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고향
[책읽기가 즐겁다 213] 아라사끼 모리테루, <오끼나와 이야기>
- 책이름 : 또 하나의 일본, 오끼나와 이야기
- 글 : 아라사끼 모리테루
- 옮긴이 : 김경자
- 펴낸곳 : 역사비평사 (1998.8.31.)
(1) 우리 삶과 사회
농사짓고 살아가는 사람은 서로 겨루지 않습니다. 제 땅에서 제가 부쳐서 거둔 만큼 제 살림을 꾸려 나가면 될 뿐입니다. 농사짓지 않고 장사를 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서로 겨루게 됩니다. 다른 가게와 견주어 좀더 나은 물건을 나은 값으로 팔아야 살림을 꾸릴 수 있습니다. 저절로 서로 겨루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골 농사꾼도 서로 겨루면서 살도록 내몰립니다. 시골 문화가 하루가 다르게 잡아먹히다 못해 이제는 뿌리가 뽑히면서 사라진 자리에 도시 문화가 깃들었는데, 도시 문화는 자꾸자꾸 새로운 돈을 벌어서 자꾸자꾸 쓰고 벌고 쓰고 벌고 해야만 버틸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개국 전인 1844년과 1846년, 류큐 근해에 프랑스 군함이 접근해 와서 오만한 태도로 화친ㆍ통상ㆍ기독교 포교 3가지를 요구하였다. 영국이 청나라에 아편전쟁을 건 직후의 일이다. 이 사건은 류큐뿐 아니라 사츠마번과 막부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막부는 “류큐는 일본 구역 밖에 있으므로 기독교 포교는 허용할 수 없어도 무역은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막부는 류큐를 일본에서 잘라내어 거기서 구미열강의 진출을 저지시키려는 고식적인 방법을 취하였던 것이다 .. (51쪽)
도시라는 곳은 워낙 돈으로 살림을 꾸려 나가도록 되어 있기에, 도시에서 살자면 서로 겨루지 않고는 버틸 수 없습니다. 나 하나는 겨루기를 안 한다고 하여도, 내가 얻거나 누리는 모든 물질은 누군가 끝없이 겨루기를 한 끝에 나오게 됩니다. 그렇지만 도시라는 곳에서도 겨루지 않고 오순도순 살아갈 길이 있지 않느냐 생각하면서 길찾기를 해 봅니다. 덜 쓰고 덜 먹고 덜 누리면서, 아니 우리가 쓸 만큼만 쓰고 우리가 먹을 만큼만 먹으며 우리가 누릴 만큼만 누리는 가운데.
문득문득 우리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 겨루면서 살도록 되었는가 헤아려 보곤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우리 밥그릇만큼 스스로 땀흘려서 거두어 살아가는 틀거리를 왜 버렸는가 돌아보곤 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뜻이 나 하나만 잘 먹고 잘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을까요. 좋다고 하는 일자리를 얻는 까닭은 이웃하고 등을 돌려도 제 배만 불리면 그만이기 때문이었을까요.
저 혼자만 큰집 얻으면 되고, 저 혼자만 큰차 싱싱 굴리면 되고, 저 혼자만 마음껏 일회용품을 쓰고 버려도 되는 세상일까 궁금합니다. 아니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내 이웃하고 가까이 이어져 있는지, 내 살아가는 매무새가 내 둘레에 깊이 영향을 끼친다고 느끼는지 궁금합니다.
.. 일본을 반공의 방패로 삼는 미 군부의 정책에는 세 기둥이 있다. 첫째, 일본을 재무장시키는 것, 둘째, 일본 전 지역을 군사기지로서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 셋째, 일본에서 오끼나와를 분리하여 세계전략의 거점으로서 지배하는 것이 그것이다 .. (77쪽)
전쟁이 일어나는 까닭은, 정치권력을 움켜쥔 이가 제 정치권력을 더욱 단단히 틀어쥐는 가운데 더 큰 잇속을 챙기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쥔 사람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고 싶다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쟁터에 나와서 치고받고 싸우는 이는 권력자가 아닌 권력자한테 휘둘리는 우리들, 여느 사람이거든요. 권력자는 전쟁을 일으키기 앞서 우리들, 여느 사람을 길들여야 합니다. 권력자가 바라는 전쟁을 바로 우리들도 바라는 전쟁인 듯 여기도록. 권력자가 꿈꾸는 잇속이 마치 우리들한테 도움이 되기라도 하는 듯 생각하도록.
