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타고난 노동운동가, 그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

[나의 백인보 7] 조계사 수배자 농성중인 이석행 민주노총위원장

등록|2008.10.12 13:12 수정|2008.10.13 10:09

▲ 수배 농성중에도 손님맞이에 분주한 이석행 위원장 ⓒ 민종덕

조금 지나면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 계절을 앞둔 조계사 뒷마당, 아직은 한낮의 기온이 그런대로 지내기 괜찮다. 이 곳에 지난 봄과 여름밤, 서울시청과 광화문 등지를 거대한 촛불의 물결로 가득 채우게 했던 주역들이 텐트를 치고 농성 중이다. 이른바 '촛불수배자'들이다.

이들과 함께 16일째 농성을 하고 있는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을 찾아 지난 7일 오전 조계사를 찾았다. 농성 중이고 오전이기 때문에 미리 약속하지 않아도 그와 마주 앉아 차분히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내 계산은 빗나갔다.

그는 아침부터 간담회 등 거기서 할 수 있는 활동을 하느라 바빴다. 그는 점심 때 즈음 텐트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그의 표정이 밝지가 않다. 연신 염주알을 굴리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눈치다. 잠시 틈을 이용해 나하고 얘기를 나누려고 하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이날 찾아온 손님들은 망향휴게소 노동조합 여성간부들이었다. 이들은 야근을 마치고 위원장을 보기 위해 잠을 자야 할 시간을 이용해 왔다. 이석행 위원장은 이들을 보자 표정이 밝아졌다. 이어 지난 여름 투쟁 때 고생한 것을 위로 격려하고, 이들 조합간부들은 위원장님의 지원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고 감사하는 대화를 나눈다. 이들의 대화를 보니 마치 오누이같이 따뜻하고 정감 있었다.

최근 민주노총에 관해 이런저런 비판이 있지만 민주노총 위원장의 이런 자세와 지도력이 있다면 희망이 있는 조직이라고 믿고 싶다. 망향휴게소 조합간부와의 점심 이후에도 계속 일정이 있어 나는 다음날 다시 오겠다고 하고 돌아왔다.

다음 날인 8일 아침 일찍 다시 조계사를 찾았다. 이석행 위원장은 이른 아침부터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었다. 어제 다녀간 망향휴게소 조합원들이 고맙고 짠해서 며칠 전에 개설한 자신의 블로그(http://blog.daum.net/shworker/7160933)에 글을 쓰는 중이다.

그는 글을 쓰면서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데 몇 번이나 썼던 글을 날려 버리고 다시 쓰기를 거듭한다. 옆에서 글 쓰는 것을 방해해서 날려버리 게 한 것이 아닌가 해서 미안하기도 했다. 조금 있으니까 민주노총 부위원장, 엘지카드 노조위원장 등이 찾아왔다.

염주 굴리는 이석행위원장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이명박정권의 폭거에 착찹해하는 이석행 민주노총위원장이 염주를 굴리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 민종덕


이석행 위원장은 쓰던 글을 할 수없이 중단하고 찾아온 사람 모두와 함께 경내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들이 찻집으로 자리를 옮기자 조계사 주위에서 지키고 있던 사복경찰들이 무전을 치고 일지에 뭔가를 적고 바삐 움직인다. 사복경찰 한 사람은 찻집 안까지 슬쩍 들어와서 동향을 살피고 나간다.  내가 이석행 위원장을 처음 만나게 된 때가 아마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직후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2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석방된 뒤 전태일기념사업회 부설 '전태일노동학교' 책임을 맡고 있었다. 

이 노동학교에서는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를 축적하고 확산시키며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그 중 하나인 사례 발표가 있었다. 이 사례발표에 적합한 인물을 찾는 중 진주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노동조합을 이끌고 진주지역 민주노조의 구심역할을 하는 '진민노련' 이석행 위원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위원장으로 있는 대동중공업노조에 전화를 걸어 전태일노동학교 강사로 와 달라고 요청했다. 내 전화를 받은 이석행 위원장은 전태일기념사업회에 대해서 이미 관심이 많았고,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나의 요청에 주저함 없이 시원스럽게 응했다. 

당시 이석행 위원장의 노동학교 사례발표는 대단히 인기가 좋았다. 수도권은 물론 지방에서도 이 위원장의 사례발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이석행 위원장의 시원시원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말솜씨는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그가 예비군훈련장에 가서 노동조합교육을 시켰다는 대목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두둑한 배짱과 기지에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이석행 위원장은 1957년 충남 청양군 남양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금광촌이었다. 그의 나이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때부터 집안의 생계는 어머니께서 노점상으로 이어갔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해서 겨울에 연탄불조차 피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노점을 지키는 겨울에는 그가 애타게 기다린 것이 있었다. 건너편 중국집 식당에서 불을 갈고 버린 연탄에는 언제나 불씨가 조금 남아있었는데 그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 불은 20~30분은 족히 쬘 수 있는 유일한 난로였다.

