서의 적은 생명을 담보로 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적만큼 허구적이고 '나'라는 개인과 무관한 존재도 없다. 전쟁에 참여하여 총칼을 들고 싸우는 이들은 애국이라는 명분 아래 상대에게 총칼을 겨누지만, 개인적인 명분을 따져보면 그를 내 적이라 할 수 없다. 그는 국가라는 집단을 내세워 만들어낸 위정자들 적일뿐이다.

그림동화 <적>은 전쟁에서의 ‘적’의 본질을 단순한 언어와 그림으로 극명하게 보여 주는 수작이다. 그림동화라는 간결성 때문에 보는 이의 연령에 따라 느낄 수 있는 정도는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지휘자들이 준 ‘지침서’의 의미를 어른들은 이데올로기의 주입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서의 ‘적’이라 할지라도 잔인한 괴물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인식하기엔 충분하다. 이처럼 단순한 구조 속에 연령에 따라 다양한 범위 해석할 수 있는 책, 그러면서도 모두에게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잘 만들어진 그림책의 매력이다.
덧붙이는 글 리더스 가이드, 알라딘, 예스 24, 네이버에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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