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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곽정란의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를 읽으며

등록|2008.11.10 15:14 수정|2008.11.10 15:14

▲ <숨은 꽃,꽃술을 터뜨리다> 겉그림 ⓒ 젠북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젠북)의 저자 곽정란은 1990년부터 '어린이도서 연구회'란 시민단체에서 활동을 했다. 이 단체의 회장을 맡으면서부터(1994년) '동화 읽는 어른이 되자',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책을'이란 슬로건으로 '동화 읽는 어른 모임'을 전국적으로 조직, 이후에도 범국민 독서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첫째가 유치원에 다니던 1997년, 저자의 어린이 독서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청소년이다. 하지만 난 서점에 갈 때면 동화책 코너에 들러 '어떤 책이 있나?' 안부를 묻듯 들러 가끔 내가 읽을 동화책을 사기도 한다. 저자의 글 덕분에 '동화는 아이들만 읽는 것이 아닌, 어른들까지 읽는 것'이란 것, 동화책 읽는 맛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이렇게 기억하고 있던 저자의 신간 한권이 눈에 띄었다. '유방암을 이겨내고 평범한 독서운동가에서 전문 산악인, 마라토너로 살기까지, 곽정란이 전하는 희망 바이러스'라는 책 설명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암으로 투병중인 이종 사촌이 가슴 아프게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암은, (아직까지는) 내게는 이정도의 작은 아픔일 뿐이다. 하지만 막연히 삶을 두렵게 하는 것은 '암'이다. 남편의 줄어들지 않는 흡연과 음주가 늘 걸린다. 암세포는 스트레스가 키우기도 한다는데, 최근 몇 년 동안 계속되는 불운으로 남편이 마음고생을 참 많이 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 

책 표지 안쪽에는, 저자가 추천해 준 책을 읽으며 우리 아이들이 아동기를 지나 이제는 청소년이 된 그 10년 동안 유방암 진단을 받은 저자가 발병전보다 훨씬 더 용감해진 이야기, 유방암으로 여성성의 상징인 가슴 안쪽을 도려내고 더 여성스러워진 저자의 프로필이 마치 한편의 드라마처럼 소개되고 있었다. 이렇게 읽기 시작한 책이다.

참으로 너무나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누구에게나 크든 작든 삶의 시련이 있기 마련이다. 저자에게 찾아든 시련은 유방암(2기). 책 관련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던 1998년이었다. 그녀에게 어느 날 불현듯 찾아든 '암'은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전환점이 된다.

결국 질병이든, 또 다른 까닭으로든 죽음 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동안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질병은 그래서 우리 삶의 집행 유예다.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다면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수술을 끝내고 조직 검사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던 어느 밤이다. 창밖은 깊은 밤인데도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켜졌고, 거리에는 차들이 바쁘게 질주하고 있었다. 창밖의 현란한 풍경은 오히려 내 비극을 더 드러내 주는 것만 같았다. 며칠 뒤면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올 것이고, 그로인해 내 인생은 또 달라질 것이다. 내 종양이 수술을 받은 가슴 부위에 국한되는 것인지 아니면 임파선이나 그 이상으로 전이가 된 것인지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 절박한 순간에 가족이 생각났다...-책속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내 아픈 한때가 불현 떠올랐다. 저자에게 유방암선고가 인생의 시련이었다면 내게는 2004년의 화재가 최근 가장 큰 시련이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내게, 아무런 죄도 없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빼았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고통스럽건만, 나의 아픔은 전혀 알바 아니라는 듯 해가지면 거리에는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켜졌고 4월 봄 거리엔 사람들로 넘쳐났다.

'저거 한 사발 사다가 끓여 함께 먹으면 좋을 텐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두부를 팔고 있는 두부 장수 앞을 지나며 어머님 댁에 가 있는 아이들 생각에 왈칵 눈물을 솟았다. 반찬 가게 앞을 지나며, 아이의 손에 어묵 꼬치를 쥐어주고 있는 젊은 엄마 옆을 지나며, 꽁치 한마리만 더 달라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사람 옆을 스치며…,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의 행복을 빼앗긴 설움에 눈물이 자꾸 나왔다.