그렇게 버린 연탄을 쬐기를 수차례, 결국 중국집 아저씨가 눈치를 채고 그때부터 남은 불씨가 1시간 이상 쬐도록 일찍 연탄불을 갈곤 했다. 지금도 그 아저씨에 대한 고마움의 추억이 있다. 그래서 그는 연탄불을 갈 수 있는 중국집을 차리는 것을 소원했다.

광산에서 그는 어렸을 적에 노조지부장이 선거유세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선거유세에서 감명 받은 그는 "나도 이다음에 크면 식당을 해가면서 지부장을 해야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때, 그의 가정형편이 더 어려워져 중학교 입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금광에 들어갔다. 어린 그는 금광에서 1년 동안 일을 해 중학교 입학자금을 마련했다. 동영 중학교에 들어간 그는 3학년에 올라갈 무렵 가정형편 때문에 또 한 번 학교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마치 전태일의 어린 시절처럼 구두닦이와 신문팔이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서울에서 1년 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다시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간신히 중학교를 마친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길이 막막했다. 그의 꿈은 육상선수로 도 대표로까지 나갔던 운동을 계속 하고 싶었다.

이때 교장 선생님이 그에게 전북기계공고 진학을 추천했다. 그리하여 진로를 바꾸어 공고에 진학했다. 공고는 수업료를 면제받고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학년 때 초대회장으로 뽑힌 그는 2학기에 박정희 시대 문교정책은 학생회가 아닌 학도호국단으로의 군대식 체계를 강요는 것에 맹렬히 저항했다. 이 일로 그는 기숙사에서 쫓겨나고 정학조치까지 당하게 되었다.

순탄치 못한 고등학교를 마치고 정밀가공사 자격증을 딴 그는 1977년 11월 14일 드디어 진주에 있는 대동중공업에 취업하여 노동자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대동중공업에 입사한 지 3년 되던 1980년, 박정희 피살 이후 잠시 자유의 바람이 불 때 이 회사에서도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그는 이 노동조합에서 대의원으로 일했다. 노조결성 초기만 해도 노조는 상당히 민주적이었다. 그러나 1982년 전두환 정권은 노조해산 바람을 일으켰다.  대동중공업에서도 회사간부들 친·인척들이 주도해서 노조해산을 획책했다.

▲ 118주년 세계노동절행사에서 연설하는 민주노총위원장 ⓒ 민종덕


이에 이석행 대의원을 비롯한 10여명이 노조사수를 위한 비밀모임을 구성한다. 10명은 똘똘 뭉쳐 노조사수를 위해 회사 측의 회유 협박을 물리치고 노조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 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결국 84년 대동중공업노조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이리하여 대동중공업노조는 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 속에서 많은 노조들이 탄생되기까지 진주지역에서 외로운 민주노조의 길을 걸었다.

이석행 위원장이 이끈 대동중공업노조는 조합원 복지시설확충, 생산직 호봉승급제 쟁취, 조합원 부당 인사발령 저지 등을 얻어냈다. 이석행 위원장은 치열한 노조활동 속에서 86년 대동중공업 직장동료와 결혼했다. 그 해 12월에 그는 위원장으로 재당선되었다. 그는 87년부터 대동중공업 노조의 힘을 바탕으로 진주지역 전체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87년 4월의 일이다. 직장중대 600여명이 예비군 훈련을 받고 있던 중 비가 쏟아졌다. 중대 전원은 강당으로 비를 피해 갔고, 이때 현역대위가 나와서 "누구든 1시간 동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좋다"는 제안을 했다. 이석행 위원장은 이 기회를 놓치랴 싶어 앞으로 나가 대위에게 "정말 무슨 얘기를 해도 좋으냐"고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은 뒤 2시간의 강연을 시작하였다. 

주제는 "노조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노조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즉석에서 이루어진 긴 연설 끝에 그는 "노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대동중공업 노조로 연락하라"며 단상을 내려왔다. 아무 말이든 해도 좋다고 한 대위는 아연실색해서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대동중공업노조에는 노조에 관한 문의 전화가 계속 걸려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6월 항쟁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다. 진주 지역에서도 민주노조 결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반면 사용주의 탄압도 거세졌다. 이에 이석행 위원장은 투쟁을 통해서 탄압을 물리쳤다.

