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보는 우리는 '무임금 재택근무자'
[서평] 노명우가 쓴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 노명우가 쓴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겉 표지 ⓒ 프로네시스
정말 조용히 쉬고 싶은 때에도, 뭔가 깊이 생각하고 싶은 때에도 텔레비전이 쏟아내는 소음과 번뜩이는 빛을 뿜어내는 화면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사람은 소수자다. 장애인이나 채식인 같은 다른 소수자처럼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소수자 역시 배려받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장애인이나 채식인보다도 훨씬 더 소수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을 권리 같은 것은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냥 "싫으면 너나 보지 말라"거나 혹은 "유별나게 굴지 마라"는 대답을 듣기 일쑤다.
TV를 없애라고? 불가능한 주문
텔레비전을 연구하였던 제리 멘더는 "총기를 규제하지 않고 총기의 위험을 없앨 수 없는 것처럼 TV를 규제하지 않으면 TV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나이가 어릴수록 이런 위험은 더욱 증가한다.
나는 TV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급적 텔레비전을 적게, 혹은 완전히 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고 있다. 수년 동안 내가 일하는 단체 회원들과 함께 매년 한 차례 텔레비전 안보기 주간을 정해서 'TV 끄기' 운동을 하고 있다.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프로네시스 펴냄)을 쓴 노명우는 이 책을 통해 텔레비전을 없애라고 하는 제리 멘더 식 주장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텔레비전은 아이가 담긴 욕조와 같기 때문에 더러워진 목욕물만 버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의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 없지만, 그가 쓴 책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은 텔레비전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책임에 틀림없다.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노명우는 아주대학교 사회학 전공교수로 있다.
그는 텔레비전을 버리자고 선동하기보다, 왜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언어와 문자·이미지를 비롯한 여러 미디어의 탄생과 변화를 조명하는 작업을 통해 텔레비전이 어떻게 주류 미디어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텔레비전이 지닌 정치·경제·문화적 속성을 해부함으로써, 단순히 텔레비전을 끄는 것만으로 주류 매체인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는 미디어가 변화, 발전해온 역사적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텔레비전을 반대하는 것만으로 결코 그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평균 한국인은 텔레비전을 얼마나 보나?
2004년에 실시된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하루 24시간 중 우리가 잠자고 식사하는 데 소비하는 시간은 평균 10시간 34분(44%), 일하거나 공부하고 이동하는 데에는 평균 8시간 13분(34%), 우리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남는 시간은 고작 5시간 13분(22%) 뿐이라고 한다.
"(평균 한국 사람들은) 고작 5시간 13분 중에서 평일에는 2시간 6분, 토요일에는 2시간 28분, 일요일에는 무려 3시간 14분을 텔레비전 보는 데 할애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말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푹 쉬는 날이다. 텔레비전은 평균적인 한국인의 여가 시간을 지배한다."(본문 중에서)
통계청이 조사한 한국인 생활시간 조사를 보면, 텔레비전이 사람들 여가 시간뿐만 아니라 생각과 대화를 지배하고 있지만, 텔레비전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하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늘 가까이에 있는 공기에 대하여 성찰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노명우는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에서 텔레비전 때문에 생긴 부작용보다는 현대인들이 텔레비전 없이 살 수 없는 이유, 텔레비전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에 더 주목하였다. 집에만 들어오면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켜고, 아파트 거실은 중앙에 텔레비전을 설치하도록 만들어지고, 거실 소파는 텔레비전 시청에 편리하게 놓여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가족들은 거실에 나란히 앉아 있지만 서로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누군가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네모상자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아서, 상자가 켜지면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하고 시청자라는 기호로 바뀐다고 한다. 인류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 서울역 대합실에서 TV를 시청하는 시민들. ⓒ 유성호
TV는 지배권을 가진 블랙홀
저자는 텔레비전이 가진 미디어 지배력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미디어의 역사와 변화과정을 살펴보고 있다. 그는 문화적 구성물인 미디어의 파급 범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넓고 깊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우리에게는 미디어 선택권이 없다고 한다. 하나의 미디어가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 선택권은 사라지고 적응만 남는다고 한다. 따라서 미디어는 한 사회를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환경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에는 기원전 1500년 무렵에 발명된 알파벳이라는 미디어와 기원전 105년에 발명된 종이, 16세기의 인쇄술, 18세기의 신문, 19세기의 사진과 영화가 20세기의 텔레비전과 공존한다."(본문 중에서)
그렇지만,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가 사회를 지배해도 이전 미디어인 사진이나 영화, 신문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미디어의 주도권을 설명하기 위하여 도구-미디어와 환경-미디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도구-미디어는 개별 인간이 개인적 선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지만, 환경-미디어는 마치 공기처럼 개별인간이 선택할 수 없다."
