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칼하면서도 은근하게 혀끝에 감기는 맛
[맛이 있는 풍경 53] 강원도 전통음식 '메밀국죽'
▲ 메밀국죽강원도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메밀국죽 ⓒ 이종찬
"메밀은 다섯 가지 빛깔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메밀을 청엽(푸른 잎, 동쪽), 홍경(붉은 줄기, 남쪽), 백화(흰 꽃, 서쪽), 흑실(검은 열매, 북쪽), 황근(노란 뿌리, 방향 사이) 등 다섯 가지 색을 갖춘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이라 하여 먹을거리 이상으로 몹시 귀하게 여겼다. 강원도 냄새를 맡으려면 메밀국죽을 먹어라."
강원도 정선 출신 작가 강기희(44)가 정선 오일장 먹을거리 골목에 있는 허름한 식당 2층에 앉아 막걸리 한 잔 앞에 놓고 메밀국죽을 먹으며 한 말이다. 이는 김치와 두부, 콩나물, 메밀 등을 넣고 포옥 끓인 강원도 전통음식인 메밀국죽을 먹어보지 않으면 강원도에 얽힌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아라리 고장 정선에서 맛보는 메밀국죽 맛이 다른 고장 메밀국죽 맛과 다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특히 찬바람이 슬슬 부는 늦가을 저녁, 왁자지껄한 정선 오일장터 골목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먹는 메밀국죽 맛은 칼칼하다 못해 속에서 땀까지 출출 흐르는 듯 시원하다. 요기도 하고 해장도 하는데 이만한 음식을 찾기 힘들다는 그 말이다.
▲ 정선 오일장 먹을거리 골목강원도 정선 5일장터 안 골목에 있는 메밀국죽 전문점 ⓒ 이종찬
▲ 메밀국죽2~3평 남짓한 이 집에 들어서자 주방 한 켠에 발그스레한 메밀국죽이 뽀글뽀글 끓고 있다 ⓒ 이종찬
강원도 산간지방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날까
"메밀은 주식으로 이용되는 곡물에 비해 우수한 단백질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플라보노이드 화합물인 루틴(rutin, 혈관계 질환 치료제)을 함유하고 있다. 한방에서 메밀은 이질과 대하증을 멎게 하고 해독, 창종(피부에 생기는 부스럼 병), 위장염, 대장염, 기억력 등에 좋은 건강식품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메밀은 예로부터 강원도 먹을거리라 할 정도로 강원도 산간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곡류이다. 때문에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는 메밀을 맷돌에 갈거나 절구통에 빻아 가루로 만들어 죽이나 국수, 부침개 등으로 만들어 먹었다. 강원도 산간지방 곳곳에 메밀로 만든 여러 가지 음식이 흔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메밀에 들어 있는 단백질은 밀처럼 끈적끈적한 끈기가 있지 않기 때문에 면으로 만들려면 메밀가루에 밀가루를 조금 섞어서 반죽해야 차지게 된다. 메밀국수를 만들 때 밀가루를 약간 섞는 것도 이 때문이다. 껍질을 벗기지 않고 빻은 메밀가루도 좋다. 메밀껍질에는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섬유질이 많아 변비에 뛰어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그렇지 않겠지만 메밀은 곡류가 아주 귀한 강원도 산간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끼니를 때워주는 중요한 먹을거리였다. 특히 재료가 그리 많이 들어가지 않고,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따끈따끈한 메밀국죽은 몹시 추운 겨울을 나는 강원도 산간지방 사람들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데워주는 살가운 음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메밀국죽 밑반찬밑반찬이라고 해 봐야 갓김치와 국물 김치, 김치, 양념간장, 송송 썬 매운 고추 한 종지뿐이다 ⓒ 이종찬
▲ 메밀부침이 집 메밀부침은 메밀가루 반죽을 납작납작하게 늘여 기름에 부친 뒤 배추, 김치와 함께 강원도에서 나는 여러 가지 나물을 소로 넣어 돌돌 말아 만든다 ⓒ 이종찬
메밀국죽은 강원도에서 나는 갓김치와 함께 먹어야
"우리 정선에서는 메밀국죽을 만들 때 넣는 메밀을 '넣는다' 하지 않고 '푼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메밀국죽을 만들 때 '푸는' 메밀을 '미친 X 널뛰듯이 뿌려야 제 맛이 난다'고 하지요. 한 가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메밀로 만든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강원도에서 나는 갓김치와 같이 먹어야 궁합이 맞습니다." - 강기희
1일(토) 저녁 6시. 10월 31일(금)부터 1일(토)까지 이틀 동안 강원도 정선 동면 몰운 곤드레만드레마을(한치마을) 일대에서 열리는 '2008 정선 몰운대 문학축전'에 갔다가 여러 문우들과 함께 들른 강원도 정선 5일장터 안 골목에 있는 메밀국죽 전문점. 2~3평 남짓한 이 집에 들어서자 주방 한 켠에 발그스레한 메밀국죽이 뽀글뽀글 끓고 있다.
매콤하면서도 구수하게 풍기는 메밀국죽 향이 어느새 입에 침을 가득 고이게 만든다. 식당 들머리 유리창 곁에 붙어 있는 손칼국수·만두국·콧등치기·메밀국죽·메밀부침·올챙이국수라 쓰인 차림표도 정겹다. 마치 옛 고향 시골마을에서 열리는 4일 장터에 온 듯하다.
작가 박도·시인 이승철·박선욱·유승도·손세실리아·윤일균·한복희 여사 가족 등을 포함해 일행은 모두 15명 남짓. 이 비좁은 곳에 어찌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앉을 수 있으랴 싶어 여기 저기 엉거주춤 서 있는데 작가 강기희가 2층으로 올라가자고 한다. 젊은 날 여러 가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 이 집 2층이라며.
