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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휴대전화에 소 울음소리 넣어드렸습니다'

서정홍 시인의 동시집 '닳지 않는 손'을 읽고

등록|2008.10.12 15:36 수정|2008.10.12 15:36
요즘 가을이라서 그런지 손에 책을 들고 퇴근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직장에서 집까지 걸어서 불과 십분 거리인데도 책에 눈을 팔다보면 사오십 분이 넘게 걸릴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날이지요. 

▲ 서정홍 시인의 동시집'닳지 않는 손' 표지 ⓒ 우리교육 홈페이지


퇴근하고 

학교 교정을 빠져나가다가  

세 걸음 내딛고
우뚝 서서 시 한 편 읽고
세 걸음 내딛고
우뚝 서서 시 한 편 읽고

삼보일배로 시를 읽다

이내 어둠이 내리고
눈 맑던 아이가 노인이 되듯
가을, 저만치 깊어가다

궁리하고 있는 것들을
다 놓아도 될 성 싶다.

-졸시, ‘삼보일배로 시를 읽다’ 전문


이날 학교 교정에서 읽은 시는 서정홍 시인의 동시집 <닳지 않는 손>(우리교육)에 수록된 동시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폈습니다. 조금은 얕잡아봤다고나 할까요? 서정홍 시인이 사는 모습만큼이나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것쯤은 물론 알고 있었지요. 문제는 동시라는 장르였습니다.  

어린이들의 심리를 바탕으로 어른들이 어린이를 위해 쓴 시를 동시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어린이가 쓴 시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어른이 쓴 것만을 가리키지요. 그런데 어린이가 썼든, 어른이 썼든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소박한 감정을 담아내야하기 때문에 어른들이 읽기에는 조금은 싱거운 구석이 있기도 하지요. 결국 그런 통념이 깨진 셈이지만 말입니다.      

어머니는 
연속극 보다가도 울고
뉴스 듣다가도 울고
책을 읽다가도 울고

내가 말을 잘 안 듣고
애먹일 때도 울고
시집 간 정숙이 이모가 보낸
편지를 읽다가 울고
혼자 사는 갓골 할머니
많이 아프다고 울고

그러나 
어머니 때문에는
울지 않습니다.
-동시, ‘어머니’ 전문


긴 장마철에
제 마음대로 쑥쑥 자란
논두렁 풀을
아버지 혼자서 베고 있습니다.

학교 마치고 돌아온 나는
더워서 꼼짝달싹하기도 싫습니다.

따가운 여름 햇살은
아버지 따라다니고
더워서 너무 더워서
잠자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일어설 줄 모릅니다.    
-동시, ‘여름’ 전문        
   
퇴근하고 학교 운동장을 빠져나오면서 열서너 편의 시를 연달아 읽었습니다. 삼보일배하듯 겨우 세 걸음 내 딛고 우뚝 선 채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하교하던 아이들이 저를 흘끔 흘끔 바라보았지요. 어떤 아이는 불쑥 고개를 내밀고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읽어준 시입니다.

점심밥 먹는 둥 마는 둥
바쁘게 산밭에 가서
어둑어둑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돌아온 어머니

“야야, 오늘 피곤하다.
말도 시키지 말라.”

말하기도 귀찮은 어머니

‘어머니,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몇 번이나 속에서 말이 나왔지만
쏙 들어가고, 쏙 들어갔습니다.

씻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
금세 잠이든 어머니 머리맡에
빨간 카네이션도 잠들었습니다.
-동시, ‘어버이 날’ 전문

시를 다 읽고 나자 아이는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스쿨버스를 타야한다고 급히 달려갔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시집으로 눈을 돌리는데 날이 어둑해진 탓인지 노안 때문인지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둠을 헤집고 너덧 편을 더 읽었습니다.

지리산 깊은 산골 마을에서
농사짓고 사시던 할아버지
깊은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 혼자 남겨 두고서.

