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에 마누라가 친정에 가서 몰래 퍼온 몇 됫박의 쌀도 이제는 거의 다 떨어져 간다는 사실까지, 역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이외수, 여원,1988) 83쪽
“며칠 전(前)에”는 “며칠 앞서”로 다듬습니다. “다 떨어져 간다는 사실(事實)까지”는 “다 떨어져 간다는 노릇까지”나 “다 떨어져 가고 있음까지”로 손보고, ‘역시(亦是)’는 ‘또한’으로 손봅니다.
┌ 몇 됫박의 쌀도
│
│→ 몇 됫박 쌀도
│→ 쌀 몇 됫박도
└ …
숫자나 부피가 얼마나 되는가를 헤아리면서 토씨 ‘-의’를 붙이는 버릇이 언제부터 우리들 입에 찰싹 달라붙었을는지 궁금합니다. 백 해 앞서도 이와 같은 말씨가 있었는지, 이백 해 앞서도 이러한 말씨가 있었는지, 삼백 해나 사백 해 앞서도 이처럼 말을 하고 살았을까 궁금합니다.
예전 말씨가 궁금해서 ‘뿌리깊은 나무’에서 펴낸 <민중자서전> 스무 권을 틈틈이 꺼내어 다시 읽곤 합니다. 따로 학교라는 데를 다녀 본 일이 없는 할머님과 할아버님이 당신 살아온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 놓으시는데, 이분들 말씨 어디에도 “몇 됫박의 쌀” 같은 말씨는 찾아보지 못합니다. “몇 됫박 쌀”이나 “쌀 몇 됫박”은 있어도, 토씨 ‘-의’를 함부로 붙이지 않습니다. 다른 자리에도 ‘-의’는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 말씨를 헤아려 보아도, 어떤 억지를 부려서가 아니라 참말로, 토씨 ‘-의’를 넣어서 말해야 할 일은 거의 없어요. 어쩌면, 한 번도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책을 몇 권 샀어요?” “오얏 몇 알을 샀어요?” “달걀을 몇 알 풀까요?” “감자가 두 알 남았네.” 처럼 말할 뿐입니다. “돈을 얼마 받았나요?” “일삯을 얼마나 쳐 주든가요?” “몇 사람이나 모였어요?” “아기 무게가 몇 킬로그램이나 되지요?”하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 몇 됫박어치 쌀
├ 몇 됫박 되는 쌀
├ 몇 됫박쯤 되는 쌀
└ …
말 따로 삶 따로가 없습니다. 글 따로 넋 따로가 아닙니다. 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삶에 따라 말이 달라지니다. 글에 따라 넋이 새로워지고, 넋에 따라 글이 새로워집니다.
구멍가게에 술 한 병 사러 가든 과자 한 봉지 사러 가든, 집에서 장바구니 챙겨서 나들이를 가는 사람이 쓰는 말이 엉망이나 엉터리가 되는 일은 드뭅니다. 문간에 꽃그릇 하나 다소곳하게 가꾸는 사람이 쓰는 글이 얄궂거나 뒤틀리게 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높다고 하는 학교를 다니며 많이 배운 분이라 할지라도, 말이며 글이 엉성궂는 데다가 어설픈 일은 너무 잦습니다. 세상을 한결 나은 쪽으로 고쳐 나가려는 뜻을 훌륭히 품은 분이라 하지만, 말이며 글이 딱딱하고 메마른 데다가 따순 사랑이나 믿음이 조금도 배이지 않는 일도 참 흔합니다.
┌ 몰래 퍼온 쌀 몇 됫박
├ 몰래 퍼온 쌀 두어 됫박
├ 몰래 퍼온 쌀됫박
└ …
많이 벌거나 일부러 적게 버는 삶이 아니라, 알맞게 쓸 만큼 벌고 알맞게 쓰고 남으면 스스럼없이 이웃과 나누면서 꾸리는 삶이 될 때, 말이며 글이며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비록 책을 읽을 겨를이 없을지라도, 힘써 땀흘리는 보람을 알고 이웃과 오순도순 어깨동무를 하는 삶이 될 때, 말이며 글이며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조금 틀릴지라도 우리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기쁨을 선사해 준다고 느낍니다.
말에는 우리 삶이 담깁니다. 말에는 우리 넋이 담깁니다. 말에는 우리 마음그릇이 담깁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가 우리 이웃을 아끼는 만큼, 우리가 우리 터전에 딛고 있는 발걸음 무게만큼, 말과 글에 배이는 깊이와 높낮이가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마음일 때 말에 사랑이 스밉니다. 믿고 아끼는 매무새일 때 말에 믿음과 애틋함이 담깁니다. 걱정하고 보살피는 마음가짐일 때 말에 넉넉함이 깃듭니다.
말 한 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말 한 마디에 사랑과 믿음과 넉넉함이 듬뿍 들어 있는데, 어떤 빚쟁이가 그까짓 돈푼에 목을 매겠습니까. 그렇지만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지기도 합니다. 말 한 마디에 도끼날이 서려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이를 믿거나 아끼고 싶겠습니까.