"정선 5일장에서 메밀국죽 파는 집은 우리 집밖에 없어"
▲ 김옥련 할머니이 집 주인은 김옥련(75) 할머니다 ⓒ 이종찬
이 집 주인은 김옥련(75) 할머니다. 얼굴이 곱다. 75살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머리가 까맣고 얼굴에 주름살도 별로 없다. 이 집에서만 10년 넘게 식당을 꾸리고 있는 김 할머니는 "메밀국죽은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한 것 같지만 소화가 너무 잘 돼 돌아서면 금세 배가 고파져"라고 말한다.
2층 비좁은 다락방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자 갑자기 작가 강기희가 일어나 다락계단으로 향한다. 이 집에서는 다락 계단에 앉아 있다 음식이 올라오면 얼른 받아 들고 스스로 차려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다. 마치 어릴 때 마을에 잔치가 벌어진 날, 길게 줄을 서서 국밥 한 그릇 받아들고 뿌듯한 미소 짓던 그때 그 추억이 재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 메밀국죽엄청나게 큰 그릇에 나온 메밀국죽 ⓒ 이종찬
▲ 메밀국죽강 작가가 커다란 국자를 들고 그릇 그릇 메밀국죽을 가득 담아낸다 ⓒ 이종찬
칼칼하면서도 은근하게 혀끝에 착착 감기는 고소한 맛!
그때 "얼른 받어" 소리와 함께 강 작가가 비좁은 다락 계단에서 김 할머니가 건네주는 메밀부침과 밑반찬 서너 개 담긴 커다란 쟁반을 받아든다. 밑반찬이라고 해 봐야 갓김치와 국물 김치, 김치, 양념간장, 송송 썬 매운 고추 한 종지뿐이다. 메밀부침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 쭈욱 들이킨다.
양념간장에 찍어먹는 메밀부침 맛이 독특하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고, 고소하지도 않으면서도 뒷맛이 고소하고, 향긋한 것 같지 않으면서도 얕은 향이 혀끝에 남는, 그야말로 처음 느껴보는 희한한 맛이다. 이 집 메밀부침은 메밀가루 반죽을 납작납작하게 늘여 기름에 부친 뒤 배추, 김치와 함께 강원도에서 나는 여러 가지 나물을 소로 넣어 돌돌 말아 만든다.
이윽고 엄청나게 큰 그릇 가득 담긴, 강원도 가을노을 빛을 닮은 메밀국죽이 올라온다. 허연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게 늦가을 밤 쌀쌀한 강원도 날씨를 비웃는 듯하다. 강 작가가 커다란 국자를 들고 그릇 그릇 메밀국죽을 가득 담아낸다. 이내 방 안에 매콤하면서도 구수한 메밀국죽 향이 퍼진다.
메밀국죽 위에 송송 썰어놓은 매운 고추 조금 올려 휘이 저은 뒤 한 술 떠 입으로 가져간다. 칼칼하면서도 은근하게 혀끝에 착착 감기는 고소한 맛! 갓김치 한 조각 올려 다시 입으로 가져간다. 아삭아삭 씹히는 갓김치의 향긋한 맛과 메밀국죽이 풍기는 구수한 감칠맛이 어울려 입속에서 보리쌀알처럼 구르는 메밀을 톡톡 친다.
▲ 메밀국죽'술술 넘어 간다'는 낱말이 딱 어울린다 ⓒ 이종찬
▲ 메밀국죽오른편부터 작가 박도, 한 사람 건너 시인 윤일균, 손 세실리아, 유승도, 한복희 여사 ⓒ 이종찬
굳세게 살아가는 강원도 사람들의 대명사 '메밀국죽'
'술술 넘어 간다'는 낱말이 딱 어울린다. 가끔 떠먹는 시원한 국물 맛도 끝내준다. 그렇게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나자 이마와 목덜미에서만 땀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숙취에 시달려온 속에서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듯하다. 갑자기 온몸이 강원도 산 봉오리 위로 훨훨 날아갈 듯이 가벼워진다. 강 작가 말마따나 정말 '해장국에 딱'이다.
이 집 메밀국죽은 국물멸치와 새우를 통째 넣고 된장을 살짝 푼 뒤 메밀, 김치, 두부, 콩나물, 대파, 마늘 등 갖은 양념을 넣고 1시간 남짓 센불에 포옥 끓여 만든다. 포옥 끓이지 않으면 메밀이 제대로 퍼지지 않아 입에 넣으면 메밀이 빙빙 맴돌기만 하면서 잘 씹히지도 않고 소화도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박도 선생은 "만주에 가니까 메밀을 참 많이 심더라"라며 "메밀은 메마른 땅에서도 싹이 아주 잘 트고 생육기간이 60∼100일이기 때문에 이모작이 가능한 식물"이라고 말한다. 박 선생은 "메밀은 특히 불량환경에 적응하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굳세게 살아가는 강원도 사람들의 대명사"라고 말했다.
강 작가는 "지난 70년대 끝자락까지만 하더라도 강원도 사람들은 메밀국죽과 메밀부침을 끼니 대신 먹었다"고 설명한다. 강 작가는 "메밀국죽이나 메밀부침은 강원도가 아니면 결코 맛 볼 수 없는 음식"이라며, "강원도를 제대로 알려면 메밀국죽과 메밀부침을 강원도 막걸리와 함께 취하도록 먹어 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원도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메밀국죽. 뫼가 높아 새들도 쉬어가고,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구름도 놀다간다는 첩첩산골 강원도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서린 강원도 음식 메밀국죽. 2008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만산홍엽으로 불타고 있는 강원도 정선에 가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메밀국죽 한 그릇 맛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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