이리하여 국민교육이 태어납니다. 국가보안법이 생겨납니다. 국민개병제가 기지개를 켭니다. 온갖 의무가 지워지는 한편, 조그마한 마을 공동체조차 마을사람 스스로 꾸리지 못하도록 갖가지 개발이 넘쳐납니다. 갖가지 법으로 우리 삶을 옥죄지만, 권력자들은 어떠한 법에도 매이지 않으면서 저희 잇속을 더 크게 챙기거나 뽑아냅니다.
(2) 부산에서 생각한 인천
지난 한 주, 부산 나들이를 하다가, 얼마 앞서까지 제 고향 인천에서 이웃으로 살던 아주머니를 부산 골목길에서 우연하게 만났습니다. 꼭 한 달 앞서 부산으로 살림집을 옮기셨다는 아주머니는, ‘인천처럼 온갖 곳을 개발해서 뒤집어엎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데에서 지역운동 한다고 해 봐야 될 수 없고, 부산(에 당신이 깃든 동네)처럼 개발바람이 불지 않아서 오래오래 뿌리내리며 살아갈 수 있는 데에서 지역운동을 해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당신 집이 얼마나 살기 좋으냐고, 아침에 하늘 보고 저녁에 별 보며 하루하루 즐겁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주머니를 따라 언덕배기 집에 찾아가 봅니다. 문을 열어 놓으면 시원한 바람과 파란 하늘이 한눈에 잡힐 듯 들어옵니다. 아마 이 언덕배기에 깃든 어느 집이건 이런 좋은 모습을 즐길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저녁 대접을 받고 아침 대접을 받다가 생각합니다. ‘우리 동네가 끝내 인천시장이 밀어붙이는 개발정책에 따라서 사라지게 되면, 우리 살림집을 부산 언덕배기 골목집으로 옮길까?’ 하고.
.. 섬 밖으로 나간 사람들 중 대부분은 낯선 타향에서 먹고살기 위해 출신 지역별로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면서 밑바닥 노동에 종사하였다. 타향에서 한데 모여살며 삼선(三線)을 퉁기면서 향수를 달래던 사람들의 모습이, 오끼나와 역사와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얘기를 나누는 이민족 집단으로 비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일종의 민족차별 같은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 .. (58쪽)
무궁화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부산에서 인천으로 돌아올 때에도 무궁화 열차를 탔습니다. 웬만하면 주말에 타고 싶지 않았으나, 돌아올 때에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기와 옆지기 때문에 서두르느라 토요일 차편을 끊었습니다. 갈 때에는 온통 빈자리라 널널했으나, 올 때에는 밀양부터 선자리까지 꽉 차서 뒷간 갈 틈을 만들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제 옆에 앉은 젊은 분은 손전화로 수없이 누군가와 전화하면서 ‘내 모르고 탔다 아이가, 무궁화 이거 억수로 괴롭네. 다시는 안 탄다’하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케이티엑스면 세 시간 반이면 될 길을 무궁화로 다섯 시간 반이나 달리니 얼마나 좀이 쑤셨을까 싶군요. 참 안됐습니다.
