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보다 좋은 우리 '상말' (44) 명약관화
[우리 말에 마음쓰기 450] ‘뻔하’고 ‘틀림없’고 ‘환하’고 ‘뚜렷하’고
.. 학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분단의 현실은 명약관화했다. 이건 무슨 학술대회가 아니라 적과 마주친 듯한 분위기였다 .. 《이유진-나는 봄꽃과 다투지 않는 국화를 사랑한다》(동아일보사,2001) 239쪽
“적과 대면(對面)한”이 아니라, 또 ‘적대적(敵對的)’이 아니라, “적과 마주친”으로 쓰니 반갑습니다. “분단(分斷)의 현실(現實)”은 “갈라진 현실”이나 “갈라져 있는 모습”으로 손질해 줍니다. ‘분위기(雰圍氣)’는 ‘느낌’으로 다듬습니다.
┌ 명약관화(明若觀火) : 불을 보듯 분명하고 뻔함
│ - 정부가 또 원군을 내려 보낼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고
│
├ 분단의 현실은 명약관화했다
│→ 분단된 현실은 불을 보듯 뻔했다
│→ 갈라진 현실은 보나 마나였다
│→ 갈라진 모습은 잘 알 수 있었다
│→ 갈라져 있는 모습은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다
│→ 서로 갈라져 있음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 …
중학교 다닐 때였나, 그때 처음으로 ‘명약관화’라는 한문을 배웠습니다. 이 말은 그냥 한자말이라기보다 한문입니다. 한문 짜임새를 알지 못한다면, 이 말을 한자로 ‘明若觀火’를 적어도 뜻을 헤아리지 못할 테니까요.
한글로 적혀 있는 ‘명약관화’를 읽어 봅니다. 한 글자 두 글자 곱씹으면서, 지난날 일을 떠올립니다. 그무렵 중학교에 다닐 때, 이 한문 ‘명약관화’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제대로 아는 동무는 아주 드물었고, 한자로 적을 줄 아는 동무는 더더욱 드물었습니다. 아마, 아무도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끽해야 한둘쯤?
요즈음 아이들은 이 한문 ‘명약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 특별활동이나 과외수업이나 한문교재 외우기를 하면서 어렵지 않게 배우고 쓰고 있는지요. 외려 한문 말짜임을 새롭게 배우면서 한문을 좀더 속깊이 알게 되었다고 기뻐하고 있는지요.
┌ 명약관화한 일이었고
│
│→ 뻔한 일이었고
│→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 마땅한 일이었고
│→ 틀림없는 일이었고
└ …
신문이고 잡지고 책이고 방송이고, 교사고 지식인이고 교수고 기자고, …… 거침없이 쓰는 수많은 한문 가운데 하나인 ‘명약관화’입니다.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많건 적건 지식 있는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건 없건 배운 이들은 거리낌없이 씁니다.
어쩌면, 이 한문을 쓰는 분들은 적잖은 사람들이 이 한문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있는 줄을 모르지 않으랴 싶습니다. 더욱이,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으면 그이가 잘못이지, 못 알아듣는 낱말을 읊조린 자기들이 잘못이라고는 조금도 못 느끼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아이들한테 이런 말을 쓰도록 해야 지식이 철철 넘치고 똑똑한 아이가 된다고 이야기할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누가 봐도 안다”라든지 “보나 마나”라든지 “잘 알 수 있다” 같은 말은 관용구 들은 국어사전에 오르지 않습니다. 그냥 ‘누구나 하는 말’이고 ‘누구나 아는 말’일 뿐입니다. ‘명약관화’ 같은 한문이나 다른 사자성어나 한자말은 바로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틀림없이 우리들은 예부터 ‘누구나 하는 말이며 누구나 아는 말로 다 이야기하고 있으나, 국어사전에 실리지 않았을 뿐인 말을 쓰고’ 있는데, 국어사전에 실릴 만한 말이 보이지 않으니 ‘우리 말로만 하면 뜻을 제대로 펼치거나 나타내 보이지 못한다’고 둘러대면서 갖가지 고사성어며 사자성어며 한문이며 가르치거 있어요. 또, 쉬운 말로 알맞춤하게 우리 말을 펼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잘했어요’, ‘참 사랑스럽게 말을 했어요’, ‘참 알맞고 곱게 말을 잘했어요’ 하고 칭찬하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교사나 부모마저 없습니다.
