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그땐 세상이 다 미쳤었지"

[인터뷰] 여수의 향토사학자 이중근

등록|2008.10.06 10:55 수정|2008.10.06 13:59

▲ 여수시 오림동에서 이중근씨가 발굴한 칼이 새겨진 암각화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지방 기념물 제 150호로 등록됐다 ⓒ 이중근


오는 10월 19일은 여순사건 60주기 기념일이다. 여순사건 후 연좌제 때문에 한 평생을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여수의 향토사학자 이중근(77)선생을 만났다. 부인과 사별하고 자식들과 분가해 조그만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계시는 이씨는, 두들겨 맞고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것을 제외하곤 기억력도 훌륭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1931년 여수시 호명동에서 태어난 이씨는 출생 직후 4살 때 충무동으로 이사해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방 후 2학급 규모로 140명을 모집하는 여수중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후 교사(校舍)건립 문제로 학내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나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찬탁과 반탁으로 나뉜 갈등이 심각했다. 집안은 삼대독자였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좌익과 우익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당시 18세이던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여수는 좌우할 것 없이 처참한 살육 만행의 현장으로 변했다. 하루는  공부만 하고 있었던 그를 개인적 감정이 있던 사람이 잡아가 곡괭이 자루로 엄청나게 맞고 사경을 헤맸다.

▲ 평생을 여수 역사 살리기에 애썼던 향토사학자 이중근씨 ⓒ 오문수


열 대까지는 맞은 것이 기억나는데, 그 후부터는 기억도 없고 아프지도 않았다. 다행이 아는 사람들이 도와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평생 너무 아프고 쑤셔 쭈그려 앉을 수가 없었다. 아픈 자리인 척추를 수술해 보여준 수술자국이 10센티 쯤 됐다.

"왜 그렇게 때렸어요? 좌익이었습니까? "
"아니, 학교 다닐 때 개인적으로 싸운 적이 있었지."
"그게 사람을 죽고 살릴 만큼 큰 죄였습니까?"
"그때는 학생연맹이라는 게 있어 끌고 가서 두들겨 패는 게 실적이 되는 시대였지. 뭐랄까? 한 마디로 그땐 세상이 다 미쳤었지. 여수에서는 좌․우 어느 쪽이든지 연결 안 된 집이 하나도 없을거여. 지금은 그때 몹쓸 짓 한 사람들도 하나 둘씩 죽어가고 있어요. 나는 용서할 준비가 돼 있는데 나를 때린 사람은 지금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찾아와서 용서를 빌면 60년이 지났으니까 용서해 주겠는 데 찾아오지 않네. 아니 못 오는 것이겠지."

그의 집안은 창에 소질이 있던 숙부가 여순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돼 대구 형무소에서 억울한 생을 마감했다. 이 일로 당국으로부터 감시와 의심을 받고 연좌제에 묶여 사회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혼란의 와중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수를 떠나는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 중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에 입학하게 됐다. 그러나 연좌제의 끈질긴 악연은 계속돼 친척과 연계된 것으로 예단한 당국에 끌려가 코에다 고춧가루 물고문, 손가락사이에 연필 꼽고 비틀기, 무릎사이에 장작 넣고 밟기 등 온갖 고문을 받았지만 혐의가 없자 풀려났다.

풍비박산이 난 가정형편 때문에 더 이상 대학을 다닐 수 없게 되자 육군 공병으로 입대 후 제대했다. 결혼으로 가장이 된 이씨는 취직자리를 알아봤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당시는 중학교 졸업장만 있어도 웬만한 곳은 취직이 보장되던 시기였지만 '오케이' 소리를 듣고 이력서를 다섯 번이나 냈지만 떨어졌고 이유를 들어보면 연좌제 때문이었다.

1960년대부터 전세방과 사글세방을 전전하다가 봉강동에 터전을 잡은 후 1980년대에 제12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대통령선거인단에 당선됐고, 1982년부터는 평화통일자문위원 역할을 맡아 17년간 수행했다.

"선생님! 선생님 성격하고는 그 자리가 안맞을 것 같은데요?"
"허허허, 허긴 그렇지. 하도 연좌제에 한이 맺혀서 한을 풀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는데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가 있다고 해서 출마했는데 돈 한 푼 없는 내가 당선됐어."

실제로 1982년부터 향토사연구를 시작했는데 평화통일자문위원의 직함이 먹혀들고 연구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여수시문화원 사무국장 일을 맡아 20여 년을 향토사연구에 전념했다. 다음은 이씨가 여수지역 역사연구에 공헌한 자료들이다.

그는 여수지역의 거의 모든 고인돌을 직접 찾아 사진을 촬영하고 기록 보관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림동 진남경기장 조성공사 당시 자칫하면 매장될 뻔한 칼이 암각(岩刻)된 고인돌을 발견하였다. 이 자료는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지방 기념물 제150호로 등록됐다.

여수시 고소동 계산에는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통제이공수군대첩비'와 장군이 돌아가신 6년 후 부하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여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의 '타루비'가 세워져 있다.