우리 나라 어디가 안 그러겠느냐만, 전국 어디에 있든 ‘서울로 가는 차’는 아주 많습니다. 네 해 가까이 지낸 충북 충주 산골짜기에서도,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는 삼십 분이나 한 시간에 한 대씩 있었는데(면에 따라 달라서), 이웃 면으로 가는 시골버스는 서너 시간에 한 대 겨우 있거나 하루에 두 대 있기 일쑤였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 나들이를 할 때에 시골 버스역에 들러 보면, 어느 시골 면이나 읍에 가든, 적어도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서울 가는 차’는 있는데, 이웃마을로 가는 버스는 짧아도 두어 시간에 한 대 있으면 잘 있는 셈이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인천에서도 바로 이웃해 있는 부천이나 수원이나 안산이나 안양이나 과천이나 광명이나 고양이나 파주나 강화 가는 버스는 좀처럼 잡아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울 가는 버스는 많습니다. 그리고 빠릅니다. 값도 눅습니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끊어지고 나서 다시 뚫릴 낌새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인천과 서울을 급행으로 달리는 복복선은 금세 뚫립니다. 수원에서 서울 가는 차편과 수원에서 인천 오는 차편을 견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인에서 서울 가는 차편과 용인에서 인천 오는 차편을 대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서울로만, 무엇이든 서울로만, 그예 서울로만 몰리도록 합니다. 중앙일간지라는 신문에서 다루는 기사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짜고, 지역일간지조차 지역 기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서울에 매일 뿐 아니라 서울에 죽고사는 우리 나라라고 할까요. 서울이 살면 나라가 살고, 서울이 죽으면 나라가 죽는다고 여긴달까요. 지역주의가 아닌 고향사랑을 하고 싶고, 지역 이기주의가 아닌 내 마을 사랑을 하고 싶은데, 세상 흐름은 고향이건 아니건 오로지 서울을 닮아서 돈을 많이 벌면 그만인 듯 여깁니다. 서울을 따라가야 하는 듯 생각하고, 서울 흐름을 좇으려고 합니다.
.. 만약 이때 오끼나와를 희생시켜 본토 결전을 모면한 역사와 오끼나와를 미군기지 아래에 내버려두고 독립한 역사를 돌이켜봄으로써, 오끼나와 복귀운동에 부응한 전국민적 반환운동이 일어났더라면, 패전 후 일본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미국의 군사정책에 협력하여 경제번영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좀 가난하더라도 인근 아시아 여러 지역 민중과 연대하여 평화를 추구하는 다른 길을 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 (84쪽)
서울에 있는 대학교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일 뿐입니다. 서울에 있는 회사는 서울에 있는 회사일 뿐입니다. 학교나 일터를 서울에 두고 있다고 하여 더 훌륭하거나 높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 고향 인천만 생각해 보아도, 이곳 인천이라는 데가 도시가 된 까닭은 서울로 물자를 올려보내는 ‘공급 공장지대 도시’로 삼으려는 셈속 때문이었고, 서울에서 밑바닥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값싼 잠자리를 얻어서 지내는 구실을 하는 데 있었던 터라, 인천이라는 곳 스스로 우뚝 설 기틀이 없었습니다. 서울바라기를 하지 않고서는 인천이라는 데가 설 수 없도록 모든 얼거리가 짜여 있습니다. 이런 판이니 시에서는 자꾸만 개발사업을 일으켜 아파트 재개발을 하여 세금을 늘리려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레 쏟아지는 아파트 공급이 제대로 팔리겠습니까. 아시안 경기를 치른다고 골목집을 다 없애고 높직한 빌딩을 새로 올려세워야 21세기 도시다운 모습이 될는지요.
참 까마득하구나 싶으면서도, 참 살기 팍팍하구나 싶으면서도, 섣불리 부산이든 옥천이든 제주든 남원이든 옮길 마음을 품지 못합니다. 아직까지 부산 보수동 언덕배기 골목에는 재개발바람이 안 불어서, 참말 동네 어디에도 부동산 집이 없기는 합니다만, 어느 날 뚝딱뚝딱 바뀔지는 어느 누구도 모를 일이거든요. 사람 사는 즐거움이 아니라 돈 많이 버는 재미에 푹 빠져 버린 이 나라에서 어디를 가든 지금 있는 데하고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느끼거든요.
(3) 작은 책, 작은 이야기
<머나먼 갑자원>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습니다. <사랑의 집>(고침판은 <도토리의 집>으로 나옴)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습니다. 이 만화책을 읽으면, 일본 ‘본토’가, 일본에서 ‘본토가 아닌 섬’을 어떻게 푸대접하면서 괴롭혔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읽을 수 있습니다.