― 明若觀火 = 明若 + 觀火 → 분명하고 뻔함(明若) + 불을 보듯(觀火)
말이나 글을 지식으로 나누거나 주고받을 때에는 계급이 생겨서 벌어지거나 갈라진다고 느낍니다. 사람일을 돈으로 놓고 가르거나 따질 때에도 계급이 생기고요.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높고 낮음이 없다고, 어려운 말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 삶터에는 “귀천이 있”어요. 그래서 푸대접받는 사람이 있고, 고달프게 일해도 아주 낮은 일삯만 받으면서 가까스로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우리가 하는 말도 높고 낮음이란 있을 수 없고, 잘나고 못남 또한 있을 수 없으며, 지식이 많고 적음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명약관화’ 같은 한문이, 사자성어가, 고사성어가 말계급을 만듭니다. 높직한 말계급 울타리를 쌓습니다. 교사와 부모는 이 높직한 말계급 울타리 안쪽에 들어서려 하고, 지식이 낮거나 적은 말을 하는 사람하고 자기네 아이를 떼어놓으려 합니다. 되도록 겉멋이 나는 말을 펼치고, 되도록 지식이 드러나는 말을 써야 훌륭한 줄 압니다. 아이들한테도 이런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구겨넣습니다. 쑤셔넣습니다.
지금 미친바람 불듯 퍼지고 있는 논술교육이, 또 대학교입학시험이, 또 대학생이 써야 하는 논문이 모두 ‘되도록 어렵고 지식자랑이 될 수 있는 한자말과 한문과 서양말을 가득 담아서 펼쳐야 좋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잖아요. 쉽게 써도 될 말을 어려운 말로 쓰는 신문기사, 누구나 아는 말로 해도 될 말을 굳이 딱딱한 말로 읊는 방송소식, 이런 말과 글에 둘러싸인 채, 아주 머리가 어지럽고 어수선해져 버리는 우리들이, 아이들이, 사람들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불을 보듯 뻔합니다. 달을 보듯 뻔하고 해를 보듯 뻔합니다. 지금 이대로 흘러간다면, 지금 이 모습 이 꼴을 그대로 놓아 둔 채 살아간다면, 우리 삶과 삶터는 어찌 될까요. 이 땅에서 자라나며 살아갈 아이들 말과 글은, 또 이 아이들 생각과 삶은, 또 이 아이들 앞날과 그 아이들이 꾸려갈 이 나라와 겨레는 어찌 될는지요.
“적과 대면(對面)한”이 아니라, 또 ‘적대적(敵對的)’이 아니라, “적과 마주친”으로 쓰니 반갑습니다. “분단(分斷)의 현실(現實)”은 “갈라진 현실”이나 “갈라져 있는 모습”으로 손질해 줍니다. ‘분위기(雰圍氣)’는 ‘느낌’으로 다듬습니다.
│ - 정부가 또 원군을 내려 보낼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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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의 현실은 명약관화했다
│→ 분단된 현실은 불을 보듯 뻔했다
│→ 갈라진 현실은 보나 마나였다
│→ 갈라진 모습은 잘 알 수 있었다
│→ 갈라져 있는 모습은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다
│→ 서로 갈라져 있음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 …
중학교 다닐 때였나, 그때 처음으로 ‘명약관화’라는 한문을 배웠습니다. 이 말은 그냥 한자말이라기보다 한문입니다. 한문 짜임새를 알지 못한다면, 이 말을 한자로 ‘明若觀火’를 적어도 뜻을 헤아리지 못할 테니까요.
한글로 적혀 있는 ‘명약관화’를 읽어 봅니다. 한 글자 두 글자 곱씹으면서, 지난날 일을 떠올립니다. 그무렵 중학교에 다닐 때, 이 한문 ‘명약관화’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제대로 아는 동무는 아주 드물었고, 한자로 적을 줄 아는 동무는 더더욱 드물었습니다. 아마, 아무도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끽해야 한둘쯤?
요즈음 아이들은 이 한문 ‘명약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 특별활동이나 과외수업이나 한문교재 외우기를 하면서 어렵지 않게 배우고 쓰고 있는지요. 외려 한문 말짜임을 새롭게 배우면서 한문을 좀더 속깊이 알게 되었다고 기뻐하고 있는지요.
