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불러주던 잔디밭도, 첫사랑도 간데없네
김광석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과 함께 다가온 그 가을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학교일이라면 뭐든지 끼어보고 싶었던 대학 새내기 때, 단과대 가을축제 준비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다른 과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좋은 추억도 만들 수 있다는 한 학번 위 선배의 꼬임에 저는 얼른 가서 지원했지요.
국문과, 사학과, 철학과, 영문과, 불문과…. 톡톡 튀는 개성의 친구들과 함께 축제 진행도 기획하고, 홍보 내용도 구성하며 축제를 준비하던 초가을의 나날들은 그렇게 잘도 흘러갔습니다. 친절하고 유쾌한 친구들 사이에서 마냥 즐거웠거든요.
그 친구들 중 한 명은 저에게 조금 더 특별했어요. 작은 키에 미남형도 아닌 외모가 처음에는 눈에 띄지도 않다가, 축제 준비로 한 달 넘게 매일 만나다보니 제게 살갑게 구는 그 친구가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지요.
준비 모임이 끝날 때마다 꼭 이어지는 뒤풀이도 제게는 곧 축제 같았어요. 과방이며 술집이며 노래방을 오가며 신나게 놀러다니다 보면 언제나 그 친구의 노래솜씨가 발휘되었답니다. 노래를 유달리 잘하는 그 친구가 한 곡조 뽑을 때면 넋을 잃고 쳐다보면서 내 친구인 걸 뿌듯해했어요.
그 아이는 뒤풀이가 끝나고 밤 늦게 집에 들어갈 때면 집이 먼 저를 위해 잘 들어갔는지 꼭 연락하는 그런 착한 친구였지요. 그 아이와 학교 이야기부터 옛 이성친구 이야기, 집안 이야기 하던 저는, 이렇게 잘 통하고 마음을 털어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마냥 기뻤어요.
이 친구를 만날 때의 '기쁨'이 단지 우정일까, 아니면 좋아하는 것일까 가끔 갸우뚱할 때에도 '그냥 정말 편한 친구'라고 여겼지요. 그렇게 축제 준비 과정이 끝나고, 드디어 본격적인 축제기간이 시작됐습니다.
그동안의 준비가 아깝지 않게 우리는 열정을 다해 축제를 만들어갔어요. 그렇게 일주일의 축제를 온몸을 다해 즐기고, 축제의 꽃인 대동제의 날 학교 뒷동산의 잔디밭에서 준비단의 노고와 성과를 자축하며 뒤풀이를 했어요.
사람들이 점점 취해 뒤풀이 판이 우왕좌왕해질 무렵, 그 친구와 저는 잔디밭 한복판에 대자로 드러누워 하늘의 별을 구경했습니다. 취기가 살살 올라오는 상태에서 뻥 뚫린 칠흑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꿈인 듯도 했지요.
"야, 노래 불러주라."
"뜬금없이 무슨 노래야."
"아무 노래나 불러줘."
"…그래, 그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불러줄게."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김광석
그녀의 웃는 모습은 활짝핀 목련꽃 같아
그녀만 바라보면 언제나 따뜻한 봄날이었지
그녀가 처음 울던날 난 너무 깜짝 놀랐네
그녀의 고운 얼굴 가득히 눈물로 얼룩이 졌네
아무리 괴로워도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 흘리던날
온세상 한꺼번에 무너지는듯 내가슴 답답했는데
이제 더 볼수가 없네 그녀의 웃는 모습을
그녀가 처음으로 울던날 내곁을 떠나버렸네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와 얼굴을 스치는 그 잔디밭에서 눈을 감은 채 그 노래를 들으며 제 마음 속에 자리한 것은 두 가지 생각뿐이었어요. '이 친구가 부르는 노랫속의 '그녀'가 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이 친구를 좋아하고 있구나'.
그렇게 가을밤은 깊어가고, 숙취를 이기지 못해 다음날 아침은 조금 힘들었지만 어쨌든 축제 후의 학교생활도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다만 저는 그 친구가 '친구'가 아닌 어떤 관계가 되는 것에 막연한 겁이 나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지요.
말을 할까, 하지 말까, 하는 게 더 좋을까, 안 하는 게 나을까 고민만 하다가 시간은 지나갔던 거죠. 결국 이렇게 좋은 사람이 멀리 가지 말고 그냥 내 옆에 계속 있어주기만 해도 좋겠다, 싶어서.
그렇게 늦가을도 끝이 나고 겨울이 찾아오고 그 다음해 봄이 됐을 무렵, 이 친구가 저에게 호감가는 사람이 생겼다며 이야기를 했어요. 둘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연애상담을 하던 차에 잠시 화장실을 간다고 나갔다 온 이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어요.
"야, 너 내가 너 좋아했던 거 아냐."
"…그래? 나도 너 좋아했는데? 크크큭."
"그랬냐? 하하, 난 고백할까 하다가 포기했는데."
"나도 그냥 말 안 하고 있었지. 이런 식으로 말 하게 될 줄이야."
얼떨결에 고백을 받고, 또 고백을 해버리고,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럼에도 그렇게 웃으면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다가 집으로 헤어졌지요. 그리고, 한참이나 두근거리는 마음 때문에 여전히 제가 그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럼에도 더더욱 진심을 말하기는 어려워졌다는 것도요.
