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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 서울은 내가 아는 서울이 아니네...

[서평] '느리고 따뜻한 서울' 이야기 <그 골목이 말을 걸다>

등록|2008.10.11 10:12 수정|2008.10.11 10:12

▲ 서울시 노유동에도 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근처에 한강이 있고, 건국대, 세종대가 가까이 있는 이 동네에 눈독 들이는 사람이 늘고 있다. ⓒ 조정래


"서울은 정말, 세계에서 제일 빠르게 변하는 도시인 것 같아요."

5년에 한 번쯤 얼굴 볼 일이 생기는 불가리아인 친구가 십여 년 전쯤 서울에 왔을 때 신음하듯 흘린 말이었다.

"그렇긴 하지요. 그래도 요즘엔 개발이 거의 끝나다 보니 예전 같은 속도감이 느껴지진 않는 것 같아요. 예전엔 한 해 만에 논밭이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동네 친구들과 야구하던 공터에 갑자기 수십 층짜리 빌딩이 들어서곤 했는데."
"그렇지 않아요. 지금도 서울은 숨 막힐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그걸 못 느끼나요?" 

"글쎄요, 지금도 가끔 새로 지어지는 건물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은 한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지 않나요? 어차피 똑같은 콘크리트 건물이 이리 바뀌었다 저리 바뀌었다 하는 건데…."
"제가 5년 전에 서울에 왔을 때는 서울에 지하철이 4호선까지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5, 6, 7, 8호선까지 개통이 되고 역은 무려 수십 개가 생겨났지요. 김은식씨는 이런 속도가 놀랍지 않나요?"

듣고 보니 그렇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이 단 5년 만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진작부터 공사는 하고 있던 것이 그 5년 사이에 마무리되어 완공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친구가 다시 꺼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 역시 새삼 내가 사는 땅의 속도를 실감할 수 있었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도 30여 년 전부터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그게 지난해에 마무리되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낸 역이 몇 개인지 아세요? 딱 여섯 개예요."

질주하던 놀이기구에서 내리는 순간 역설적인 어지러움에 몸을 가누지 못하듯, 나는 소피아의 30년을 떠올리며 그 '느림'에 현기증이 일었다. 삼십 년간 딱 여섯 개의 지하철역을 지은 불가리아인들. 그리고 그 비슷한 시간동안 서울에서만도, 산을 뚫고 강을 건너며 백 개가 넘는 지하철역을 만들고 이어낸 한국인들. '국제표준'과 비교한다면 너무 느린 소피아.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하게 빠른 서울. 

세계에서 가장 빠른 도시, 서울

▲ <그 골목이 말을 걸다>(김대홍 저, 넥서스books. 12,000원) ⓒ 넥서스

사람들이 흔히 서울 하면 떠올리는 단어는 어떤 것들일까? 서울시장 출마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랑'과 '헌신' 따위는 아닐 테고. 아마도 즐거움, 화려함, 편리함, 혹은 답답함, 매캐함, 잿빛 정도가 아닐지.

충북 음성 고향을 떠난 뒤로 부모님을 따라 인천과 (신도시 개발 이전의) 일산, 군포, 그리고 결혼한 뒤로는 오산, 파주, 다시 부천. 그렇게 서울 시계 바깥으로만 빙빙 돌며 이삿짐 싸고 풀기를 거듭해온 나에게 서울은 숨 막히는 1호선 전철에 실려서라도 매일 밟지 않고는 삶을 꾸려나갈 수 없는 기회의 땅인 동시에 번번이 사납게 솟구치는 전세 값으로 비웃듯 등 떠밀어내는 오만한 성벽이기도 하다.

그래서 빌어먹을 동네라고 한껏 저주를 해놓고도 내 자식 학교 들어갈 나이 먹기 전에는 어느 틈으로든 비집고 들어서봐야 할 텐데, 한숨을 쉬게 만드는 애증의 대상, 뭐 그쯤 된다고도 해야겠다.

이 책, <그 골목이 말을 걸다>(김대홍 지음, 넥서스 북스 펴냄)가 주는 당혹감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책에 실린 글과 사진은 모두 서울에 관한 것이되, 그 서울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정반대로 고요하고 수수하고 느리고, 한편 따뜻하고 넉넉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대문을 활짝 열어둔 채 외출을 하고, 지나가던 꼬마 녀석은 누군지도 모를 이방인 어른에게 넙죽 인사를 하며, 볼 일이 급하거든 들어와서 화장실을 쓰라고 벽보를 붙여두는 곳. 아직도 정자나무 밑 평상에서는 내기장기와 훈수 실랑이가 벌어지는 그곳이, 과연 내가 알고 있던 서울이 맞느냐는 말이다.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른, 서울 이야기

이 책은 저자 김대홍이 감행했던 몇 개월간 자전거 여행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 여행에는 '수백km를 내 다리의 힘만으로 완주해 내겠다'는 식의 결기도 없고, 온몸으로 느끼는 바람결과 자연의 향기 같은 신선한 충격도 없다.