┌ 명약관화한 일이었고
│
│→ 뻔한 일이었고
│→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 마땅한 일이었고
│→ 틀림없는 일이었고
└ …
신문이고 잡지고 책이고 방송이고, 교사고 지식인이고 교수고 기자고, …… 거침없이 쓰는 수많은 한문 가운데 하나인 ‘명약관화’입니다.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많건 적건 지식 있는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건 없건 배운 이들은 거리낌없이 씁니다.
어쩌면, 이 한문을 쓰는 분들은 적잖은 사람들이 이 한문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있는 줄을 모르지 않으랴 싶습니다. 더욱이,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으면 그이가 잘못이지, 못 알아듣는 낱말을 읊조린 자기들이 잘못이라고는 조금도 못 느끼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아이들한테 이런 말을 쓰도록 해야 지식이 철철 넘치고 똑똑한 아이가 된다고 이야기할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누가 봐도 안다”라든지 “보나 마나”라든지 “잘 알 수 있다” 같은 말은 관용구 들은 국어사전에 오르지 않습니다. 그냥 ‘누구나 하는 말’이고 ‘누구나 아는 말’일 뿐입니다. ‘명약관화’ 같은 한문이나 다른 사자성어나 한자말은 바로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틀림없이 우리들은 예부터 ‘누구나 하는 말이며 누구나 아는 말로 다 이야기하고 있으나, 국어사전에 실리지 않았을 뿐인 말을 쓰고’ 있는데, 국어사전에 실릴 만한 말이 보이지 않으니 ‘우리 말로만 하면 뜻을 제대로 펼치거나 나타내 보이지 못한다’고 둘러대면서 갖가지 고사성어며 사자성어며 한문이며 가르치거 있어요. 또, 쉬운 말로 알맞춤하게 우리 말을 펼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잘했어요’, ‘참 사랑스럽게 말을 했어요’, ‘참 알맞고 곱게 말을 잘했어요’ 하고 칭찬하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교사나 부모마저 없습니다.
― 明若觀火 = 明若 + 觀火 → 분명하고 뻔함(明若) + 불을 보듯(觀火)
말이나 글을 지식으로 나누거나 주고받을 때에는 계급이 생겨서 벌어지거나 갈라진다고 느낍니다. 사람일을 돈으로 놓고 가르거나 따질 때에도 계급이 생기고요.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높고 낮음이 없다고, 어려운 말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 삶터에는 “귀천이 있”어요. 그래서 푸대접받는 사람이 있고, 고달프게 일해도 아주 낮은 일삯만 받으면서 가까스로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우리가 하는 말도 높고 낮음이란 있을 수 없고, 잘나고 못남 또한 있을 수 없으며, 지식이 많고 적음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명약관화’ 같은 한문이, 사자성어가, 고사성어가 말계급을 만듭니다. 높직한 말계급 울타리를 쌓습니다. 교사와 부모는 이 높직한 말계급 울타리 안쪽에 들어서려 하고, 지식이 낮거나 적은 말을 하는 사람하고 자기네 아이를 떼어놓으려 합니다. 되도록 겉멋이 나는 말을 펼치고, 되도록 지식이 드러나는 말을 써야 훌륭한 줄 압니다. 아이들한테도 이런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구겨넣습니다. 쑤셔넣습니다.
지금 미친바람 불듯 퍼지고 있는 논술교육이, 또 대학교입학시험이, 또 대학생이 써야 하는 논문이 모두 ‘되도록 어렵고 지식자랑이 될 수 있는 한자말과 한문과 서양말을 가득 담아서 펼쳐야 좋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잖아요. 쉽게 써도 될 말을 어려운 말로 쓰는 신문기사, 누구나 아는 말로 해도 될 말을 굳이 딱딱한 말로 읊는 방송소식, 이런 말과 글에 둘러싸인 채, 아주 머리가 어지럽고 어수선해져 버리는 우리들이, 아이들이, 사람들이 아니겠느냐 싶습니다.
불을 보듯 뻔합니다. 달을 보듯 뻔하고 해를 보듯 뻔합니다. 지금 이대로 흘러간다면, 지금 이 모습 이 꼴을 그대로 놓아 둔 채 살아간다면, 우리 삶과 삶터는 어찌 될까요. 이 땅에서 자라나며 살아갈 아이들 말과 글은, 또 이 아이들 생각과 삶은, 또 이 아이들 앞날과 그 아이들이 꾸려갈 이 나라와 겨레는 어찌 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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