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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전 한 묵언자의 동양 탐색

후지와라 신야 ‘동양기행’ 출간... 생생한 여행과 사진이 주는 여운

등록|2008.11.03 17:10 수정|2008.11.03 17:10

동양기행 표지후지와라 신야의 이 책은 1982년 출간된 판본을 번역했다 ⓒ 청아람미디어


1993년 출간된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방랑’은 인도나 티베트를 꿈꾸는 여행자들에게 가장 훌륭한 묵언을 주는 책이었다. 이후 법정 스님의 ‘인도기행’ 등이 출간됐지만, 후지와라의 책이 인도 여행자들의 정신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후지와라의 책에는 마치 외계에서 온 사람이 쓴 글인 양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했다.

오랜만에 출간된 그의 책 ‘동양기행’(청어람미디어 간)을 들었다. 책을 들고 난 후 읽기 시작한다. 느낌은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와는 동떨어진 세계에서 사는 낯선 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원인은 낯선 지명을 들어야 하는 것도 있지만 관념적인 단어들의 반복, 사고의 비약 등이 심하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반쯤은 부드러운 재질로 된 빵이나 아예 반쯤은 소화된 것들에 익숙해져 있기에 마치 식빵처럼 밋밋한 맛을 버틸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책을 든 이상 계속해서 책을 읽어간다. 그런데 얼마를 넘기면서 책은 서서히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가 내뱉는 관념적인 단어들은 때론 소화되지 않은 요소들이겠지만 이 식빵을 만든 이의 생생한 느낌이 다가오는 것 같아서 책 읽기가 낯설지 않게 된다. 

사실 나에게 여행은 휴식의 한 단어로 편안히 쉴 수 있는 파라솔과 푹신한 침대, 낯설지 않은 향의 음식들이 중심이었다. 내가 펴낸 책들도 그런 화려한 중국의 경관들이 중심 구조를 이룬다.

하지만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은 마치 소나 돼지를 잡는 푸줏간을 지나는 듯한 경외감이 있다. 때로는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음식들에 길들어 보고, 조금만 어긋나면 죽음밖에 없는 티베트의 사원을 찾아간다. 미술학도답게 그의 글에는 이미지의 심상이 담겨 있다. 사진 역시 그 본래의 전달 방식보다는 그림에 가까운 것들이 주조를 이룬다. 낯선 중앙아시아와 인도, 티베트, 태국, 상하이, 홍콩을 거친 여행자는 한국을 여행한 후 일본으로 들어간다.

한국에서 작가의 여행시기가 1981년이라는 것을 알았다. “광주에서 지난해 폭동”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작가의 여행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이다. 지역에 따라 큰 변화가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 티베트는 철도가 놓여 외지인들이 점령한 땅이 됐고, 감시인이 따라 붙던 상하이는 이제 완벽한 국제 도시로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한국 역시 그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여행 정보, 그리고 개성과 감각으로 채워진 여행서들이 분주한 이 시기에 27년 전 한 일본인 여행가의 느린 여행이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기자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리 여행 인프라가 좋아지고, 교통이 빨라져도 채워주지 못하는 여행의 감동이 이 책에는 있다. 톱밥을 으깬 것 같은 음식에 적응하고, 가장 저렴한 숙박시설을 찾아서 고행같은 여행을 이어가는 후지와라의 길에는 지금에 찾을 수 없는 여행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지 모른다.

작가는 인생의 막장에 선 것 같은 초라한 창녀들에게서 세상을 읽는다. 청량리에 들렀을 때 우격다짐으로 그를 잡아서 관계하려는 여인이나 새벽길 월경의 통증을 참지 못해서 신음하는 여인에게서 그는 희망을 말한다. 종교와 발전이라는 단어만이 가치가 되어버린 지금이기에 그의 글이 더 나와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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