.. 일본은 밖으로는 오직 전쟁 확대의 길로 치달았으며, 안으로는 천황 신격화를 추진하여 천황제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상과 운동을 심하게 탄압하였다. 이런 사상과 운동을 단속하기 위해 1925년에는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었다 .. (65쪽)
틀림없이 일본은 우리 나라 한국과 견주어 책 문화가 크게 발돋움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좋은 작품 가운데 일본말로 옮겨지지 않은 책은 없다고 할 만큼 놀랍습니다. 이리하여 일본에서 내로라 하는 학자나 지성인들 생각과 삶은, 우리들이 고개숙여 배울 만큼 대단합니다. 거룩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거룩하다고 할 만한 일본 지성이 있는 한편, 참 얄딱구리하다고 할 만한 일본 얼간이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일본도 미국힘에 못 이겨서 이라크 파병을 하고 자위대를 키우며 동북아시아 평화를 흔드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꾀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저희들이 일으킨 끔찍한 전쟁을 뉘우치거나 갚음하려는 매무새를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 미군 지배 아래서 이익을 얻는 계층은 오끼나와 사회 내부의 지배자의 입장에 서서 주민의 권리와 요구를 봉쇄하고 떡고물을 조금 나누어 주는 형식으로 민중의 불만을 돌려놓는 역할을 맡았다 … 분업체제의 구조와 기능이 강화되어 일본 본토 안에서는 적어도 평화주의와 경제적 번영이 달성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미군기지가 집중된 오끼나와와 한국의 존재는 일본 사회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패전 후 일본은 침략전쟁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반성을 하지 않은 채 미국 지배에 종속되어, 천황의 전쟁 책임도 묻지 않고 A급 전범 용의자인 기시 신스케를 수상 자리에 앉히는 그런 지배체제를 만들어 내었다. 이런 체제를 확립한 것은 1952년의 강화조약과 미ㆍ일 안보조약이었고, 배후에서 이를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이 조약에 따라 일본에서 분리되어 미군 요새로서 남게 된 오끼나와였다 .. (133∼135쪽)
일본에서도 잊히고 있는 ‘류우큐우 푸대접’입니다. 일본 ‘본토 지성들도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지역차별 이야기가 담긴 <또 하나의 일본, 오끼나와 이야기>입니다. 일본사람 스스로도 그다지 눈길을 안 두고 있는 이야기책인데, 이 책이 한국말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애써 옮겨진 지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조용히 새책방 책꽂이에서 사라졌습니다. 소리도 없이 소문도 없이 판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2003년 겨울에 서울 성균관대 앞에 있는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에서 일찌감치 이 책을 사 두었기에(털어놓고 말하자면, 그때 그곳에서 살 때부터도 판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시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책이 된 이 녀석을 즐겁게 읽고 느끼고 곰삭일 수 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여러 달 동안 그저 쓸쓸한 마음으로 책을 쓰다듬었습니다. 지금 한국사람들은 자기들 먹고살기에도 바쁘다고 하는데, 일본 사회 이야기, 더구나 일본 사회에서도 파묻혀 버린 ‘류우큐우(오키나와) 푸대접’ 발자취를 다룬 이 책 이야기에 눈길을 둘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싶어서. 한국땅에서 푸대접받는 지역 이야기조차도 한국사람 스스로 돌아보는 일이 없는데, 푸대접받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도 제 고향마을이 푸대접받건 말건, 그저 서울바라기만 하면서 고향 뜰 생각만 하고 있는데, 이런 책 하나가 이 땅 이 나라에서 무슨 값을 하고 무슨 뜻이 있을까 하고.
.. 오끼나와 민중에게 전후 50여 년은 미군기지와 싸워 온 역사였다고 하겠습니다. 그 투쟁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와 같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 (5쪽)
미군기지는 평택에도 있었고, 서울에도 있으며, 인천에도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구석구석 미군 탱크와 헬기와 전투기와 미사일과 핵무기가 깃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미군기지를, 미군을, 아니 한국 군대도 아닌 미국 군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미국군이고 한국군을 떠나서, 우리한테 군대란 얼마나 값이 있고 무게가 있습니까. 우리가 수만 수십만 수백만 군대를 거느리면서 지켜야 할 평화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 나라에는 어떤 평화가, 누가 누리는 평화가, 어떻게 지켜지는 평화가 있습니까.
전경버스 새로 꾸미는 데에는 수 억 수십 억을 쓰지만, 일자리와 집을 잃고 한데에서 떨꺼둥이로 지내야 하는 이들한테는 얇은 담요 한 장조차 내주지 않는 한국 사회입니다. 가을바람이 제법 찹니다.
