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직권수정? 역사학자에 대한 압력"
[현장] 20여개 사학단체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하라"
▲ 교육과학기술부의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수정방침에 대해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교육학회 등 21개 역사학계 대표자들이 8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모적 이념논쟁 중단' '교과서 검인정제도 정신 훼손 중단' '교과서 집필자에 대한 부당한 외압 중단' 등을 촉구했다. ⓒ 권우성
정부와 여당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방침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역사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오랜 산통 끝에 마련한 교과서 검정 체계를 무너뜨리고 우리 사회가 유례 없는 국정교과서 체계로 회귀하려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연구회·고려사학회 등 20여개 사학단체들은 8일 오전 10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교과서의 객관성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앞장서 헌법에 보장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부정하고 있다"며 "백년대계 속에서 이뤄져야 할 역사교육이 위기에 처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기자회견에 참가한 사학단체들은 특정 정치 성향이 없는 순수 학술단체로 국내 역사 관련 학회가 대부분 포함돼 있다. 20여개의 학술단체들이 교과서 수정 논란에 한목소리를 낸 것은 이례적이다.
위기에 처한 역사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단체들은 정부가 직접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에 팔을 걷어붙인 것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냈다. 이들은 "학계의 꾸준한 요구로 김영삼 정부에서 만든 검인정 제도는 교과서 선택권을 보장함으로써 역사 교육 발전의 중요한 전기가 됐다"며 "그런데도 역사학과 무관한 단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교과서 직권수정까지 논하는 것은 과거 국정교과서로 돌아가려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사학)는 "지금까지 교육부나 국사편찬위원회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 교과서를 정권이 바뀌자마자 좌편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교과서 필자의 권한을 무시하고 '수정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정부가 직권으로 하겠다'고 하는 것은 국정교과서 체제로 회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학자들은 또 정부가 교과서 집필자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한상공회의소나 뉴라이트 단체들, 국방부 등의 교과서 수정 요구를 여과 없이 출판사에 보내고 내부 회의록을 제출하라고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김도연 전 교과부 장관이 직접 교과서 수정 의지를 밝힌 것은 현재 교과서를 재검토하고 있는 학자들에 대한 무언의 압력이라는 지적이다.
조광 한국사연구회 회장은 "국사편찬위가 이미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들에 대해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고 현재는 재검토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 과정에서 연구자의 학문적 양심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줘야 한다"며 "최종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김도연 (당시) 교과부 장관이 교과서 수정 방침을 밝힌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다시 연대기 외우는 주입식 교육으로?
정부의 일방적인 교과서 수정 움직임으로 결국 피해는 학생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도 지적됐다.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을 함께 비교해보고 스스로 역사관을 확립해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 권위주의 체제하에서처럼 획일적 지식만 주입받는 교육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철호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은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실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비판적 판단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며 "과거 국정교과서 시절엔 단순한 사실 관계만 주입받는 것에 그쳤고 검정 체제에 와서야 일률적인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역사교육이 개선되기 시작했는데 40년대에나 어울릴 좌편향·우편향 논란이 벌어져 안타깝다"고 밝혔다.
박헌 민족운동사학회장도 "역사에는 반드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 있는데 역사교과서라고 한다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모두 서술해야한다"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부정적인 면을, 해방 직후 북한 역사에서 긍정적인 면을 다소 서술했다고 해서 그 부분만 지나치게 부각해서 친북 좌편향이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끝으로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정부와 교육현장의 소통 부재 문제도 제기됐다.
단체들은 발표한 성명을 통해 "교과서의 편향성을 주장하는 일부 단체는 역사학자는 물론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식민지근대화론, 친일과 독재를 정당화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며 "그런데도 정부는 교과서 집필자들이나 학계와 교사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이는 역사학 전문성에 대한 부정"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집필자들은 교과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며 "역사 교과서에 만약 문제가 있다면 그 수정작업은 필자들이나 역사학계의 엄밀한 검토를 통해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사학단체들의 명단이다.(가나다순)
고려사학회·대구사학회·동양사학회·부산경남사학회·서양중세사학회·역사교육연구회·역사교육학회·전북사학회·선시대사학회·한국고대사학회·한국근현대사학회·한국민족운동사학회·한국사연구회·한국사상사학회·한국사회사학회·한국서양사학회·한국역사교육학회·한국역사연구회·한국중세사학회·호남사학회·호서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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