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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과 탑비 이야기

[상왕산과 가야산 골짜기의 문화유산 답사] ③ 서산 보원사지 2

등록|2008.09.26 10:27 수정|2008.09.26 10:27
발굴중인 금당지와 법인국사 보승탑

▲ 보원사지 금당지 ⓒ 이상기



오층석탑을 보고 나서 바로 뒤에 있는 금당지를 살펴본다. 전체적인 모양이 직사각형인데, 자료를 보니 고려시대의 유구와 조선시대의 유구가 겹쳐 있다. 먼저 고려시대 법당이 이곳에 있다가 불에 탔거나 퇴락해서 조선시대 다시 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언젠가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법당터만 남아 발굴을 진행 중이다.

금당지 가장자리로는 단을 쌓은 석재가 보이고, 그 안으로 사각형의 석재가 또 한 단 보인다. 그리고 이들 사각형 주변에 돌과 일부 주춧돌이 널려 있다. 발굴을 진행 중이어서 아직 부재들이 제 위치를 찾지 못해 어수선한 편이다. 이곳에는 또 기둥을 세우는데 사용했던 연화대석이 있을 텐데 보이질 않는다. 옆에서 작업을 하는 인부들 곁으로 연화대석이 보이는데 그것이 이곳에서 옮겨진 듯하다.

▲ 법인국사 보승탑과 탑비 ⓒ 이상기



금당지를 지나 우리 일행은 산쪽에 있는 법인국사탑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 탑의 공식명칭은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보물 제105호)이다. 법인국사(900-975)는 신라말에서 고려초까지 살았던 유명한 스님으로 고려 4대 임금인 광종의 왕사와 국사를 지냈다. 보승탑은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으로 대사가 죽은 지 3년 뒤인 978년 탑비와 함께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승탑에서 찾은 예술적인 아름다움과 종교성
  
법인국사 보승탑은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는 고려 전기의 전형적인 부도탑이다. 8각의 지대석 위에 2층의 아래 받침돌(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 8각 기둥형의 중간 받침돌(중대석)이 있다. 중간 받침돌 위에는 윗 받침돌(상대석)이 있어 기단부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기단부 위에 탑신부가 얹혀 있는데 이것 역시 8각 기둥 형태이다. 탑신 위는 지붕을 의미하는 옥개부가 있으며, 그 위에 복발과 보륜이 있어 장식적인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 법인국사 보승탑 ⓒ 이상기



법인국사 보승탑은 기와지붕 모양의 옥개석 끝부분 귀꽃조각이 훼손된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하대석은 두 개의 돌을 팔각형으로 만든 다음 돌을 파내 양각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아랫돌에는 면마다 안상을 만들고 그 안에 사자를 양각했다. 면마다 사자의 모양이 조금씩 다른데 전체적으로 순한 모습을 하고 있다. 윗돌에는 구름 속을 날아오르는 용의 모습이 환상적으로 양각되었다. 그런데 이들 조각 그림이 연결되어 돌의 8각이 나타나지 않는다.

▲ 탑신부의 사천왕상 1 ⓒ 이상기


▲ 탑신부의 사천왕상 2 ⓒ 이상기




이에 비해 중대석은 조각이 없어 단순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상대석은 아래에 앙련을 새기고 그 위에 난간 형태의 낮은 기둥을 만들었다. 8각 기둥으로 되어 있는 탑신부에는 문비(門扉), 사천왕상,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앞뒷면에 자물쇠가 달린 문짝이 마주 보고 있고 문짝의 좌우에는 불법을 지키는 사천왕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문비와 90˚ 각도의 좌우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부를 형성하고 있는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지붕 밑으로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다. 윗면은 기와지붕처럼 경사져 내려오다 끝부분이 살짝 들린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모서리선의 끝에 달린 꽃조각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만약 꽃조각이 훼손되지 않았다면 훨씬 아름답고 가벼운 느낌이 들 텐데 아쉽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 있다. 그리고 그 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을 차례로 올려놓았다.

보승탑비의 비문 속에 담겨진 이야기

▲ 법인국사 보승탑비 ⓒ 이상기



법인대사 보승탑의 남쪽으로는 탑비가 세워져 있다. 이 탑비의 공식 명칭은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비(보물 제106호)이다.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고려 초기의 전형적인 탑비이다. 비신의 크기는 가로(폭)가 116.5㎝, 세로(높이)가 240㎝, 두께가 29㎝이다. 비신에는 줄을 그어 46행×99자의 글씨를 새겨 넣었다.

비문은 한림학사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사천대박사 한윤(韓允)이 구양순체의 해서로 썼으며 김승렴(金承廉)이 새겼다. 비문의 글자 크기는 1.5㎝이며 전서로 쓰여진 제액의 글자 크기는 4㎝이다. 제액에는 '가야산 보원사에서 돌아가신 국사이며 시호가 법인삼중인 대사의 비(迦耶山普願寺故國師制贈諡法印三重大師之碑)'라고 쓰여 있다. 이 비석은 국사 입적 후 3년 되는 978년(경종 3) 4월에 세워졌다.