- 글 : 아라사끼 모리테루
- 옮긴이 : 김경자
- 펴낸곳 : 역사비평사 (1998.8.31.)
▲ 겉그림일본은 본토와 '본토 아닌 곳'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잘 보여주는 책 하나입니다. ⓒ 역사비평사
농사짓고 살아가는 사람은 서로 겨루지 않습니다. 제 땅에서 제가 부쳐서 거둔 만큼 제 살림을 꾸려 나가면 될 뿐입니다. 농사짓지 않고 장사를 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서로 겨루게 됩니다. 다른 가게와 견주어 좀더 나은 물건을 나은 값으로 팔아야 살림을 꾸릴 수 있습니다. 저절로 서로 겨루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골 농사꾼도 서로 겨루면서 살도록 내몰립니다. 시골 문화가 하루가 다르게 잡아먹히다 못해 이제는 뿌리가 뽑히면서 사라진 자리에 도시 문화가 깃들었는데, 도시 문화는 자꾸자꾸 새로운 돈을 벌어서 자꾸자꾸 쓰고 벌고 쓰고 벌고 해야만 버틸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개국 전인 1844년과 1846년, 류큐 근해에 프랑스 군함이 접근해 와서 오만한 태도로 화친ㆍ통상ㆍ기독교 포교 3가지를 요구하였다. 영국이 청나라에 아편전쟁을 건 직후의 일이다. 이 사건은 류큐뿐 아니라 사츠마번과 막부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막부는 “류큐는 일본 구역 밖에 있으므로 기독교 포교는 허용할 수 없어도 무역은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막부는 류큐를 일본에서 잘라내어 거기서 구미열강의 진출을 저지시키려는 고식적인 방법을 취하였던 것이다 .. (51쪽)
도시라는 곳은 워낙 돈으로 살림을 꾸려 나가도록 되어 있기에, 도시에서 살자면 서로 겨루지 않고는 버틸 수 없습니다. 나 하나는 겨루기를 안 한다고 하여도, 내가 얻거나 누리는 모든 물질은 누군가 끝없이 겨루기를 한 끝에 나오게 됩니다. 그렇지만 도시라는 곳에서도 겨루지 않고 오순도순 살아갈 길이 있지 않느냐 생각하면서 길찾기를 해 봅니다. 덜 쓰고 덜 먹고 덜 누리면서, 아니 우리가 쓸 만큼만 쓰고 우리가 먹을 만큼만 먹으며 우리가 누릴 만큼만 누리는 가운데.
문득문득 우리들은 언제부터 이렇게 서로 겨루면서 살도록 되었는가 헤아려 보곤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우리 밥그릇만큼 스스로 땀흘려서 거두어 살아가는 틀거리를 왜 버렸는가 돌아보곤 합니다. 학교를 다니는 뜻이 나 하나만 잘 먹고 잘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을까요. 좋다고 하는 일자리를 얻는 까닭은 이웃하고 등을 돌려도 제 배만 불리면 그만이기 때문이었을까요.
저 혼자만 큰집 얻으면 되고, 저 혼자만 큰차 싱싱 굴리면 되고, 저 혼자만 마음껏 일회용품을 쓰고 버려도 되는 세상일까 궁금합니다. 아니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내 이웃하고 가까이 이어져 있는지, 내 살아가는 매무새가 내 둘레에 깊이 영향을 끼친다고 느끼는지 궁금합니다.
.. 일본을 반공의 방패로 삼는 미 군부의 정책에는 세 기둥이 있다. 첫째, 일본을 재무장시키는 것, 둘째, 일본 전 지역을 군사기지로서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 셋째, 일본에서 오끼나와를 분리하여 세계전략의 거점으로서 지배하는 것이 그것이다 .. (77쪽)
전쟁이 일어나는 까닭은, 정치권력을 움켜쥔 이가 제 정치권력을 더욱 단단히 틀어쥐는 가운데 더 큰 잇속을 챙기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쥔 사람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고 싶다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쟁터에 나와서 치고받고 싸우는 이는 권력자가 아닌 권력자한테 휘둘리는 우리들, 여느 사람이거든요. 권력자는 전쟁을 일으키기 앞서 우리들, 여느 사람을 길들여야 합니다. 권력자가 바라는 전쟁을 바로 우리들도 바라는 전쟁인 듯 여기도록. 권력자가 꿈꾸는 잇속이 마치 우리들한테 도움이 되기라도 하는 듯 생각하도록.
