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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의 4인4색 산타기

[지리산 1박2일] 승부욕 강한 큰 딸, 현재를 즐기는 작은 딸

등록|2008.10.07 12:39 수정|2008.10.07 12:40
중산리 매표소에서 순두류까지는 버스를 타고 왔는데, 순두류에서 천왕봉까지 4.8킬로미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코스가 천왕봉을 오르는 가장 짧은 길이라고 하네요.

한여름에 오르는 산은 가을에 오르는 산하고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오를 때 참 힘들었지요. 먹을 걸 잔득 담은 배낭도 무거웠고,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숨도 굉장히 찼습니다.

남편은 더 힘들어 보였습니다. 남편의 배낭은 동생이 장기 배낭여행 다닐 때 가져가던 배낭으로 배낭 자체의 무게만도 심상찮은데 거기에 먹을 게 잔뜩 들어있으니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고 정말 힘들어했습니다.

남편이 짊어진 배낭은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해

사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힘들어했던 사람이 남편입니다. 산을 오를 때 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번 종주에서는 우리가 쉬자고 할 때보다 남편이 쉬자고 할 때가 많았습니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별로 없는 남편이 감당하기에는 배낭이 너무 무거운 것 아닌가  했는데 역시 산에서 내려오고 나서 탈이 났습니다.

허리와 좌골이 아프다고 파스를 사와서 붙였다 뗐다를 반복하던 남편은 그래도 전혀 나을 기미가 안 보이고 더 아프니까 나중에는 무슨 큰 병이라도 생겼을까봐 걱정이 되는지 병원에 가서 MRI를 다 찍더군요. 다행히 별 이상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간 안 쓰던 근육을 무리하게 써서 생긴 결과였지요.

마침내 천왕봉에 오르다천왕봉에 오른 자랑스런 두 딸의 모습. 왼쪽이 작은 애고, 오른 쪽이 큰 애다. ⓒ 김은주


산을 오를 때 우리 가족의 성격이 나타나더군요. 우리 가족이 산을 오를 때 보인 행동이 사실은 삶을 살아갈 때의 태도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남편은 무거운 배낭에 짓눌려 조금의 여유도 찾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고군분투하는 그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짊어진 배낭이 그의 삶이라면 육중한 무게로 짓누르는 무게감에는 아이들과 나도 끼어 있겠지요. 그의 삶에서 무게감을 덜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딸, 목표는 동생보다 빨리 오르는 것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 자기 감정을 자신도 잘 모르는 변덕스런 날씨와 같은 큰 딸, 원래가 감정변화가 극심한 B형이라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질풍노도기라는 사춘기 초기증세를 앓고 있어서 저와 충돌이 잦습니다. 

약체인 큰 딸은 완전히 화난 표정으로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이 싫은 것이지요. 샤워하고 나서 잠옷 입고 침대에 누워서 책 읽는 시간을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하는 큰 딸은 밖보다는 안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지쳐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걸어야 하는 현실에 화가 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경쟁의식이 강한 큰 딸은 현재를 묵묵히 견디더군요. 오직 목표는 동생보다 빨리 정상에 오르는 것이지요. 산을 빨리 정복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화난 표정으로 올라갔지만 예전처럼 떼를 쓴다거나 하지는 않아 참 다행이었습니다.

딸이 오르는 산을 현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딸은 현실을 즐기기 보다는 정복해야 할 과제로 여기는 듯했습니다. 반에서 1등을 하고 100점을 맞고, 자신의 경장상대인 애들을 질투하고, 오직 성취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산을 오르는 모습과 별로 다르지가 않았습니다.

의무감이든 성취욕구이든 남편과 큰 딸이 산을 대하는 모습과 달리 작은 애는 정말 존경스러울 정도로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작은 애, 사탕을 먹으며 산을 즐기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작은 애는 언제나 즐거운 편입니다. 삶을 견디기 보다는 자기 상황을 언제나 즐겁게 만드는 작은 애를 보며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넌 정말 운이 좋은 줄 알아야 돼. 항상 즐거울 수 있는 좋은 유전자를 타고 난 것에. 너가 진짜 부럽다. 정말 그렇게 항상 즐겁니?"

산을 오르는 모습 또한 평소에 보여줬던 그 모습이었습니다. 산을 오르는 데 힘들어하는 모습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주 신났습니다. 평소에는 잘 먹지 못했는데 '뿌셔뿌셔'라는 과자를 비롯해 사탕, 쵸코바, 사과, 오이, 음료수 등 먹을 걸 배낭에 잔득 짊어지고 있으니 어깨춤이 절로 나지요. 

큰 애에게도 뭘 먹으면서 즐기며 올라가라고 해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며 올라갔습니다. 큰 애의 마음에는 빨리 정상에 올라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그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다른 것에는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반면, 작은 애는 정상이나 이런 미래에는 마음이 가 있지 않고, 마음이 현재에 머물렀지요.

달콤한 사탕이 입 안에서 녹는 현재를 즐기고 있으니 작은 애는 즐기기만 하다가 어느덧 정상에 올랐고, 큰 애는 정상만을 바라보다 힘들게 올랐으니 작은 애가 현명한 건 삼척동자도 알겠지요. 작은 애처럼 되는 게 누구나 가능한 게 아닌 게 문제지요.

정말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천왕봉 오르는 길은 경사가 급했고, 우리가 오르던 시기는 더위가 한창이던 때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오르고 땀이 줄줄 흐를 판에 가파른 산을 올랐으니 덥지 않을 때보다 두 배는 힘들더군요. 그러다 난 요령을 터득했습니다.

우선 급한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몸이 말을 잘 들어 산꼭대기까지 데려다줄 것도 아니기에 마음을 몸의 속도에 맞추기로 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마음의 속도를 더 늦추었습니다. 빨리 올라가고 싶다는, 언제 끝나나 하는 마음을 쉬고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했습니다. 또한 최대한 천천히 발을 움직였습니다. 그러자 정말 마술처럼 몸도 마음도 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나도 작은 애처럼 좀 편하게 산을 오른 편입니다.

천왕봉에서 장터목산장을 향해 가는 길이 길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신선계로 격상한 느낌이었다고 밖에는 표현못하겠네요. ⓒ 김은주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오르막길이 마지막 고비를 남겨놓고 끝이 보이더군요. 천왕봉 바로 아래 길은 참 가팔랐습니다. 거의 80도는 되어 보였습니다. 그 길을 오를 때는 좀 겁이 났습니다. 올라가다 발을 헛디뎌 떨어지면 수직으로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 오금이 저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우리는 마침내 천왕봉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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