▲ 법인국사 보승탑비 제액 ⓒ 이상기




비문의 내용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서론 부분에서 먼저 불교의 기본을 삼장 육의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여섯 가지, 즉 선(禪)의 근본인 계정혜와 교(敎)의 근본인 경율론을 갖춘 분이 바로 대사라는 것이다. 이어 두 번째 부분에서는 대사가 900년 광주(廣州)에서 태어나 출가하고 스님으로 명성을 얻을 때까지의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대사는 속성은 고씨이고 자는 대오(大悟)며 법호는 탄문(坦文)이다. 15세 때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용덕 원년에 왕의 교지로 승과의 치도(緇徒)로 발탁되어 이후 법문을 주도하게 되었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태조가 시행한 승과를 주관하고 나중에 광종이 되는 태자의 탄생과 관련된 공덕을 쌓고, 화엄경을 연구하여 설법하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950년 광종이 즉위해서는 나라를 교화하는 법을 가르치고 태자를 위해 기도하는 등 사판적 활동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다. 그리고 화엄종지를 전파하기 위해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네 번째 부분에서는 현덕 2년 10월 광종의 왕사가 되어 홍도삼중대사라는 칭호를 받은 때부터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이 나온다. 그는 개보 8년(975) 정월에 국사가 되고 가야산 보원사로 내려간다. 이어 3월29일 열반에 드니 세수 76세이고 승랍은 61세였다. 그리고 3년 후인 978년 경종은 대사의 시호를 법인, 탑명을 보승이라 하고 탑과 탑비를 세우게 한다. 이에 따라 국사수찬관을 지낸 김정언이 비문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 보승탑비의 비문 ⓒ 이상기



마지막 다섯 번째 부분은 대사의 제자들로부터 받은 행장을 토대로 김정언이 지은 비명(碑銘)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6편으로 이루어진 이 명은 불법의 세계에서 이룬 법인국사의 업적을 사언율시로 표현하고 있다.

도가 어찌 멀리 있다 하겠는가           道豈遠而
누구나 실행하면 이게 바로 도라네.    行之則是
이러한 도를 아는 자 누구인가           誰其識之
오직 우리 대사 뿐이라네.                 唯我大士
    […]  
스님께선 왕사 국사 두루 거쳐서        爲師王國
온 나라의 모범이 되었다네.              垂範邦家
물 위에 핀 연꽃처럼 아름답고           水上之蓮
뭇 별 중의 달처럼 빛났다네.             星中之月
    […]
그 법력은 용과 같이 변화무쌍하고     如龍變化
그 모습은 봉과 같이 거룩했다네.       似鳳來儀
때로는 아버지로 가르침을 주셨고      或爲敎父
때로는 스승으로 길을 인도하셨네.     或作導師
손도 천 개 눈도 천 개                      千手千眼
대자대비 갖추신 분.                        大慈大悲
스님의 일거일동 모두가 본받을 터     是則是効
스님을 생각하면 기쁜 마음 가득하네. 念玆在玆

보승탑비의 귀부와 이수

▲ 보승탑비 귀부 ⓒ 이상기



법인대사 보승탑비는 비 받침인 귀부와 비 덮개인 이수도 상당히 훌륭하다. 귀부는 원래 거북 모양이지만 이곳의 귀부는 여의주를 물고 있어 용임을 알 수 있다. 목은 길지 않으나 굵고 당당하며 눈과 코 그리고 귀가 크고 당당하게 표현되어 있다. 코 위로 콧수염까지 조각했고 귀 밑으로는 비늘을, 귀 뒤로는 지느러미 같은 갈기 모양을 조각했다.

귀부의 바닥에는 네 발이 있는데 몸통 밖으로 약간 돌출되어 표현되었다. 발톱이 드러나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안정감을 준다. 귀부의 등에는 조각이 있었으나 풍우로 인해 마모되어 현재는 윤곽만을 볼 수 있다. 등 위에 직사각형의 비 받침이 있으며 그 위에 비신을 그대로 올려놓았다. 비 받침의 양쪽 옆면에는 동심원 모양의 조각을 각각 2개씩 새겨 단조롭지 않도록 했다.

▲ 보승탑비 이수 ⓒ 이상기



이수는 귀부에 비해 조각이 훨씬 더 섬세하고 화려하다. 이수의 네 귀퉁이에 머리를 안쪽으로 향하고 있는 용을 새겨 비를 호위하고, 그 안에 구름무늬(雲紋)를 조각하여 용과 조화를 이루었다. 특이한 것은 이수 위에 탑처럼 보륜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수의 한 가운데 위에서 아래로 5자 4행 20자의 제액이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이 20장의 제액이 앞에서 언급한 '가야산보원사고국사제증시법인삼중대사지비'이다.

법인국사 탄문 스님은 죽어서 뼈를 옆에 있는 보승탑에 묻었지만 영혼은 거북이를 타고 네 마리 용의 호위를 받으면서 구름 속을 두둥실 떠 서방정토로 향하고 있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여행인가. 이것이 바로 나말여초 선종 계열의 큰 스님들이 누렸던 사후의 복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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