이리하여 국민교육이 태어납니다. 국가보안법이 생겨납니다. 국민개병제가 기지개를 켭니다. 온갖 의무가 지워지는 한편, 조그마한 마을 공동체조차 마을사람 스스로 꾸리지 못하도록 갖가지 개발이 넘쳐납니다. 갖가지 법으로 우리 삶을 옥죄지만, 권력자들은 어떠한 법에도 매이지 않으면서 저희 잇속을 더 크게 챙기거나 뽑아냅니다.
(2) 부산에서 생각한 인천
▲ 부산 언덕배기 집대문을 열고 내다보면 시내가 훤히 보이는 언덕배기 집. 이곳에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 싶으면서도, 지금 있는 꾀죄죄한(?) 우리 동네도 잘 지키고 싶습니다. ⓒ 최종규
아주머니를 따라 언덕배기 집에 찾아가 봅니다. 문을 열어 놓으면 시원한 바람과 파란 하늘이 한눈에 잡힐 듯 들어옵니다. 아마 이 언덕배기에 깃든 어느 집이건 이런 좋은 모습을 즐길 수 있으리라 봅니다.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저녁 대접을 받고 아침 대접을 받다가 생각합니다. ‘우리 동네가 끝내 인천시장이 밀어붙이는 개발정책에 따라서 사라지게 되면, 우리 살림집을 부산 언덕배기 골목집으로 옮길까?’ 하고.
.. 섬 밖으로 나간 사람들 중 대부분은 낯선 타향에서 먹고살기 위해 출신 지역별로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면서 밑바닥 노동에 종사하였다. 타향에서 한데 모여살며 삼선(三線)을 퉁기면서 향수를 달래던 사람들의 모습이, 오끼나와 역사와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얘기를 나누는 이민족 집단으로 비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일종의 민족차별 같은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 .. (58쪽)
무궁화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부산에서 인천으로 돌아올 때에도 무궁화 열차를 탔습니다. 웬만하면 주말에 타고 싶지 않았으나, 돌아올 때에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기와 옆지기 때문에 서두르느라 토요일 차편을 끊었습니다. 갈 때에는 온통 빈자리라 널널했으나, 올 때에는 밀양부터 선자리까지 꽉 차서 뒷간 갈 틈을 만들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제 옆에 앉은 젊은 분은 손전화로 수없이 누군가와 전화하면서 ‘내 모르고 탔다 아이가, 무궁화 이거 억수로 괴롭네. 다시는 안 탄다’하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케이티엑스면 세 시간 반이면 될 길을 무궁화로 다섯 시간 반이나 달리니 얼마나 좀이 쑤셨을까 싶군요. 참 안됐습니다.
우리 나라 어디가 안 그러겠느냐만, 전국 어디에 있든 ‘서울로 가는 차’는 아주 많습니다. 네 해 가까이 지낸 충북 충주 산골짜기에서도,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는 삼십 분이나 한 시간에 한 대씩 있었는데(면에 따라 달라서), 이웃 면으로 가는 시골버스는 서너 시간에 한 대 겨우 있거나 하루에 두 대 있기 일쑤였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 나들이를 할 때에 시골 버스역에 들러 보면, 어느 시골 면이나 읍에 가든, 적어도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서울 가는 차’는 있는데, 이웃마을로 가는 버스는 짧아도 두어 시간에 한 대 있으면 잘 있는 셈이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인천에서도 바로 이웃해 있는 부천이나 수원이나 안산이나 안양이나 과천이나 광명이나 고양이나 파주나 강화 가는 버스는 좀처럼 잡아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서울 가는 버스는 많습니다. 그리고 빠릅니다. 값도 눅습니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끊어지고 나서 다시 뚫릴 낌새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인천과 서울을 급행으로 달리는 복복선은 금세 뚫립니다. 수원에서 서울 가는 차편과 수원에서 인천 오는 차편을 견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인에서 서울 가는 차편과 용인에서 인천 오는 차편을 대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서울로만, 무엇이든 서울로만, 그예 서울로만 몰리도록 합니다. 중앙일간지라는 신문에서 다루는 기사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짜고, 지역일간지조차 지역 기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합니다. 서울에 매일 뿐 아니라 서울에 죽고사는 우리 나라라고 할까요. 서울이 살면 나라가 살고, 서울이 죽으면 나라가 죽는다고 여긴달까요. 지역주의가 아닌 고향사랑을 하고 싶고, 지역 이기주의가 아닌 내 마을 사랑을 하고 싶은데, 세상 흐름은 고향이건 아니건 오로지 서울을 닮아서 돈을 많이 벌면 그만인 듯 여깁니다. 서울을 따라가야 하는 듯 생각하고, 서울 흐름을 좇으려고 합니다.