그의 자전거는 손잡이 한 쪽에 순대 봉지와 소주 두 병 담은 까만 비닐봉지 걸고 휘파람 불며 달리기에 딱 맞춤일 15만 원짜리 까만 '발발이'였고, 그 자전거 바퀴가 밟은 곳은 기껏해야 반나절 안팎 거리의 서울 곳곳이었다. 그것은 굳이 여행이라기보다 '마실'이었고, 그 기록을 읽는 것 역시 숨차고 흥분될 것 없는 잔잔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느리고 완만한 만큼이나 깊고 포근하다. 이화동, 남현동, 삼선동, 노유동. 도대체 서울에 있는지도 몰랐던 이름의 동네들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이발관에서는 머리를 깎고, 식당에서는 자장면 안주에 생맥주를 마시고(아, 상상만 해도 속 부대끼는 이 궁합에 대해서, 그는 '안 먹어본 사람은 말을 하지 말라'는데…), 골목 문방구 앞에서는 동네 꼬마 녀석들 어깨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고 전자오락 구경을 하다가, 또 어느 구석에서는 그 동네 이름의 유래와 역사와 사회사를 추적하기도 한다.

▲ 자장면 안주에 생맥주. 아, 상상만 해도 속 부대끼는 이 궁합에 대해서, 그는 '안 먹어본 사람은 말을 하지 말라'는데… ⓒ 조정래


그래서 평창동 고관대작들의 성곽 같은 저택에서 그 마을 개발의 출발점이 된 '김신조 사건'을 거쳐 조선 선조 시대 선혜청의 창고인 '평창(平倉)'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쇠락한 동네의 표본 가리봉동에서는 한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공간이었던 '한국수출산업공단'의 70, 80년대를 상상한다.

80년대 후반 이후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비롯한 온갖 재야민주화운동단체들이 모여든 숭인동의 내력에서 해방직후 무장해제당한 채 귀국한 광복군의 막사자리, 관아의 엄한 감시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십시일반 불쌍한 단종비를 먹여 살린 동네 아낙들의 사연, 그리고 청백리의 표상 이수광과 관우장군 사당의 존재까지 찾아내는 과정도 은근히 흥미롭다.

그러나 그의 글은 꼭지마다 꼭 같은 사건에 관한 이야기로 결말을 맺는다. '재개발', 그리고 땅값과 집값, 이주와 정리, 소멸, 끝. 80년대에서 90년대를 거쳐, 이미 분당이며 일산이며 판교며 시계 밖의 웬만한 땅덩어리들까지 완전히 '평정'을 해버린 재개발의 창끝이 이제 내부의 '미개척지'인 서울 곳곳의 산꼭대기와 골목골목까지 겨누고 있는 살풍경. 그 앞에서 서울이 품고 있는 서울답지 않은, 그러나 곧 모두 사라져갈 풍경들에 대한 느리고 고요한 시선.

두 개의 서울

▲ 노량진동 곳곳에 남아있는 오래된 집 ⓒ 조정래


그러고 보면, 우리는 '두 개의 서울'을 가지고 있다. 느리고 고요하고 넉넉한 서울과, 불도저와 용역 철거반을 앞세워 그것을 끝없이 산 위로, 시계 밖으로 밀어붙여온 급하고, 소란스럽고 각박한 재개발의 서울. 그리고 판판이 이기며 대한민국의 깔끔함과 역동성을 대표해 온 그 두 번째 서울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첫 번째 서울의 숨통을 딱 끊어 놓으려는 찰나에, 지금의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은 장마다 줄마다 밑줄 쳐가며 기억하고 싶을 만큼 명문장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정감 있는 사진들이 꽤 많이 들어있지만, 굳이 확대하고 현상해서 책상 앞에라도 붙여두고 싶은 것도 흔치 않다. 그래서 첫 대여섯 장을 넘기자마자 빨려들어 순식간에 읽어낼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러나 오르막길을 지그재그 올라가는 자전거의 속도만큼, 느리게 책장을 넘기며 음미하기에 딱 좋을 포근함, 안타까움, 신기함, 생경함을 담고 있어 마지막 장을 넘기며 '벌써 끝인가' 싶어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 책이다.

여행의 기록과 소감을 담은 책들은 많다. 우리는 그런 책들을 읽으며 새로움과 도전에 대한 자극을 받기도 하고, 낯선 것과 마주 세워진 우리 일상을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 골목이 말을 걸다>는 특별한 매력을 가진 책이다. 익숙한 것 속에서 발견해낸 낯섦, 그러나 낯선 그것을 곧장 그리워하게 만드는 힘. 차분하고 진중한 성찰의 힘이다.

사족이지만, 책의 내용과 꼭 맞아 들어가지는 않는 사진들에 대해 잠깐 생각해 봤다. 예컨대, '꼭 시루떡처럼 포근한 맛이 일품인'이라는 홍지동의 계단들. 그러나 그 구절 옆에 박혀있는 것은 엉뚱한 가로등 사진인지라, 불끈대는 궁금증을 이길 수가 없다. 혹, 직접 되밟아 각자의 여행을 해보라는 고도의 충동질인가?

어쨌든 책장을 덮고 인터넷을 열어 한참 자전거 쇼핑몰을 돌았다. 저자의 말대로, '자전거란 안 탈 이유를 찾자면 끝이 없다. 겨울엔 추워서 못타고 여름엔 더워서 못 탄다. 봄엔 황사 때문에…, 문화가 된다는 것은 그냥 타는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이 가을엔, 나도 자전거 여행을 떠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 편집부 기자로 일하고 있는 저자 김대홍과 나는 '밥친구' 사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해 한두 번, 만나서 뜬금없이 '술 한 잔'도 아닌 '밥 한 그릇'을 나누는, 생각해 보면 좀 특이한 삼십대 중후반의 두 남자 (그는 후반, 나는 중반이다).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그 사이 그와 취직에 관해, 결혼에 관해, 혹은 그 비슷한 일상의 돌부리들에 관해 넋두리와 고민을 나눌 때도, 그는 꼭 자전거처럼 느긋하게, 비틀거리는 듯 중심을 잡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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