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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상형문자, '동파문자'를 아시나요?

[윈난 르포 ②] 나시족 자치행정구역 '리장'

등록|2008.10.23 11:21 수정|2008.10.24 10:38

▲ 리장고성 남쪽거리에 있는 동파문자 채자벽. 동파문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쓰이는 상형문자로 유명하다. ⓒ 모종혁


구름의 남쪽 나라 윈난(雲南)성의 리장(麗江)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각광받는 관광지다. 리장은 윈난 서북부 윈구이(雲貴)고원과 칭장(靑藏) 고원의 연결부에 위치하고 평균 해발은 2400m에 달한다. 리장시와 4개 현, 69개 향진, 446개 촌으로 구성된 리장은 인구 110여 만 명이 사는 작지 않은 산악 도시다. 리장에는 예부터 소수민족의 땅으로 지금도 12개의 민족이 어울려 산다.

리장은 중국 유일의 나시(納西)족 자치행정구역이다. 2004년 현재 리장 전체 인구 가운데 나시족은 23.4만 명. 20.1만 명의 이(彝)족, 10.6만 명의 리수(傈僳)족 등 여타 소수민족도 적지 않지만, 나시족은 리장고성(古城)에 집중 거주하여 리장을 나시족의 땅으로 각인시켰다.

리장고성은 쓰촨 랑중(閬中), 산시(山西) 핑야오(平遙), 안후이(安徽) 서센(歙縣) 등과 더불어 중국정부가 지정한 중국 4대 고성이다. 해발 5596m인 옥룡설산(玉龍雪山)과 함께 리장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거대한 수차가 있는 입구를 거쳐 리장고성 안에 들어서면 줄지어 서있는 기와집과 거미줄 같은 골목 및 수로가 눈앞에 펼쳐진다. 긴 세월의 정취가 담겨져 있는 돌길, 기품 있는 나시족 전통의 기와집,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길, 깨끗한 수로 속에 사는 금붕어떼…. 기와집 안에는 다양한 소수민족의 삶과 문화가 깃든 전통 공예품을 파는 상점과 특색 있는 카페가 관광객의 눈길을 이끈다.

오랫동안 세인이 주목하지 않았던 리장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 1996년 2월. 진도 7의 초대형 지진으로 사망 293명 중상 3700명의 인명피해와 수많은 건물이 붕괴된 대참사가 일어났었다. 지진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중국 중앙정부와 해외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은 리장의 매력에 주목했다.

리장고성 내 쇠못을 사용하지 않은 수백 년 된 목조 기와집은 70% 이상 말짱했다. 기둥과 대들보를 사개맞춤식으로 결합한 나시족의 전통 건축양식이 지진의 충격을 잘 흡수했기 때문. 고성 구석구석까지 이어진 골목과 수로는 자연친화적이고 치밀하게 조성된 도시 계획의 완결판이었다.

▲ 층층이 겹쳐진 나시족 전통 기와집, 그 사이를 미로처럼 굽이굽이 놓여 있는 골목과 수로는 중국 고대 건축미학과 도시계획의 활화석이다. ⓒ 모종혁


▲ 리장고성 내 모든 상점 간판은 위로는 동파문자, 아래는 한자로 써져 있다. ⓒ 모종혁


독자적인 언어·문자·종교·문화 간직한 소수민족 나시족

1997년 12월 리장고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지진에서 살아남은 고대 건축미학과 도시계획의 완벽한 보존 상태는 세계문화유산 등록의 원동력이었지만, 더 중요한 비결은 따로 있었다.

바로 리장의 주류 민족인 나시족의 독특한 문화와 생활풍속 때문이었다. 나시족은 2000년 현재 총인구 31만 명으로, 중국 내에서도 크지 않은 소수민족이다. 오늘날 나시족 대부분은 리장을 중심으로 윈난성 서북부에 정주해 살고 있다.

본래 나시족은 간쑤(甘肅)성과 칭하이(靑海)성 일대에 살던 티베트계 유목민족이었다. 인구수가 많지 않아 강대한 주변 민족의 눈치를 봐야 했던 나시족은 9세기부터 생존을 위한 엑소더스를 감행했다. 나시족은 11세기 초 쓰촨성을 거쳐 윈난성에 진입하여 송말 원초에야 바오산(寶山)을 거쳐 리장에 정착했다. 초창기 슈에중(雪崇)과 바이샤(白沙)에 살던 나시족은 입지가 더 좋은 분지로 지금의 리장고성인 다옌전(大硏鎭)에 정착, 도시를 건설한다.

북방의 목초지에서 남쪽 나라의 리장으로 이주한 뒤 나시족의 발전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13세기에는 대리국을 정벌하려는 몽골군의 침략을 받아 2세기 동안 쌓아 올린 재부를 모두 약탈 당했다. 18세기 청나라의 중앙통치를 직접 받으면서는 자치적인 민족토호정권이 붕괴되기도 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의 10년 광풍은 더욱 혹독해, '남녀 모두 양가죽을 걸치는'(男女皆披羊皮) 유목민족 특유의 복식문화와 독자적인 생활풍습을 금지 당했다.

오랜 세월 동안 부침이 있었지만 나시족은 자신만의 문화와 풍속은 고집스레 잘 지켜왔다. 나시족은 티베트·강(羌)어계에 속하는 언어, 뜻과 음을 있는 상형문자인 동파(東巴)문자, 동파라는 사제가 주관하는 샤머니즘 원시종교인 동파교, 기본음계의 악보와 나시족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나시고악(納西古樂) 등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 한족을 제외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독자적인 언어·문자·종교·문화·예술을 보존한 소수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 리장박물관에 전시된 동파교 역법표. 나시족은 동파문자로 종교에 관한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 모종혁


고대 나시족 문명을 보여주는 종합 백과사전 동파경

동파문자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시족은 기원전부터 만물의 형상을 그대로 그려 기록했다. 나무를 나무로, 돌을 돌로 그린 나시족의 문자는 뜻과 음을 겸비한 상형문자로 그 수를 꾸준히 늘려왔다.