.. 만약 이때 오끼나와를 희생시켜 본토 결전을 모면한 역사와 오끼나와를 미군기지 아래에 내버려두고 독립한 역사를 돌이켜봄으로써, 오끼나와 복귀운동에 부응한 전국민적 반환운동이 일어났더라면, 패전 후 일본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미국의 군사정책에 협력하여 경제번영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좀 가난하더라도 인근 아시아 여러 지역 민중과 연대하여 평화를 추구하는 다른 길을 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 (84쪽)
서울에 있는 대학교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일 뿐입니다. 서울에 있는 회사는 서울에 있는 회사일 뿐입니다. 학교나 일터를 서울에 두고 있다고 하여 더 훌륭하거나 높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 고향 인천만 생각해 보아도, 이곳 인천이라는 데가 도시가 된 까닭은 서울로 물자를 올려보내는 ‘공급 공장지대 도시’로 삼으려는 셈속 때문이었고, 서울에서 밑바닥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값싼 잠자리를 얻어서 지내는 구실을 하는 데 있었던 터라, 인천이라는 곳 스스로 우뚝 설 기틀이 없었습니다. 서울바라기를 하지 않고서는 인천이라는 데가 설 수 없도록 모든 얼거리가 짜여 있습니다. 이런 판이니 시에서는 자꾸만 개발사업을 일으켜 아파트 재개발을 하여 세금을 늘리려 합니다. 그러나 갑작스레 쏟아지는 아파트 공급이 제대로 팔리겠습니까. 아시안 경기를 치른다고 골목집을 다 없애고 높직한 빌딩을 새로 올려세워야 21세기 도시다운 모습이 될는지요.
참 까마득하구나 싶으면서도, 참 살기 팍팍하구나 싶으면서도, 섣불리 부산이든 옥천이든 제주든 남원이든 옮길 마음을 품지 못합니다. 아직까지 부산 보수동 언덕배기 골목에는 재개발바람이 안 불어서, 참말 동네 어디에도 부동산 집이 없기는 합니다만, 어느 날 뚝딱뚝딱 바뀔지는 어느 누구도 모를 일이거든요. 사람 사는 즐거움이 아니라 돈 많이 버는 재미에 푹 빠져 버린 이 나라에서 어디를 가든 지금 있는 데하고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느끼거든요.
▲ 부산 하늘우리가 누릴 세상은 돈이 아닌 사랑이나 믿음으로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 터전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산자락까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도,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살아갈 수 있다면, 이러한 집도 살기 좋은 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최종규
(3) 작은 책, 작은 이야기
<머나먼 갑자원>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습니다. <사랑의 집>(고침판은 <도토리의 집>으로 나옴)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습니다. 이 만화책을 읽으면, 일본 ‘본토’가, 일본에서 ‘본토가 아닌 섬’을 어떻게 푸대접하면서 괴롭혔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읽을 수 있습니다.
