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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곰도 어슬렁, 하늘아래 첫동네

지리산 문수리·심원마을 사람들, 사진으로 만나다

등록|2008.10.15 09:30 수정|2008.10.15 09:30

▲ 근대화와 함께 변화된 농촌은 주거환경에서부터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의 농촌은 흥겨움의 일손과 함께 이웃의 정이 넘쳐나는 풍요로왔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라는 새마을 구호 아래 정겹고 아름다웠던 시골의 온정은 사라지고, 도시화에 따른 이농현상으로 마당은 잡풀로 뒤엉켰다. 농촌의 삶이 힘들고 고되다. ⓒ 주영기


"햇살이 눈부시게 쬐인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뒤뜰에 봄을 재촉하는 기운이 솟아난다. 뒤뜰 큰나무가지에 깍깍거리는 까치들이 땅에 뿌린 씨앗을 먹을까 하얀 비닐로 커텐을 치듯이 막을 쳐놓았다. 식구가 없어 초라한 장독 서너개만 덜렁 놓인 것이 어쩐지 내 마음을 시리게 한다."(강봉규 회원)

지난 봄, '고향의 빛 사진연구회(회장 라규채)' 회원들은 때때로 배고픈 곰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가끔 내려오기도 하는 지리산 깊은 산중의 문수리와 심원마을을 찾았다.

그 곳에서 밭뙤기를 일구고 한봉을 치며, 산에서 나는 나물과 약초를 채취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마을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렌즈에 담아 지난 10일부터 오는 20일까지 예술의 마을 담양 '명지원'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다. 

▲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오"라고 시인 이원규는 노래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기 전에는 다랑이 논도 풍요로운 황금물결로 넘쳐났고, 밭을 가는 어미 소 울음소리에 아장아장 뒤따르는 송아지 걸음걸이가 정겨웠다. 이제는 추억 속의 논밭으로만 남는다. 과거의 그리움과 아픈 상처들일랑 모두 지리산 속에 묻어 버렸다. ⓒ 박병준


▲ 지리산은 어머니 품속 같이 포근한 민족의 영산이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민족의 생채기를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사는 이곳 사람들의 우산과 양산이 되어 주는 산이다. 과거의 아픈 상처는 지리산 품속에 맡긴 채 뒷마당에 한봉을 치고, 텃밭에 나가 콩을 심으며, 자연을 벗 삼아 행복을 일궈가는 동갑내기 황창옥씨 부부의 아름다운 미소에서 쓰라렸던 민족의 과거 아픔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라규채


▲ 문수골로 들어서서 오른쪽 밑으로 작은 영암촌 마을이 보인다. 영암촌에도 봄이 왔다. 땅에는 뜨거운 기운이, 나뭇잎은 연녹색으로 활기를 찾고 마을 가득히 피어있는 산수유와 매화꽃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온 마을이 노란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 천지가 노랗다. 문수골 사람들의 소박함과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삶을 봄기운과 함께 카메라에 담아본다. 문수골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언제까지나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빌어본다. ⓒ 김선옥


사진 연구회 회원들이 찾은 지리산 문수골은 행정상 전남 구례군 토지면에 속하며, 빨치산과 국군의 격전지로 민족사적 아픔과 상처를 갖고 있는 곳이다.

상죽(웃대내)과 중대(영암촌), 불당과 밤재의 작은 네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 문수리는 불교에서 지혜를 주관하는 문수보살이 이 곳에서 수년간 수도하다 성불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임진왜란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문수리는 노고단~왕시루봉~형제봉을 삼각점으로 생성되었고 명당으로 꼽히는 토지면 오미리를 이웃하고 있다.