북방에서 남쪽으로 민족의 대이동을 거쳐 완성된 동파문자는 오늘날 1400여 개 글자가 확인되고 있다. 문자수는 많지 않지만, 동파문자는 단어가 풍부해 인간의 세세한 감정뿐만 아니라 복잡한 사건의 기술, 시와 문학까지 표현할 수 있었다.

동파문자는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나 중국 은나라 갑골문자보다 더욱 원시적이어서 현대적인 그래픽 부호를 연상케 한다. 대담한 과장과 생략, 요약 등의 기법으로 생동감 있는 표현이 특징이다. 동파문자는 한자 '고'(苦)를 입으로 검은 물체를 밖으로 내뱉고 있는 모습을, 한자 '행복'(幸福)을 남녀가 함께 춤을 추고 기뻐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인간의 희로애락, 선과 악, 온갖 사물에 대한 관점을 원시적인 관념으로 고스란히 기록한 것이다.

나시족은 동파문자를 이용해 신화전설, 종교의례, 천문역법, 민속풍습, 의학 등을 기록한 동파경을 남겼다. 오늘날 확인된 동파경의 수는 무려 1만4000여 권. 전통적인 제조기법으로 만들어진 종이와 목판으로 남겨진 놀라운 기록물이다.

동파경에는 우주와 인생에 대한 고뇌, 하늘과 땅, 현세와 내세에 대한 탐색, 세상의 진리 등 철학적인 문제에서부터 하늘, 달, 산천, 새와 귀신, 물고기와 곤충 등 순박한 소재까지 가득 채워져 있다. 그야말로 동파경은 고대 나시족의 문명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종합 백과사전과 같다.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세상에 처음 알려진 동파문자는 서양인들이 리장을 주목한 계기가 됐다. 1907년과 1909년 리장을 찾았던 프랑스 파커 교수는 1913년 서구세계 최초로 동파문자를 체계적으로 소개한 책을 발간했다. 1922년 식물 채집을 위해 리장에 온 미국인 루크는 동파문자에 심취하여 27년 동안 리장에 머물며 동파경 연구에 매달렸다. 루크가 쓴 <나시어·영어백과사전>과 <살아있는 상형문자 동파경>은 동파문자 연구의 백미로 꼽힌다.

▲ 동파경이 걸려 있는 한 전통 종이공방. 나시족은 지금도 닥나무 껍질을 이용해 전통제조방식으로 종이를 만들어 사용한다. ⓒ 모종혁


▲ 한 여성 관광객이 산 전통종이에 동파문자를 써주는 동파. 동파교의 사제였던 동파는 오늘날 종이공방에 고용되어 동파문자를 써주며 살아가고 있다. ⓒ 모종혁


관광상품으로 변질되어 소멸 중인 지구 최후의 상형문자

동파문자는 학자들에게만 연구되고 체계화된 것은 아니었다. 동파교 사제인 동파와 일부 나시족 지식인은 '살아있는 상형문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금세기까지 동파문자를 써왔다.

리시(李錫) 리장민속박물관 관장은 "동파라면 누구나 동파문자를 쓰고 읽는 교육을 먼저 받는다"며 "나시족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인문 소양의 기본 척도로 동파경을 쓰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2003년 동파문자와 동파경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데에는 이러한 저력이 바탕에 깔려져 있다.

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온 동파문자지만, 지난 10여 년간 지속된 리장의 상업화와 나시족의 한족화는 동파문자를 풍전등화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원시종교인 동파교는 더 이상 나시족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동파교 사제인 동파는 찾는 이가 없어 밥벌이를 위해 혹독한 생활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나시족 전통제조방식으로 종이를 만드는 공방에 고용되어 관광객에게 동파문자를 써주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 오늘날 신원이 확인된 50여 명의 동파 대다수는 종이공방에 고용되어 살아가고 있다.

동파종이방에서 일하는 허즈홍(60)도 다른 동파들과 같은 신세다. 허는 "문화대혁명 이전까지는 동파교를 믿는 나시족 사람이 적지 않았다"면서 "문혁 시기 홍위병에 의한 가혹한 탄압에다 개혁개방 후 이래저래 들어온 타 종교로 지금은 동파교를 믿는 사람이 없다"고 회고했다. 어릴 때부터 종교의례를 배우며 사제가 됐다는 허는 "요즘은 그나마 동파문자를 써주며 입에 풀칠을 하니 다행"이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리장 지방정부도 세계 유일의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 부심하고 있다. 리장고성 내 모든 안내판과 상점 간판은 동파문자로 쓰도록 하고 일부 학교를 선정해 동파문자를 학생들에게 강습토록 하고 있다. 동파문자를 이용해서 공예품 제작이나 티셔츠, 수건, 머플러 등 장식에도 점차 사용되고 있다.

생활의 문자로 나시족의 정신세계와 감정을 표현했던 동파문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지구상에 살아남은 최후의 상형문자였던 동파문자는 리장의 무분별한 상업화와 한족화로 화석과 같은 관광상품으로만 남게 되었다.

▲ 리장고성 입구에 있는 소원 나무판. 관광객은 자신의 소원을 동파문자로 나무판에 적어 메달아 놓으면 흩날리는 방울소리를 통해 날려 보낸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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