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밤낮으로 숙제, 꿈에도 숙제 걱정뿐입니다"

화태도 섬할머니 제자의 글을 보며

등록|2008.09.26 17:40 수정|2008.09.26 17:50
"벼르고, 미루다가 오늘은 눈 딱 감고 용기를 냈습니다. 선생님 마음에 쏙 드는 제자가 되고 싶어서 정말 애쓰고, 노력은 했습니다. 약속부터 지켜야 하겠다고. 그 약속을 한 번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밤, 낮으로 숙제, 꿈에도 걱정이 숙제 뿐 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네요."

이게 무슨 소린가? 선생님께 좋은 제자가 되고 싶어 약속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그놈의 숙제가 웬수라 꿈 속에서도 숙제 걱정을 한다니? 걱정으로 날을 지새다 보면 금세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홱 지나버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지난해 근무하던 학교가 있던 섬마을 할머니께서 보낸 편지다. 할머니와 나는 올해 초 홈페이지 게시판을 만들고 사는 이야기를 쓰기로 약속하였다. 중학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를 준비하시던 할머니의 국어 공부를 위해 한 약속이었다.

그동안 할머니는 주당 한 편 정도의 글을 올렸고, 나는 글의 맞춤법을 수정하여 답글을 달아 드렸다. 처음 올리시는 할머니의 글은 맞춤법에 오류가 많아 이것 저것 수정해서 보냈다. 몇 차례 반복되면서 할머니의 글솜씨가 많이 좋아졌다. 할머니는 순수한 섬마을 할머니의 일상을 그림일기처럼 선명하고 정겹게 표현하셨다. 맞춤법도 거의 수정할 부분이 없을 만큼 발전했다.

"할머니, 이제 일주일에 두 편 정도를 올려주세요. 이건 숙젭니다."

할머니의 순수한 일상을 좀 더 자주 쓰셨으면 하는 욕심에서 낸 숙제였다. 할머니는 숙제라는 말이 짐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선생이 낸 숙제를 잘 하고 싶은 착한 제자이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 보니 그럭저럭 쓰시던 생활 이야기조차 잘 써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이 다급해질수록, 마감 시간이 다가올수록 머릿속은 더 하얗게 비어가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겪으신 모양이다.

젊은 선생, 할머니 제자. 어울리지 않은 조합에 선생의 욕심까지 더해졌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 배 부르면 종놈 굶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제자 할머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젊은 선생이 얼마나 미웠을까?

▲ 할머니는 이 나팔꽃보다 더 청순하시다. ⓒ 김치민



숙제. 일정 기간을 정하여 해결하도록 부여한 과제가 숙제다.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으면 어른들도 숙제가 남았다며 부담스러워한다. 아이들은 이 숙제가 거의 일상이니 오죽 싫겠는가? 싫어하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아이들을 마냥 놀릴 수 없다는 불타는 선생님들의 사명감과 부모님의 우려는 아이들에게 점점 더 많은 양의 숙제를 부여하고 강요하기 일쑤다.

요즘은 중간고사를 앞둔 시험 기간이다. 나름대로 긴장하고 제법 눈을 초롱하게 뜨면서 수업 집중도를 높이는 녀석이 있는가하면, 책상 위에 널브러져 밤새 시달린 시간을 학교에서 달래는 녀석도 있다.

시험 기간에 상관없이 제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녀석도 물론 있다. 어떤 모습을 보이든 간에 아이들이 바라는 한 가지는 '제발 시험이 없었으면…'이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을 들라면 아마 시험과 숙제일 것이다.

"야! 문닫아!"

아이들의 외마디 소리가 복도를 타고 넘는다. 어제까지 선풍기 방향을 갖고 다투던 녀석들이다. 계절의 오묘한 조화는 교실 속 아이들 모습을 이렇게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어떤 녀석은 열려진 문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마냥 반갑다. 그래서 한사코 문을 연다. 어떤 녀석은 벌써 한기를 느끼며 열린 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피하느라 안간힘을 쓰다가 소리를 지르고 만다. 아이들은 각기 다르다.

25년을 넘기며 선생님 소리를 듣고 있지만, 아이들이 다름을 종종 잊는다. 아이들에게 가깝게 다가가고 싶지만 머릿속 한 구석에는 남은 조급함이 아이들을 채근하기 일쑤다. 결국 미숙한 선생이 할머니에게 마음 고생을 시키고 말았다.

"언제쯤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선생이 될 수 있을까?"

할머니 제자가 내게 내준 숙제다.

선생님께
                                                                                                                    윤순자
선생님 안녕하세요?

벼르고, 미루다가 오늘은 눈 딱 감고 용기를 냈습니다.
선생님 마음에 쏙 드는 제자가 되고 싶어서 정말 애쓰고, 노력은 했습니다.
약속부터 지켜야 하겠다고. 그 약속을 한 번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밤, 낮으로 숙제, 꿈에도 걱정이 숙제 뿐 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네요.

즐거운 일, 감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일상에서 밝은 면을 쓰자니 자랑만 늘여놓은 것 같아서 그렇고. 그렇다고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픈 손가락도 있지요. 널리 광고할 일이 아니겠다 싶고. 해서 추려내고 보면 쓸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해야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은 태산인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무엇보다 첫 번째로 꼽아야 할 영어 공부는 밀려 나 있고. 눈 깜박하면 하루가, 두 번이면 이틀, 일곱 번이면 일주일이 덜렁 달아나 버립니다. 갈수록 글쓰기가 어렵고 써 놓고 보면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짧은 밑천에 1주일에 두 번은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습니다.

그때는 선생님께서 잘 못된 것을 지적해 주셔서 국어 공부를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고. 바르게 알도록 고쳐주시는 재미가 커서. 앞, 뒤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대로 배우도록 애써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의 깊은 정은 넉넉히 알면서도 못된 제자가 중병이 나는 가 봅니다.

성의껏 쓰겠다는 약속을 다시하고. 정한 약속은 취소하는 것이 어떨 까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죄책감에 마음이 늘 무겁기만 하답니다. 헤아려 주시리라 믿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네이트온 메일쓰기 에다 올렸는데 '휴면상태......발송이 안된다' 해서 감히 여기에다 올려 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선생님!
                                           제자 (드림)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