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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데파트, 내겐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건물'

사라진 중앙데파트, 사라진 지난날의 내 젊음

등록|2008.10.09 09:32 수정|2008.10.09 09:32

▲ 폭파 해체 전의 중앙데파트 모습입니다. ⓒ 홍경석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10대의 청춘이었던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 사랑의 꽃을 틔우기 시작했다.

아내는 당시 집이 충남 대덕군 구즉면 (지금은 대전시 유성구 전민동 일원)이었기에 천안에서 살았던 나는 애인을 보고자 싶으면 열차를 타고 대전역에서 내려야 했다. 당시 대전에는 개점한 지 얼마 안 된 중앙데파트가 있었다.

중앙데파트는 대전 최초의 쇼핑센터인 데다가 이 건물에 함께 속해있던 중앙관광호텔까지 그 시설이 그야말로 ‘삐까번쩍’하여 많은 이들이 하릴없이 이 주변을 배회하기도 다반사였다.

지금은 중년의 아낙이 되어 ‘맛이 갔지만’ 당시엔 정말이지 코스모스처럼 날렵한 몸매에다 장미향 같은 분위기의 아내였다. 마침 아내는 그처럼 유명한 중앙데파트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그러함에 아내를 만나면 으레 그 주변에서 데이트를 해야 했던 것이다.

지난 1974년에 대전천을 복개하고 그 위에 세워진 중앙데파트는 당시만 해도 그 위용과 위상은 정말이지 대전시민 모두의 어떤 뿌듯한 자긍심 역할에도 부족함이 없었던 건물이었다.

아무튼 당시엔 지금과 같은 휴대전화가 있을 리 만무였다. 하여 근처에 지나가는 아이를 붙잡아 돈 몇 푼을 쥐어주며 “꼬마야, 저기 보이는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가 내 애인이란다.
얼른 가서 천안서 애인이 와서 여기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다오”라고 부탁을 했던 것이었다.

그처럼 불러낸 아내와 중앙데파트에서 머지않은 신도칼국수 내지는 한밭식당에서 설렁탕을 먹으며 사랑의 탑을 더욱 높이 쌓곤 하였다.

어제(10월 8일)은 중앙데파트 건물의 해체작업이 있었다. 오후 4시가 가까워오자 중앙데파트는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건물’이었기에 공연히 싱숭생숭했다.

그래서 서둘러 사무실을 나와 중앙데파트 건물 앞으로 갔다. 이미 중앙로는 교통이 통제되어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구경하려는 인파는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윽고 오후 5시 19분쯤이 되자 발파 카운트다운과 함께 중앙데파트는 요란한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역사적 순간인지라 미리부터 디카를 지니고 준비를 하던 나 또한 거개 시민들처럼 아연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순식간에 붕괴되는 중앙데파트 ⓒ 홍경석



“우르릉 꽝~”

굉음과 함께 중앙데파트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으며 금세 발생한 자욱한 먼지는 마치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지듯 천지를 온통 잿빛으로 변모케 하였다.

그 바람에 현장의 사람들은 먼지를 피해 달아나느라 바빴지만 나는 공연히 마음이 더욱 심란하였다.

그건 대전천 하상에 우뚝 선 채 34년간이나 대전시민과 함께 해온 중앙데파트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의 발견 외에도 그와 함께 내 젊은 날의 어떤 족적도 그와 함께 덩달아 사라졌다는 어떤 상실감이 그 단초였다.

▲ 중앙데파트가 붕괴되고나자 마자 후폭풍으로 자욱한 먼지가 날리고 있습니다. ⓒ 홍경석


중앙로의 교통통제로 말미암아 시내버스의 승객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콩나물시루가 되었다. 옷의 먼지를 털며 집에 들어서니 아내가 “왜 이렇게 늦었냐?”며 서둘러 저녁상을 차려냈다.


“응, 중앙데파트 해체 광경을 보느라고 늦었어.” 원도심 재창조 라는 슬로건 아래 진행된 것이 어제의 중앙데파트 건물 공식 발파행사였다.

중앙데파트의 해체는 이제 끝났다. 앞으로 대전천은 새로운 모습과 풍경으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묻어있던 내 지난날의 젊음과 추억은 중앙데파트와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공연히 울적하여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한 잔 또 아니할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SBS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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