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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한 벌판에 선 망명자의 고백

[서평] 권성우 비평집 <낭만적 망명>

등록|2008.09.25 16:27 수정|2008.09.26 11:18

▲ <낭만적 망명> 겉그림. ⓒ 소명출판


갈대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도 그에게는 허허한 벌판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쓸쓸하고 외로운 존재가 되었음에도 그 고독을 곱씹으며 차분하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살가우면서도 날카로운 그의 말들은 끝없이 두 눈앞에 펼쳐진 벌판, 그 너머 어딘가를 향해있다. 그는 무언가에, 누군가에게 종속되거나 이끌리는 존재가 되길 거부한다.

백석의 시에서처럼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꿈꾼다는 권성우씨가 최근 비평집 <낭만적 망명>을 펴냈다. 문학권력 논쟁 이후에 그는 백석의 갈매나무를 붙잡은 채 주류 문단과 거리를 두었다. 원고의 반 이상을 청탁없이 스스로 기획해 쓴 것도 결국 필연적인 선택이었으리라.

적지 않을 상처를 받았을 그에게 홀연히 다가온 것은 '망명'이라는 두 글자. 이후 그는 시대와 권력을 가로지르며 비평 미학의 꽃을 피운 세 작가에게 자신의 진심을 살포시 내어준다. 임화, 에드워드 사이드, 가리타니 고진이 바로 그들인데, 모두 시대와 불화를 겪은, 또는 겪고 있는 대표적인 망명자들이다.

이들과의 밀도 깊은 대화를 통해 저자는 현 시대의 문단 현실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들이 꿈꾼 세상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틈새를 바라보는 시선이자, 기꺼이 펜 끝에 영혼을 내건 낭만적 망명자들의 초대다. 불가능함을 알면서, 어쩌면 자기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을 결심한 이상주의자들의 여정이 여기에 담겨 있다.

자발적 망명, 고독과 은둔의 글쓰기

그는 임화, 에드워드 사이드, 가라타니 고진의 글에서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문제점과 다시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초거대기업, 거대보수언론, 새로운 퇴행적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복잡다단한 현실은 문단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국문학(공동체), 교수(제도), 출판사(자본), 거대언론으로 통칭되는 문학권력은 '주류'라는 이름으로 문단을 장악했고 자연스러운 법칙에 따라 소수자를 배격했다.

약 70여 년 전에 발표된 임화의 고민과 절망에서 저자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논쟁이 없고 더구나 사회적 의미를 띤 정신의 존재나 대립"이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되던 상황이 특히나 그렇다. 임화는 주류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항상 문단에 대한 비판을 잊지 않았다.

저자는 이에 현실을 돌아보며, 침묵의 카르텔로 묶인 주류 공동체가 누군가의 말처럼 '동시대의 문학을 구원하기 위해 과거의 문학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게다가 현 제도적 모순과 지배 이데올로기, 그리고 거대언론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는 문단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낭만적 망명>이 에드워드 사이드와 가라타니 고진에게 눈을 돌리는 것 역시 비평가로서의 꼿꼿했던 그 자세 때문이다. 책은 당파정치과 일정 부분 거리를 두면서 독립적이고 보편적인 글을 써온 그들의 행적을 꼼꼼하게 추적하며 분석하고 있다. 작가가 현 문단에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현실대응력을 상실했다는 점. 문학이 서사와 현실에서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제도적 차원의 관성적 문학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거대 기업과 언론, 권력의 힘에 별 힘을 쓰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그는 문단이 좀 더 강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현실과 마주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세 비평가들은 모두 각 시대의 주류에서 자발적 망명을 선택했다. 그들은 고독과 은둔을 무기삼아 저항의 미학을 명료하게 보여준 사람들이었다(가라타니 고진은 현재진행형이다).

날카롭게 열린 시선


<낭만적 망명>은 이외에도 도정일, 김현 같은 비평가나 김애란, 황석영, 최인훈, 이문열, 최인호 등의 소설가 그리고 서경식, 고종석, 박노자 같은 훌륭한 에세이스트들에 대해서 격려와 주문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칭찬만 늘어놓는 주례사 비평 대신 분명하고 명료한 분석과 더불어 안타까운 점이나 의혹 등을 담는다.

김현의 비평정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서구편향적인 시각에 대해 지적하고, 김애란 소설의 청신한 문체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작가가 자기 체험 수준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황석영의 바리데기의 완성도에 대해 회의하는 부분이나 그의 자기중심주의와 욕망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날카롭다.

이문열의 유미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가 보여주는 모순점 캐내기 역시 그렇다. <낭만적 망명>은 비평, 에세이, 소설 등을 비평하며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한계점과 모순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며 그들에게 좀 더 나은 글을 쓸 것을 주문한다. 물론 그것은 작가가 이들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 탓이다. 열정이 없으면 비판도 할 수 없듯이, 그는 시종일관 열려있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애정을 담아 비평하고 있다.

그는 상투적인 것에 대해 저항하며 영혼을 펜 끝에 내건 망명자와 같다. 그가 망명 앞에 '낭만적'이란 수식어를 붙인 것은 비평가들이 무엇보다 새로운 이상과 대안을 찾는 이상주의자들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테크닉보다는 진심을 좇고 있으며, 평단의 현실로부터 망명하여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과 냉철한 비판정신을 가다듬고 있다. 그는 거대한 벽 앞에서 그 벽의 틈새를 찾아냈다. 종속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는 딱 그만큼의 경계선에 서있다. 그는 어쩌면 이 고독한 경계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 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가장 위태로운 입장에 서서 불안정한 발밑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그 반복이 순수문학인의 자세다. - <소설가의 각오>(마루야마 겐지) 중에서

마루야마 겐지의 이 말을 이 책에 대입시켜 보면 영락없는 비평가의 각오, 혹은 문학인의 각오라 할만하다. 머리말에서 말했듯이 고독을 기꺼이 선택해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되기를 자청한 자가 있다. 그가 걷는 낭만적 망명의 길이 애정과 신뢰에서 비롯된 것임을 굳게 믿는다. 그는 최고 작품과 대화를 하는 진정한 비평가가 되기 위해 지금도 허허한 벌판에 홀로 서 있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그의 말이 좀 더 많은 이에게 울림을 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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