제 첫사랑은 여기까지에요. 이런저런 일들도 조금씩 멀어진 그 친구와는 관계가 소원해진 지 오래입니다. 그 친구가 제게 김광석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불러주던 그 잔디밭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지하캠퍼스가 들어섰어요. 2008년 가을, 그 잔디밭도 첫사랑도 제게는 가슴 속에만 남아있네요.
국문과, 사학과, 철학과, 영문과, 불문과…. 톡톡 튀는 개성의 친구들과 함께 축제 진행도 기획하고, 홍보 내용도 구성하며 축제를 준비하던 초가을의 나날들은 그렇게 잘도 흘러갔습니다. 친절하고 유쾌한 친구들 사이에서 마냥 즐거웠거든요.
준비 모임이 끝날 때마다 꼭 이어지는 뒤풀이도 제게는 곧 축제 같았어요. 과방이며 술집이며 노래방을 오가며 신나게 놀러다니다 보면 언제나 그 친구의 노래솜씨가 발휘되었답니다. 노래를 유달리 잘하는 그 친구가 한 곡조 뽑을 때면 넋을 잃고 쳐다보면서 내 친구인 걸 뿌듯해했어요.
그 아이는 뒤풀이가 끝나고 밤 늦게 집에 들어갈 때면 집이 먼 저를 위해 잘 들어갔는지 꼭 연락하는 그런 착한 친구였지요. 그 아이와 학교 이야기부터 옛 이성친구 이야기, 집안 이야기 하던 저는, 이렇게 잘 통하고 마음을 털어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마냥 기뻤어요.
이 친구를 만날 때의 '기쁨'이 단지 우정일까, 아니면 좋아하는 것일까 가끔 갸우뚱할 때에도 '그냥 정말 편한 친구'라고 여겼지요. 그렇게 축제 준비 과정이 끝나고, 드디어 본격적인 축제기간이 시작됐습니다.
그동안의 준비가 아깝지 않게 우리는 열정을 다해 축제를 만들어갔어요. 그렇게 일주일의 축제를 온몸을 다해 즐기고, 축제의 꽃인 대동제의 날 학교 뒷동산의 잔디밭에서 준비단의 노고와 성과를 자축하며 뒤풀이를 했어요.
사람들이 점점 취해 뒤풀이 판이 우왕좌왕해질 무렵, 그 친구와 저는 잔디밭 한복판에 대자로 드러누워 하늘의 별을 구경했습니다. 취기가 살살 올라오는 상태에서 뻥 뚫린 칠흑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일은 꿈인 듯도 했지요.
"야, 노래 불러주라."
"뜬금없이 무슨 노래야."
"아무 노래나 불러줘."
"…그래, 그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불러줄게."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김광석
그녀의 웃는 모습은 활짝핀 목련꽃 같아
그녀만 바라보면 언제나 따뜻한 봄날이었지
그녀가 처음 울던날 난 너무 깜짝 놀랐네
그녀의 고운 얼굴 가득히 눈물로 얼룩이 졌네
아무리 괴로워도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 흘리던날
온세상 한꺼번에 무너지는듯 내가슴 답답했는데
이제 더 볼수가 없네 그녀의 웃는 모습을
그녀가 처음으로 울던날 내곁을 떠나버렸네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와 얼굴을 스치는 그 잔디밭에서 눈을 감은 채 그 노래를 들으며 제 마음 속에 자리한 것은 두 가지 생각뿐이었어요. '이 친구가 부르는 노랫속의 '그녀'가 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이 친구를 좋아하고 있구나'.
그렇게 가을밤은 깊어가고, 숙취를 이기지 못해 다음날 아침은 조금 힘들었지만 어쨌든 축제 후의 학교생활도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다만 저는 그 친구가 '친구'가 아닌 어떤 관계가 되는 것에 막연한 겁이 나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지요.
말을 할까, 하지 말까, 하는 게 더 좋을까, 안 하는 게 나을까 고민만 하다가 시간은 지나갔던 거죠. 결국 이렇게 좋은 사람이 멀리 가지 말고 그냥 내 옆에 계속 있어주기만 해도 좋겠다, 싶어서.
그렇게 늦가을도 끝이 나고 겨울이 찾아오고 그 다음해 봄이 됐을 무렵, 이 친구가 저에게 호감가는 사람이 생겼다며 이야기를 했어요. 둘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연애상담을 하던 차에 잠시 화장실을 간다고 나갔다 온 이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말했어요.
"야, 너 내가 너 좋아했던 거 아냐."
"…그래? 나도 너 좋아했는데? 크크큭."
"그랬냐? 하하, 난 고백할까 하다가 포기했는데."
"나도 그냥 말 안 하고 있었지. 이런 식으로 말 하게 될 줄이야."
얼떨결에 고백을 받고, 또 고백을 해버리고,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럼에도 그렇게 웃으면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다가 집으로 헤어졌지요. 그리고, 한참이나 두근거리는 마음 때문에 여전히 제가 그 친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럼에도 더더욱 진심을 말하기는 어려워졌다는 것도요.
제 첫사랑은 여기까지에요. 이런저런 일들도 조금씩 멀어진 그 친구와는 관계가 소원해진 지 오래입니다. 그 친구가 제게 김광석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불러주던 그 잔디밭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지하캠퍼스가 들어섰어요. 2008년 가을, 그 잔디밭도 첫사랑도 제게는 가슴 속에만 남아있네요.
덧붙이는 글
<나의 가을 노래> 공모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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