이 일대는 과거 해방과 분단을 거쳐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 여순 사건이 일어나는 1948년 10월부터 1955년 5월까지 근 7년 동안 빨치산과 경찰 토벌대의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 주민들은 오랜 삶의 터전인 이 곳을 버리고 하나둘 떠나야만 했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 마을 어귀에 노오란 산수유꽃을 바라보며 1년 농사를 시작하는 우리네 아버지들. 흘러내리는 구슬 땀방울 훔치며 밭을 일궈 감자랑 마늘이랑 심어 자식들 나눠줄 요량에 피곤함도 잊은 주름진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 송복진


▲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노파. 삶의 외로움과 슬픔이 밀려온다. 굴절된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인생, 이제는 갈무리인가... ⓒ 이상로


문수리는 노인들만이 사는 한적한 마을이다. 주민들은 밤, 한봉, 고로쇠 수액 채취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것도 요즘은 여의치 않다. 동네 곳곳에 멋지게 들어선 집들은 외지인들의 별장이다. 여름에나 가끔 주인들이 왔다 갈 뿐 평상시엔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작은 산골마을 문수리는 봄이면 마을 곳곳에 핀 산수유 꽃을 찍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모여든다. 여름엔 문수골 계곡을 찾아든 피서 인파로 북적이고, 가을엔 밤과 감을 수확하는 손길로 바쁘다. 겨울에는 가끔씩 배고픈 곰들이 마을로 찾아든다.

지리산 뱀사골 달궁마을 넘어 해발 900m 되는 곳에 있는 심원마을은 조선 고종시대 약초와 한봉을 위해 한두 호씩 모인 것이 지금에 이르렀는데 주변 수킬로미터 이내에 마을이 없어 '심원'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이곳은 지난 1988년 성삼재 관광도로가 개통되면서 '하늘아래 첫 동네'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현재는 원주민들이 떠난 땅에 타지 사람들이 들어와 관광객들을 상대로 식당(민박) 영업을 하고 있다. 약초와 한봉으로 연명하던 주민들도 민박촌 형성에 합류하면서 현재 열다섯 가구가 민박과 식당을 겸하고 있다.

▲ 21년째 지리산을 마누라 삼아, 때론 벗을 삼아 56년을 독신으로 살아온 심원 일번지 심수정 점방주인 송기홍씨. 그는 봄부터 가을까지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지리산에 올라 두릅과 엄나무, 곰취, 버섯, 고로쇠물 등을 채취하고 눈 내리는 긴긴 겨울에는 고립무원 점방에서 서각을 하며 자신만의 행복을 일구며 홀로 느리게 살고 있다. 점방 안 가득히 창출, 백출, 하수오, 당귀, 상황버섯, 삼지구엽초, 더덕 등으로 담근 약주의 향긋함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감옥에 갇혀 사는 나에게 자연으로 회귀하고픈 동경심과 마음의 평안을 안겨준다. ⓒ 이방일


▲ 지리산의 나물은 향기롭다. 산의 정기가 듬뿍 나물 속에 담겨 있다. 삶아도 김으로 허공 속에 사라지지 않는다. 아주머니의 표정과 위세마냥 더 힘차고 새로운 영양소로 업그레이드된다. 지리산 나물은 '나의 에너지'다. ⓒ 김선옥


2006년 봄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 남부사무소는 "자연환경을 복원하기 위해 마을을 철거하고, 오는 2011년까지 주민 이주 작업을 완료한다"는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밀려드는 관광객과 그들을 상대로 한 식당(민박) 영업이 계곡 오염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이에 박준영 전라남도지사는 마을 철거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전통가옥 조성'을 대체 방안 일부로 내세웠지만 새하얀 펜션 건물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심원마을의 보존은 아직 미지수로 남아있다.

백두대간의 준령을 타고 남으로 내려오다 잠시 멈춰선 지리산. 지리산이 어머니 가슴팍 같은 산처럼 느껴진다는 '고향의 빛 사진연구회' 회원인 정노삼순씨는 심원·문수골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 세월은 흘러간다. 우리의 사랑도 흐른 시간만큼 쌓여가고 여물어 간다. 벌통 위에 놓인 벽돌처럼 시간이 흐른 만큼 노년 부부의 신뢰는 단단해져 간다. 벌통 숫자만큼 남은 여생이 꿀처럼 달콤하고 향기롭게 되지 않을까. ⓒ 주영기


"지리산은 가난과 기울어 가는 가세의 한을 가슴에 묻고 내색하지 않으며 가정을 묵묵히 꾸려가는 우리네 어머니처럼 민족의 아픔 상처를 안으로 삭이며 우리들을 포근히 안아주는 산이다. 지리산 자락 하늘 닿는 곳에 자리한 심원·문수골은 아픈 역사의 모진 세파를 살아오면서도 옛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가계를 꾸려가지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우리 어머니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덧붙이는 글 다음블로그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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