.. 일본은 밖으로는 오직 전쟁 확대의 길로 치달았으며, 안으로는 천황 신격화를 추진하여 천황제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상과 운동을 심하게 탄압하였다. 이런 사상과 운동을 단속하기 위해 1925년에는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었다 .. (65쪽)
틀림없이 일본은 우리 나라 한국과 견주어 책 문화가 크게 발돋움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좋은 작품 가운데 일본말로 옮겨지지 않은 책은 없다고 할 만큼 놀랍습니다. 이리하여 일본에서 내로라 하는 학자나 지성인들 생각과 삶은, 우리들이 고개숙여 배울 만큼 대단합니다. 거룩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거룩하다고 할 만한 일본 지성이 있는 한편, 참 얄딱구리하다고 할 만한 일본 얼간이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일본도 미국힘에 못 이겨서 이라크 파병을 하고 자위대를 키우며 동북아시아 평화를 흔드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꾀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저희들이 일으킨 끔찍한 전쟁을 뉘우치거나 갚음하려는 매무새를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 미군 지배 아래서 이익을 얻는 계층은 오끼나와 사회 내부의 지배자의 입장에 서서 주민의 권리와 요구를 봉쇄하고 떡고물을 조금 나누어 주는 형식으로 민중의 불만을 돌려놓는 역할을 맡았다 … 분업체제의 구조와 기능이 강화되어 일본 본토 안에서는 적어도 평화주의와 경제적 번영이 달성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미군기지가 집중된 오끼나와와 한국의 존재는 일본 사회에서 점차 멀어져 갔다. 패전 후 일본은 침략전쟁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반성을 하지 않은 채 미국 지배에 종속되어, 천황의 전쟁 책임도 묻지 않고 A급 전범 용의자인 기시 신스케를 수상 자리에 앉히는 그런 지배체제를 만들어 내었다. 이런 체제를 확립한 것은 1952년의 강화조약과 미ㆍ일 안보조약이었고, 배후에서 이를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이 조약에 따라 일본에서 분리되어 미군 요새로서 남게 된 오끼나와였다 .. (133∼135쪽)
일본에서도 잊히고 있는 ‘류우큐우 푸대접’입니다. 일본 ‘본토 지성들도 잘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지역차별 이야기가 담긴 <또 하나의 일본, 오끼나와 이야기>입니다. 일본사람 스스로도 그다지 눈길을 안 두고 있는 이야기책인데, 이 책이 한국말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애써 옮겨진 지 몇 해 지나지 않아서 조용히 새책방 책꽂이에서 사라졌습니다. 소리도 없이 소문도 없이 판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2003년 겨울에 서울 성균관대 앞에 있는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에서 일찌감치 이 책을 사 두었기에(털어놓고 말하자면, 그때 그곳에서 살 때부터도 판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시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책이 된 이 녀석을 즐겁게 읽고 느끼고 곰삭일 수 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여러 달 동안 그저 쓸쓸한 마음으로 책을 쓰다듬었습니다. 지금 한국사람들은 자기들 먹고살기에도 바쁘다고 하는데, 일본 사회 이야기, 더구나 일본 사회에서도 파묻혀 버린 ‘류우큐우(오키나와) 푸대접’ 발자취를 다룬 이 책 이야기에 눈길을 둘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싶어서. 한국땅에서 푸대접받는 지역 이야기조차도 한국사람 스스로 돌아보는 일이 없는데, 푸대접받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도 제 고향마을이 푸대접받건 말건, 그저 서울바라기만 하면서 고향 뜰 생각만 하고 있는데, 이런 책 하나가 이 땅 이 나라에서 무슨 값을 하고 무슨 뜻이 있을까 하고.
.. 오끼나와 민중에게 전후 50여 년은 미군기지와 싸워 온 역사였다고 하겠습니다. 그 투쟁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와 같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 (5쪽)
미군기지는 평택에도 있었고, 서울에도 있으며, 인천에도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구석구석 미군 탱크와 헬기와 전투기와 미사일과 핵무기가 깃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미군기지를, 미군을, 아니 한국 군대도 아닌 미국 군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미국군이고 한국군을 떠나서, 우리한테 군대란 얼마나 값이 있고 무게가 있습니까. 우리가 수만 수십만 수백만 군대를 거느리면서 지켜야 할 평화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 나라에는 어떤 평화가, 누가 누리는 평화가, 어떻게 지켜지는 평화가 있습니까.
전경버스 새로 꾸미는 데에는 수 억 수십 억을 쓰지만, 일자리와 집을 잃고 한데에서 떨꺼둥이로 지내야 하는 이들한테는 얇은 담요 한 장조차 내주지 않는 한국 사회입니다. 가을바람이 제법 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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