▲ 이씨의 노력으로 보물 제 1288호로 지정된 타루비. '타루'란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이순신 장군 사후, 부하들이 장군의 공덕을 기려 비를 세웠다 ⓒ 오문수


이씨가 조사할 당시에는 대첩비와 타루비가 보물 제571호로 함께 묶여 지정돼 있었다. 이씨가 중심이 된 위원회에서는 유물의 성격이나 건립 연대 등에 차이가 있으므로 분리하여 줄 것을 정부에 건의하여 1998년 타루비는 별도로 보물 제1288호로 지정됐다.

전라좌수영 성벽의 훼손을 막는 등 좌수영 보존에도 힘쓰고 전라좌수영에 관련된 각종 고서를 발굴하여 연구했다. 특히 전라좌수영 관련 고서인 '진도요해''호좌수영사례'를 남산동의 박아무개씨가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빌려주지 않자 사진기로 촬영한 후 6개월 동안 필사하여 원본과 똑같은 책을 만들어 냈다. 그는 진주시민의 노력으로 복원된 진주성과 같은 전라좌수영성 복원이 꿈이다.

어렸을 때 봉산동 일대에서 놀면 고무신이나 운동화가 길이나 들판에 널린 철 부스러기인  슬러지에 걸려 금방 망가진 점. 봉산동 일대의 논바닥이 붉은 색을 띤 점 등에 의문을 품고 연구를 시작해 봉산동 일대가 전라좌수영의 병기창 역할을 했음을 밝혀내 한국 철강학회에서 발표했다.

그는 자신과 직접 관련되기도 했고 여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여순사건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애썼다. 1997년부터 3년간 「여순사건사실조사서」발간을 위해 여수와 순천, 삼산면과 거문도 등의 섬을 다니면서 목격자와 피해자들로부터 증언을 채록한 후 인명피해자들이 암매장당한 현장을 밝혀내고 유골 발굴 작업에도 참여했다.

▲ 젊었을 적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빼곡이 쓴 이씨의 일기를 보면 그의 학구열을 잘 알 수 있다 ⓒ 오문수



젊었을 적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왔다는 그의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하다. 1998년 여순사건 50주기에 직접 지으셨다는 '혼돈 반세기'는 증언을 채록하고 그 아픔을 기록한 자작시이다.

돌산의 죽포와 거문도 학살 현장을 얘기하시던 그는 팔순이 다 돼가는 나이인데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남의 아픔이 내 아픔이었을까? 아래는 돌산의 죽포에서 채록한 내용을 그린 이씨의 시에서 인용한 내용으로 진압군이 젊은 새댁으로 하여금 숨어있는 남편을 찾아내도록 다그치면서 시아버지 뺨을 때리게 하는 장면이다.

둔전죽포 둘러보니 삼강오륜 착취로다
새색시와 사아버님 무릎 꿇어 앉혀놓고
맞뺨치기 웬 말인가 삼강오륜 어이하고
새색시 손 못 대면 짓밟고 차고 나서
시아버지 멱살 잡고 요렇게 치는 거다
아이야! 차라리 니가 나를 때려라
숨어있는 남편이 그래도 안 나오면
집에다 불을 놓아 온 가족이 갈 곳 없네

다음은 여수 만성리 굴앞에서 학살된 125명을 죽어서나 형제처럼 지내라는 의미에서 '형제묘'라 불리는 형제묘를 그린 내용이다.

▲ 여순사건 당시 총살된 125명을 불태워 매장한 곳으로, 죽어서나마 형제처럼 지내라는 의미로 '형제묘'라 불린다 ⓒ 오문수


만성리 굴앞 왼편 높드란 곳 웅덩이
다섯 사람 한 켜 장작 한 켜
다섯 켜 다섯모대기 125명
지름 찌끄러서 3일간 화염에 쌓여
지나는 길손들 코를 못 둘렀고
훗날 후손들이 표석을 세웠건만
그 흔적 간데없어 혼들마저 갈 곳 없네

열 살 때 인민군이 여수에 주둔하면서 미군기가 폭격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한참 호기심이 왕성한 때라 친구들과 여수경찰서에 구경가서 즉결처분 당하는 사람의 창자가 나오는 걸 직접 봤다는 분 얘기다.

"한반도에는 거의 30년마다 전쟁이 일어나곤 했는데 지금은 50년 동안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남북한에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대부분이라 전쟁이 얼마나 처참한가를 잘 모른다.  남북한 누군가가 오판하여 또다시 광란의 시대가 올까 걱정된다."     
   

▲ 여순사건 60주기 기념포스터로 '60년의 한, 기억은 진실로 아픔은 상생으로'라는 글귀가 보인다 ⓒ 오문수



* 오는 10월 19일은 여순사건 60주기 기념일입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주축이 된  여순사건 60주기 행사위원회에서는 기념일을 맞이하여 서울 학술 심포지엄(10월 17일), 여순사건 체험마당(10월 18일), 평화인권예술제(10월 18일), 큰 굿 한마당(10월 19일), 여순사건토론회(10월 22일), 문학인의 밤(10월 25일), 이 밖에도 그림 사진전, 역사순례, 인권영화제, 공동수업 등의 행사를 가질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남해안신문에도 송고 합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