가진 것을 모두 잃고 길거리로 내쫓긴 그 봄 내내, 내게는 참 많은 것들이 다시 보였던 것이다. 그것들 대부분은 그때까지 늘 보며 생활했던 흔하디흔한 것들이라 그냥 스치며 그 가치를 전혀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남들이 글로 소중하다고 말하니까 나도 앵무새처럼 소중하다고 따라했을 뿐, 실은 돈보다 절대 우선하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화재만 나지 않았어도 더 많은 것을 얻는데만 급급한 나머지 전혀 보이지 않았을, 하지만 소중하기 그지없는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빼앗겨 버린 상실감이 무척 커서 하루 하루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때 나의 고통과 저자의 고통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저자는 암이라는 선고를 받고서야 우리들이 소중한 줄을 모르고 살아왔던, 그야말로 사지육신 멀쩡한 몸의 소중함과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그 소소한 행복들을 다시 바라보고 그 소중함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었다. 유방암으로 여성성의 상징인 유방을 도려내며 오히려 더 여성스러워졌다는 그녀의 용기 있는 미소는 그래서 무척 감동스럽게 읽혀졌다.

그녀는 '음식'과 '섭생'도 암을 이겨내는데 중요하지만 그보다 마음 치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사이코드라마를 통한 치료(미술 치료, 동작 치료)에 관심을 갖고 공부한다. 그리하여 2003년 9월 22일 유방의 날에 자신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유방암 여성들을 위한 예술 치유 공연을 기획한다. 그 행사명은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 바로 이 책의 제목이다.

그 후, 독서를 통한 내적인 충만 못지않게 중요한 육체의 가치를 위해 산을 오르기 시작, 2004년에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310m)에 오른다. 이때의 기쁨을 다른 환우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에 '유방암 여성들과 함께하는 히말라야 치유 트레킹'을 기획, 6명의 유방암 환우들과 히말라야에 올라 유방암 여성들의 치유를 기원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후, 암벽 등반 등 체계적인 등반 교육을 받는다. 그리하여 한라산 동계 등반(2005년), 일본 시로우마다께 등반(2007년)을 감행한다. 올해 네팔 히말라야의 아마다블람(6,856m) 원정을 준비하던 중, 혹독한 환경에서 자신을 시험하고자 이집트에서 열리는 사하라 사막 마라톤 대회에 도전, 50도가 넘는 열사의 사막 250여km를 10kg의 배낭을 메고 6박7일 동안 달린 끝에 완주한다.

책속에서 만난 글이다. 가슴을 도려내는 수술을 마치고 돌아 온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한 수녀님의 쪽지 한장, 그 내용이다.

내 인생엔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 두가지가 있다.

첫째,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걱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고 불필요하다.

둘째,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라면 걱정을 하는 대신 직접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훨씬 큰 성과를 가져 올 것이다.(책속에서)
그녀는 또한 틈틈이 병으로 입원한 아이들과 지난날의 자신처럼 암을 선고 받은 여성들, 또 다른 병으로 병원에 입원 중인 사람들을 찾아 '치유를 위한 자원봉사'를 한다. 그녀 역시 지난 날 병실에서 숱한 고통의 시간들을 보냈는데, 그때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봉사한 것이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 과정들을 때론 담담하고 때론 감동스럽게 4부로 담고 있다. 아무렴. 지금처럼 당당하게 서기까지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더 많았겠지. 저자의 투병과 새로운 삶에 대한 용기들이 책 이야기와 함께 보석처럼 빛난다. 발병하기 전보다 발병 후 더 건강해진 그녀의 이야기는 그래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가 될 것 같다.

'암'이라는 장거리 마라톤을 뛰어가고 있는 내 이야기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처음으로 단거리 마라톤을 시작한 분들에게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또 아픈 이를 돌보는 가족에게 위로를, 그리고 아프지 않은 분들에게는 지금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삶이, 아픈 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임을 알리고 싶어서다. 이제 또 다시 출발점에 섰다.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젠 혼자 달리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당신과 함께 달린다. "출발!" -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 저자의 말 중에서
덧붙이는 글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곽정란 글/젠북/2008.11.5/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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