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5)

[우리 말에 마음쓰기 470] '아린과의 중간적 존재', '중요한 존재 이유' 다듬기

등록|2008.11.08 16:05 수정|2008.11.08 16:05
ㄱ. 아린과의 중간적 존재

.. 반잎 아린인 이 녀석들은 상부의 혜택받은 훌륭한 잎과 하부의 노고에 찌든 튼튼한 아린과의 중간적 존재이다 ..  《장 앙리 파브르/정석형 옮김-파브르 식물기》(두레,1992) 38쪽

“상부(上部)의 혜택받은”은 “위에서 혜택받은”이나 “위에서 선물을 받은”으로 고쳐 줍니다. “하부(下部)의 노고(勞苦)에 찌든”은 “아래에서 노고에 찌든”이나 “아래에서 땀흘리고 애쓴”으로 고쳐 봅니다. “아린과의 중간적(中間的) 존재이다”에서는 ‘-과의’를 덜고 ‘아린 사이에’로 다듬어 줍니다.

 ┌ 중간적 존재이다
 │
 │→ 사이에 있다
 │→ 중간쯤이다
 │→ 반씩 닮았다
 └ …

보기글에서는 ‘-과의’와 ‘-적’이 앞에 붙은 뒤 ‘존재’가 뒤따릅니다. ‘존재’라는 낱말 하나로도 얄궂은데, 이렇게 두 가지 얄궂은 말씨가 앞에 붙었네요. 아무래도 낱말 하나하나 알맞게 추스르지 못하니, 뒤따르는 다른 낱말이나 말씨나 말투도 차츰차츰 얄궂어지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첫 끈을 잘 여미어 놓으면 뒤따르는 말도 잘 여밀 수 있을 테지만, 한두 마디쯤이야 뭐,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면서 자꾸자꾸 얄궂은 말투가 튀어나오게 된다고 봅니다.

 얄궂게 잘못 쓰이는 말은 낱말 하나만 잘못 쓰이는 일이 드무니, 낱말은 낱말대로 살뜰히 다듬고 말투는 말투대로 가만가만 헤아리면서 우리 느낌과 얼과 생각을 가장 알맞으면서 알뜰히 나타낼 말투를 펼쳐 주면 좋겠습니다.

ㄴ. 그 미디어들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

.. 그것이야말로 그 미디어들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입니다 ..  《김규항-나는 왜 불온한가》(돌베개,2005) 91쪽

“존재 이유”만 달랑 있을 때에는 “있는 까닭”으로 풀어냅니다.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키며 “내가 존재하는 이유”처럼 적는 자리일 때에는 “내가 사는 까닭”처럼 풀어내고요. 이 보기글을 보면, 토씨 ‘-의’가 앞에 곁달리면서 말투가 통째로 어지럽게 되고 맙니다.

 ┌ 그 미디어들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입니다
 │
 │→ 그 매체들이 생겨난 가장 중요한 까닭입니다
 │→ 그 매체들이 있게 된 가장 큰 까닭입니다
 └ …

생각과 말과 몸가짐 모두를 바르게 하라던 예수님입니다. 생각만 발라서는 안 됩니다. 말만 발라서도 안 됩니다. 몸가짐만 바를 수 없습니다. 세 가지는 한동아리입니다. 함께 움직입니다. 바르게 생각하기에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말하며 살기에 바르게 몸가짐을 추스릅니다.

생각이 뒤틀리는 가운데 말이 뒤틀리고, 말이 덩달아 뒤틀리면서 몸가짐이 뒤틀립니다. 한 마디로, 삶이 온통 뒤틀립니다.

생각은 바르면서 말이 뒤틀리다면, 우리들은 생각 또한 바르게 하지 못한 셈이라고 느낍니다. 아니, 겉핥기로는 바르게 느껴지는 생각이라지만, 속살핌으로는 조금도 바르지 못한 생각이 아니랴 싶습니다.

채식을 하는 뜻은 뭇목숨을 사랑하고 아끼는 가운데 내 몸 또한 사랑하고 아끼려는 데에 있습니다. 내 몸을 사랑하고 아끼려는 뜻은 내 마음이 허튼 데로 쏠리지 않게끔 다스리는 데에 있습니다. 몸매를 가꾸거나 살을 빼려는 데에는 조금도 뜻이 없는 채식입니다. 채색을 한다는 참된 분들은 우리 세상을 좀더 바르고 사랑스러운 쪽으로 새로워질 수 있도록 마음을 쏟고 몸을 바칩니다. 세상일에 등돌리는 ‘채식 즐김이’란 없습니다. 세상일을 옳게 이끌고픈 채식 즐김이만 있을 뿐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뜻은 머리에 지식을 잔뜩 집어넣거나 지식을 사랑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책 하나에 담긴 땀방울을 느끼는 가운데, 책마다 스며 있는 빛줄기를 느끼고, 땀방울과 빛줄기를 어쩜 이토록 재미있게 느끼도록 엮어내느냐 하는 보람을 맛보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보람을 맛보는 동안 자기 생각과 넋을 알뜰히 가다듬게 되고, 자기가 디디고 선 땅에서 자기 할 노릇을 즐거이 찾아나서는 기운을 얻습니다.

 ┌ 그것이야말로 그 매체들한테 가장 중요합니다
 ├ 그것이야말로 그 매체들한테 가장 큰 일입니다
 ├ 그것이야말로 그 매체들로서는 가장 크게 마음을 쏟습니다
 └ …

한 가지를 알뜰히 뿌리내리거나 밑바탕으로 단단히 다지면, 이 뿌리와 밑바탕에 튼튼하게 줄기가 오릅니다. 튼튼하게 오른 줄기에는 싱그러운 잎이 돋고 함초롬하게 꽃이 핍니다. 함초롬하게 피어난 꽃에는 달콤한 열매가 맺어 자기를 길러낸 땅에 다시 거름으로 돌아가거나 씨앗을 내립니다.

말 한 마디도 알뜰히 뿌리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튼튼히 줄기를 올릴 말이 되어야 하고, 싱그러이 잎을 틔우는 말이 되어야 하며, 함초롬하게 꽃을 피우는 말이 되어야 하는 가운데, 달콤한 열매를 맺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