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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재활용 명함'

내 주변을 돌아보게 한 야초 스님의 명함

등록|2008.11.07 12:12 수정|2008.11.07 12:12
야초스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제가 헤이리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집을 비운 사이에 모티프원에 들렸다가 저를  기다리는 중에 저를 만나기 위해 들른 또 다른 분인 조옥희 사진가와 어울려 함께 점심을 나누고 서로 가슴에 담은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끼리 이처럼 경계를 풀고 상대에게 스스로를 내보이는 사이가 되는 모습을 목도하는 일은 제가 모티프원에서 겪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헤어질 시간에 야초스님과 조옥희 선생님은 서로 명함을 주고 받았습니다. 저는 야초스님과의 잦은 상면에도 불구하고 야초 스님이 명함을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스님의 명함에 흥미를 느껴 제게도 한 장 주실 것을 청했습니다.

스님께서 내민 명함에는 '분별심'이라는 제목과 '물음도 따짐도 부질없는 것 바람과 구름은 시비하지 않더라'는 작은 한글 붓글씨 옆에 스님의 전화번호와 불가의 이름을 친필로 쓰셨습니다(스님은 무위無爲라는 또 다른 이름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뒷장에도 궁서의 토막 난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명함은 한 한글 서예전의 도록을 재활용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스님의 아름다운 재활용 명함

ⓒ 이안수


저는 스님이 가진 모든 명함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모두 버려진 종이를 재활용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폐지함에서 주운 도록이나 담뱃갑 같은 것을 가져다 적당한 글귀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알맞은 명함 크기로 자른 다음 여백에다 꼭 필요한 정보인 이름과 휴대폰번호만을 써 명함으로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뒷면이 백지인 겨우는 각기 다른 잠언을 써넣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명함 디자인삶의 속도에 집착하는 분에게는 그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경구를, 젊음을 덧없이 소비하는 분에게는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경구가 쓰인 명함을 건넵니다. 스님에게 명함을 전하는 일은 삶의 깨달음을 전하는 일인 셈이지요. ⓒ 이안수


저는 스님의 작은 실천을 진정한 생명운동이라고 여겼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자원을 끝없이 과소비하고 있습니다. 내용보다 겉치레를 중시해서 포장을 중복하고 신문 광고비 인상을 위해 필요 이상의 부수를 인쇄한 다음 인쇄기의 매수 카운터를 통과한 새 신문을 바로 폐기장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시장의 안정을 위해 풍년이 든 배를 정부는 수확 뒤 파기하는 것을 전제로 보조금을 지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풍년에도 불구하고 그 달콤한 배즙의 맛을 올해 한 번도 보지 못한 불우한 이웃이 적지 않습니다.

이 극한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은 실행이 따르지 않는 이론을 외치는 것보다 스님 같은 작은 실천일 것입니다. 저는 스님의 명함이 지닌 몇 가지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유한한 자원의 재활용입니다. 재활용이 지속가능한 삶을 가능케 해줄 것입니다.

둘째는 개성입니다. 똑같은 디자인의 명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상대의 취향에 따라 각기 다른 디자인의 명함을 건넬 수 있습니다.

셋째는 정성입니다. 대량으로 인쇄한 명함보다 스스로 품을 들려 친필로 쓴 명함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정성을 전하는 일입니다.

넷째는 강력한 인상입니다. 명함을 건네는 것이 곧 자신을 상대에게 기억하게 하기 위한 홍보의 일환이라면 이 개성있는 명함을 받은 분은 결코 그 명함의 주인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재활용은 남이 버린 것을 줍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보듬는 일입니다.

버려진 작품 도록을 활용한 명함열번의 구호보다 한 번의 실천이 더 절실한 때입니다. ⓒ 이안수


덧붙이는 글 저의 개인 블로그(www.travelog.co.kr)에도 포스팅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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