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석을 비판하라, 그러나 입은 막지 말자
[주장] 개인의 '표현의 자유'에는 왜 그리 인색할까
▲ 강의석씨(22.서울법대 휴학)가 1일 국군의 날 기념 시가행진이 펼쳐진 강남 대치동 현대백화점앞에서 군대 반대 누드시위를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이정훈
남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 사람의 마음까지 우리가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속아왔는가.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 자체가 아닌, 그가 하는 각각의 말과 행동을 갖고 그때그때 평가할 수밖에 없다. 예수나 석가처럼 그 자체를 우상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나 석가라도 우상화하는 것은 나는 반대하지만.
'강의석'을 말하기 위해서다. 강씨는 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서 알몸 퍼포먼스를 펼쳤다. 세계 평화를 위해 군대를 없애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논란이 많다. 그의 주장의 타당성을 갖고도, 그 방식을 두고도 말이다. 그의 말과 행동에 동의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의석은 고등학교 시절, 학내 종교자유를 위해 투쟁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나도 그때 그를 당찬 젊은이라고 보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권투선수로, 택시운전사로, 호스트바 종업원으로, 병역거부운동으로, 다큐 독립영화 감독으로 가끔 언론에 나왔다. 여전히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군대폐지 운동과 국군의 날 알몸 퍼포먼스 이후 강의석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사회적 움직임이 있다. 우리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도 강의석의 입 막을 자격은 없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나는 '아직까지는' 최소한 누구도 강의석의 입을 막을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본다. 강의석의 입을 막아서도 안 된다. 그는 아직까지는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 민주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든 것을 악이라고 배척하려는 경향이 있다. 인종적으로, 종교적으로, 사상적으로, 심지어 지역적으로까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나와 다른 것이지, 결코 모두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강의석의 주장이 그렇다. 그의 말과 행동은 우리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지,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는다. 설령 무의미하다고 해도 그의 입을 막아서는 안 된다. 혹시 강의석이 군대폐지 운동에 동참해 달라고 제안하면, 그때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면 된다.
나는 최근 어떤 모임에서 강의석을 만났다. 나는 그에게 "대체복무제까지는 동의하지만, 군대 폐지 운동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강의석님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앞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지켜보겠다"도 말했다.
그의 진정성을 나는 모르고, 알 필요도 없다.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의 진정성을 알겠는가? 진정성 여부는 공적 판단의 기준이 결코 될 수 없다. 사기꾼도 자기는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테니까.
학교 안 종교자유 투쟁에서 최근 군대 폐지운동까지, 강의석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결코 인간이 걸어가서는 안 되는 길이 아니었다. 개인의 철학과 신념을 실현 가능성 여부로 따질 문제는 아니다. 세상의 혁명은 사실 불가능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의 주장은 '자유와 평화'라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방식도 민주주의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폭력적 방법을 동원하지 않았고, 남의 자유를 파괴하지도 않았다. 남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법일 뿐이지, 일관되게 평화적 방법을 추구해오고 있다.
'언론의 자유' 강조하면서 개인의 '표현의 자유'에는 왜 인색할까
▲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획득으로 병역특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박태환 선수(좌). 그런 박 선수에게 병역특례 거부와 함께 군대 거부 운동을 제안해 화제가 되고 있는 강의석씨(사진은 2004년 6월 학내종교 자유투쟁 당시의 것). ⓒ 연합뉴스·오마이뉴스
알몸 퍼포먼스. 누드는 지극히 평화적인 방법이지 결코 폭력적 방법이라고 나는 보지 않는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었다. 수영선수 박태환의 병역면제와 관련해 강의석은 '태환아, 너도 군대가!'라고 썼다. 취지는 군대폐지에 동참하라는 것이었지만, 표현상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태환아, 군대 면제 축하해! 그런데 군대를 폐지하면 우리 모두 자동 면제가 되니까, 너도 동참할래?'라고 썼다면 강의석의 군대폐지 운동 주장을 명쾌하게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언론의 자유는 그렇게 유독 강조하면서, 개인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왜 이리도 인색할까. 강의석의 행동에 대한 여론의 독재성과 언론보도의 획일성을 보면서, 나는 독재정권이 뿌려놓은 국가주의의 그림자를 본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집단화, 전체주의화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는 개인의 존엄성과 관용을 중시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해볼 때도 되지 않았는가.
나는 오래 전 천안문 사태 때, 중국의 한 젊은이가 질주하는 탱크를 온몸으로 막아서는 것을 보았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조차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젊은이는 자신의 몸을 던졌다. 하물며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강의석의 알몸 퍼포먼스는 평화를 갈구하는 한 젊은이의 몸부림으로 봐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보았다.
강의석이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말을 하게 하자. 우리가 그동안 속아왔다고, 강의석에게도 속을 것이라고 아직까지는 단정 짓지 말자.
우리는 그동안 정말 너무 많이 전방위로 속아왔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진리를 굳이 자신이 입증이라도 해야겠다며, 하루아침에 극좌에서 극우로 변신하는 정치 사기꾼을 보았다. 그동안 개혁 사기꾼도 넘쳐났고, 최근에는 어용학자 사기꾼, 어용언론 사기꾼, 관변NGO 사기꾼까지 줄을 잇고 있다. 강의석이 그런 사기꾼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몸부림치는 지렁이가 되길 바란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인간의 근본적 고민과 사회 문제에 침묵을 지키는 젊은이들보다는, 그래도 아직까지는 강의석이 더 낫지 않는가. 침묵만큼 무서운 사회는 없다. 나는 강의석에게서 나이가 아니라 정신적 젊음을 본다. 상상력과 창의력은 정신적 젊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젊은이의 사상의 창의성을 죽여서는 안 된다.
인류의 진보는 주리를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말을 트게 하는 데서 시작됐다. 강의석에게 말을 하게 하자. 그러나 유심히 살피면서 속아 넘어가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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