아버지는 할머니한데
자꾸만 자꾸만 함께 살자 하시고
할머니는 할아버지 무덤 바라보며
산골 마을에서 혼자 살겠다고 하시고……

끝내 할머니 고집 꺾지 못한 아버지는
할머니 혼자 쓸쓸하다고
휴대전화를 사 드렸습니다.

나는 할머니 휴대전화에
소 울음소리를 넣어 드렸습니다.

소처럼 눈이 큰 할아버지
보고 싶을 때마다 울어 달라고.

음매에헤 음매에해
음매에헤 음매에해.
-동시, ‘보고 싶을 때마다’ 전문

날마다 논밭에서 일하는
아버지, 어머니 손.

무슨 물건이든
쓰면 쓸수록
닳고 작아지는 법인데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도 닳고
쇠로 만든
괭이와 호미도 닳는데
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

나무보다 쇠보다 강한
아버지, 어머니 손.
-동시, ‘닳지 않는 손’ 전문

서정홍 시인은 농부입니다. 농부로 바쁘게 살면서도 글쓰기에 힘을 기울여 마창노련 문학상(1990년)과 전태일 문학상(1992년)을 받았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일하는 사람 귀한 줄 알고, 스스로 가난하게 살아야만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산골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강아지 똥 학교’를 열어 농촌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하네요. 

이번 시집 발문을 써주신 김제곤(어린이 문학평론가) 선생님은 그의 시를 ‘목숨 있는 것들을 정말 진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그려낼 수 없는, 공기와도 같고 물과 흙과도 같은 시’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또한, ‘서정홍 선생이 기른 고추나 감자, 배추가 밥상에 올라 우리의 목숨을 이어주듯 선생이 쓴 시들은 우리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는 양식이 됩니다. 서정홍 선생이 쓴 시를 보면 농사를 짓거나 시를 쓰는 일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라고도 얘기합니다.

“인교야, 덥제?
농사 가운데 고추농사가
일이 제일 많다 아이가.
그라고 다 자란 고추는 따 가지고
바로 햇볕에 내놓으마 안 된데이.
그늘에다 하루 이틀쯤 숨을 죽이가꼬
햇볕에 말려야 되는 기라.“

다 자란 자식들도
엄마 품을 갑자기 떠나면
몸과 마음이 병들기 쉽듯이,
엄마 품에서 떨어진 고추를
햇볕에 갑자기 말리면
불에 덴 것처럼 된다는 할머니.

고추를 따면서
나는 또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동시, ‘고추를 따면서’ 전문

서정홍 시인의 동시집 <닳지 않는 손>을 많은 아이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는 성적지상주의 풍토로 인해 학교교육이 방치하고 있는 생명존엄과 이웃사랑의 가치를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풍부하게 일깨워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 개개인이 행복해지는 길이기도 하지요.

삼보일배로 시를 읽던 그날 제가 깨달은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궁리를 하지 않아도 한 권의 시집과 지금 우리 앞에 당도한 가을이라는 아름다운 선물만으로도 한 계절 넉넉히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시인이 할머니의 음성으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처럼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만 있다면.  
      
지금은 남아도는 게 쌀이지만
할머니 어렸을 때는 쌀이 참 귀했어.
쌀밥 한 숟가락 먹는 게 소원이었지.
만날 먹는 꽁보리밥 얼마나 질렸겠어.
집에 쌀이 조금 남아 있는 사람은
이웃이 볼까 미안해서 몰래 밥을 해 먹었지.
지은 죄도 없는데 말이야.

쌀이 귀했으니 고기는 얼마나 귀했겠어.
가끔 집안 제사 들어 고기 삶을 때.
삶는 냄새 담 넘어갈까 봐 걱정을 했지.
가난한 이웃들과
나눠 먹을 게 없으니까 마음이 아팠던 거야.

그때는 말이야.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지.
참 아름다운 시절이었어.
-동시, 옛날이야기3(아름다운 시절)
덧붙이는 글 <동시집 닳지 않는 손>/(주)우리교육/서정홍(글쓴이), 윤봉선(그린이)/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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