이 과정에서 노총 시협의회의 무대응과 무기력에 이석행 위원장이 항의하자 노총 시협의회는 오히려 이석행 위원장을 구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진주지역 민주노조들은 노총 시협의회를 탈퇴하고 지역 민주노조의 구심체를 결성해 보다 자주적이고 투쟁적인 노동운동을 펼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사례발표를 한 이석행위원장의 강연은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진 많은 청중들한테 큰 공부가 되었다. 이 강의 이후 이석행 위원장은 서울 나들이가 많았다. 87년 새로 탄생한 민주노조를 조직하는 일, 여기저기에서 요청하는 교육 등을 소화하기 위해서다.
이 당시 나는 이석행 위원장이 서울에 올 때면 가끔씩 만났다.  공식적인 일로서는 '노동자의 벗'이라는 월간잡지 기획회의 때문이고, 비공식적인 일로서는 이런저런 술자리에서였다. 당시 내가 만나본 이석행 위원장에 대한 인상은 한 마디로 '사나이 중의 사나이 멋있는 사나이'였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고 딱 집어서 얘기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굳이 얘기하기로 하면 우선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이 매우 강직하면서도 날카롭거나 고집스럽지 않고 따뜻하다는 것이다. 또 그와 사적인 대화나 술자리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매사에 주저함이 없이 시원시원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내가 노동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선배들한테 들은 말은 '노동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3일 동안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3일 동안 계속 술 마실 수 있어야 하고, 3일 밤을 꼬박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운동이 그만큼 대중을 설득, 조직할 수 있어야 하고, 끈질겨야 하고, 건강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당시 이석행 위원장을 접하면서 그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췄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저 친구 타고난 노동운동가네!'라고 했었다.

그런 그가 90년대 초 전노협을 결성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고 91년 전노협 사무차장을 하면서 전노협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특히 전노협의 어려운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재정 사업하는 모습은 눈물 겨울 정도였다. 내가 그때 전노협 재정사업에서 구입한 '할로겐레인지'를 집에서 사용할 때마다 당시 이석행 사무차장이 동분서주 하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전노협 이후 나는 이석행 위원장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가 1995년 전국자동차산업연맹 부위원장, 1998년 금속산업연맹 부위원장, 2004년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치열하게 살아온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봐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민주노총 위원장이 되기 전인 2006년 70민년대민주노동자회 모임 때나 등산대회 때 그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선배 노동자들을 위해 운전도 해주고 사진도 찍어주면서 젊은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숨겨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즉 그의 사진 찍기, 시를 비롯 글쓰기 등에서 엿볼 수 있는 감성이 풍부한 운동가라는 것이다. 나는 그가 쓴 글의 완성도가 어떻다는 것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운동을 저렇게 끈질기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그의 그 풍부한 감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해 본다.

노동운동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전태일처럼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전태일 수기에서)라고 할지 모르겠다. 이석행 위원장이 망향휴게소노조간부들이 다녀가고 난 뒤 마음이 짠해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 모습에서 전태일의 모습을 보았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는 이석행 위원장수배 중에도 블로그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이석행 민주노총위원장 ⓒ 민종덕


- 반독재 국민전선을 제안하던데, 그런 제안을 하게 된 배경과 내용은?

"이명박 정권한테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한나라당 정권은 자유선진당까지 합치면 의회권력까지 독식, 싹쓸이한 정권입니다. 이런 속에서 저들의 반역사적 탄압은 계속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진영은 각계약진해 봐야 이명박 정권의 쓰나미 탄압에 맞서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2010년 지자체선거까지 보수진영이 싹쓸이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진보진영은 설 땅이 없게 됩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진보진영이 살아  남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기층운동이 중심이 되어 크게 전선을 치자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전선은 선진운동가 위주로 기층운동이 들러리로 선 것인데 이제는 기층운동이 중심이 되어 대중투쟁으로 보수진영의 반동을 막아내야 합니다. 지금 미국의 금융자본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소리지요.

올 연말쯤에서는 더욱 가속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반제국주의 전선을 따로 치고 반독재 반파쇼 양심세력이 하나로 결집해서 대응해야 합니다. 여기에 민주노총과 같은 기층 대중조직이 중심이 되어 투쟁하자는 것입니다."

- 시민사회 진보진영에서의 반응은?
"그동안 이러한 문제인식을 가지고 3~4차례 회의를 했습니다. 시국회의를 거치고 준비위를  발족하기로 하고 차근차근 진행되어가고 있습니다."

찻집에서 30분 가량 얘기하는데 그동안에도 여러 단체 사람들이 이석행 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천막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 계속 오고 있다. 서둘러 찻집을 나와 천막 농성장으로 바삐 들어가는 그의 어깨에 이 시대의 무게가 걸려있는 듯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