얄궂은 말씨인 토씨 ‘-의’를 털어내지 못하겠다면, 이 말씨가 좋아서 이 말씨를 찰싹 입에 붙이고 살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 사셔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스스로 자기 삶을 한결 낫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쪽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가운데 이웃을 아끼는 마음을 얼마나 키울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스스로 자기 매무새를 야무지게 다독이지 못하는 동안 그 어떤 일과 놀이가 아름답게 뿌리내릴 수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며칠 전(前)에”는 “며칠 앞서”로 다듬습니다. “다 떨어져 간다는 사실(事實)까지”는 “다 떨어져 간다는 노릇까지”나 “다 떨어져 가고 있음까지”로 손보고, ‘역시(亦是)’는 ‘또한’으로 손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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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됫박 쌀도
│→ 쌀 몇 됫박도
└ …
숫자나 부피가 얼마나 되는가를 헤아리면서 토씨 ‘-의’를 붙이는 버릇이 언제부터 우리들 입에 찰싹 달라붙었을는지 궁금합니다. 백 해 앞서도 이와 같은 말씨가 있었는지, 이백 해 앞서도 이러한 말씨가 있었는지, 삼백 해나 사백 해 앞서도 이처럼 말을 하고 살았을까 궁금합니다.
예전 말씨가 궁금해서 ‘뿌리깊은 나무’에서 펴낸 <민중자서전> 스무 권을 틈틈이 꺼내어 다시 읽곤 합니다. 따로 학교라는 데를 다녀 본 일이 없는 할머님과 할아버님이 당신 살아온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 놓으시는데, 이분들 말씨 어디에도 “몇 됫박의 쌀” 같은 말씨는 찾아보지 못합니다. “몇 됫박 쌀”이나 “쌀 몇 됫박”은 있어도, 토씨 ‘-의’를 함부로 붙이지 않습니다. 다른 자리에도 ‘-의’는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 말씨를 헤아려 보아도, 어떤 억지를 부려서가 아니라 참말로, 토씨 ‘-의’를 넣어서 말해야 할 일은 거의 없어요. 어쩌면, 한 번도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책을 몇 권 샀어요?” “오얏 몇 알을 샀어요?” “달걀을 몇 알 풀까요?” “감자가 두 알 남았네.” 처럼 말할 뿐입니다. “돈을 얼마 받았나요?” “일삯을 얼마나 쳐 주든가요?” “몇 사람이나 모였어요?” “아기 무게가 몇 킬로그램이나 되지요?”하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 몇 됫박어치 쌀
├ 몇 됫박 되는 쌀
├ 몇 됫박쯤 되는 쌀
└ …
말 따로 삶 따로가 없습니다. 글 따로 넋 따로가 아닙니다. 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삶에 따라 말이 달라지니다. 글에 따라 넋이 새로워지고, 넋에 따라 글이 새로워집니다.
구멍가게에 술 한 병 사러 가든 과자 한 봉지 사러 가든, 집에서 장바구니 챙겨서 나들이를 가는 사람이 쓰는 말이 엉망이나 엉터리가 되는 일은 드뭅니다. 문간에 꽃그릇 하나 다소곳하게 가꾸는 사람이 쓰는 글이 얄궂거나 뒤틀리게 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높다고 하는 학교를 다니며 많이 배운 분이라 할지라도, 말이며 글이 엉성궂는 데다가 어설픈 일은 너무 잦습니다. 세상을 한결 나은 쪽으로 고쳐 나가려는 뜻을 훌륭히 품은 분이라 하지만, 말이며 글이 딱딱하고 메마른 데다가 따순 사랑이나 믿음이 조금도 배이지 않는 일도 참 흔합니다.
┌ 몰래 퍼온 쌀 몇 됫박
├ 몰래 퍼온 쌀 두어 됫박
├ 몰래 퍼온 쌀됫박
└ …
많이 벌거나 일부러 적게 버는 삶이 아니라, 알맞게 쓸 만큼 벌고 알맞게 쓰고 남으면 스스럼없이 이웃과 나누면서 꾸리는 삶이 될 때, 말이며 글이며 그지없이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비록 책을 읽을 겨를이 없을지라도, 힘써 땀흘리는 보람을 알고 이웃과 오순도순 어깨동무를 하는 삶이 될 때, 말이며 글이며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조금 틀릴지라도 우리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기쁨을 선사해 준다고 느낍니다.
말에는 우리 삶이 담깁니다. 말에는 우리 넋이 담깁니다. 말에는 우리 마음그릇이 담깁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가 우리 이웃을 아끼는 만큼, 우리가 우리 터전에 딛고 있는 발걸음 무게만큼, 말과 글에 배이는 깊이와 높낮이가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마음일 때 말에 사랑이 스밉니다. 믿고 아끼는 매무새일 때 말에 믿음과 애틋함이 담깁니다. 걱정하고 보살피는 마음가짐일 때 말에 넉넉함이 깃듭니다.
말 한 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말 한 마디에 사랑과 믿음과 넉넉함이 듬뿍 들어 있는데, 어떤 빚쟁이가 그까짓 돈푼에 목을 매겠습니까. 그렇지만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지기도 합니다. 말 한 마디에 도끼날이 서려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이를 믿거나 아끼고 싶겠습니까.
얄궂은 말씨인 토씨 ‘-의’를 털어내지 못하겠다면, 이 말씨가 좋아서 이 말씨를 찰싹 입에 붙이고 살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 사셔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스스로 자기 삶을 한결 낫거나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운 쪽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가운데 이웃을 아끼는 마음을 얼마나 키울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스스로 자기 매무새를 야무지게 다독이지 못하는 동안 그 어떤 일과 놀이가 아름답게 뿌리내릴 수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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