공기라는 환경을 거부할 수 없듯이 환경-미디어는 개인이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음성의 시대에서부터 문자시대, 인쇄술과 텍스트 시대, 그리고 사진과 영화가 등장하는 기술복제의 시대를 거쳐 텔레비전이 등장하는 시대까지 도구-미디어에서 환경-미디어가 어떻게 주도권이 바뀌는지를 알기 쉽고 설득력 있게 전해준다.
텔레비전은 1928년 처음 지구상에 등장하였지만, 한국에서 텔레비전이 환경-미디어로서 주도권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고 한다. 통계를 살펴보면 1976년 텔레비전 보급률이 41.4퍼센트에 달했다고 한다.
텔레비전은 영화 기술을 전승하였지만, 영화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포드시스템이 작동하는 점이라고 한다. 텔레비전 방송시스템은 포드주의적 생산 방식을 전제로 하였으며, 충분한 임금과 여가시간을 제공하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생활원리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TV 시청자는 광고 이윤을 창출하는 무임금 노동자다
따라서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시청자들은 알게 모르게 포드주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재택근무자와 다름없다고 한다.
"개인은 거실에서 오락을 위해 텔레비전을 시청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 행위는 방송국이 광고주로부터 더 많은 돈을 얻어낼 수 있는 부가가치 창출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텔레비전 시청자는 무임금 재택근무자이다. 우리는 매일 밤 시청률 통계로 잡히면서 재택근무를 한다."(본문 중에서)
결국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이념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이며, 과거 다른 미디어에 비하여 훨씬 이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미디어라는 것이다.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흔히 나타나는 탈정치화는, 경제 지향적 태도의 확산"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텔레비전의 의사소통은 항상 일방적이며, 시청자는 영원한 시청자일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산업 혁명 초기 영국 지배계층이 노동자 계층에게 읽는 능력은 가르쳐주되 쓰는 능력은 가르쳐주지 않으려"했던 일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텔레비전이 대중을 탈정치화시키고 시민을 소비자로 바꾸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텔레비전은 국가가 국민을 호명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텔레비전은 상황에 따라 시청자를 국민, 세계시민, 붉은악마로 호명하는데, 결국 시청자를 개인에 머무를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전파는 국가가 통제하고, 텔레비전은 국가 표준어를 방송하고, 주기적으로 올림픽과 월드컵 같은 국가 간 경쟁 스포츠가 국가적 열광의 순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은 방에서 혼자 시청하더라도 다른 시청자와 동일한 경험을 공유하는 특성 때문에 시청자는 개인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여러 가지 비교를 통해서 같은 영상미디어인 영화와 텔레비전의 차이를 비교하여 텔레비전이 환경-미디어로서 주도권을 가지게 된 근거를 확인시켜준다. 저자의 마지막 질문은 과연 시청자가 텔레비전을 끌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프 버튼을 누른다고 해서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지금도 지구의 어느 곳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이 지속되는 한, 그리고 시청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 한 텔레비전은 절대 꺼지지 않는 영구동력을 내장한 미디어다." (본문 중에서)
결국, 텔레비전이 꺼진다는 것은 개별 텔레비전 장치가 꺼지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 시대가 종말에 도달해야 하는데, 이는 텔레비전이 켜져 있더라도 새로운 미디어가 환경-미디어로 등장하여 지배적인 미디어가 되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한편, 텔레비전 시청 환경도 1인 시청 방식으로, 시청자가 원하는 방송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고, 환경-미디어로서 주도성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과 텔레비전 미디어 주도권 다툼
▲ 서울 황학동 청계천 중고전자상가에 가득 쌓인 TV들 ⓒ 유성호
텔레비전이 주도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는 앞서 인용했던 '국민생활시간' 조사에서도 확인된다고 한다. 여가시간에 컴퓨터 사용시간이 증가하고 있고, 특히 10~20대의 경우는 텔레비전 대신 컴퓨터(인터넷)가 주도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한다.
2002년 미선·효순 촛불집회, 2004년 탄핵반대 촛불시위, 2008년 광우병쇠고기 반대 촛불시위는 모두 텔레비전의 주도성이 약화되고 웹과 모바일이 주도적으로 작용하였던 사례라는 것이다. 웹기반 의사소통 방식은 1인 매체와 같은 여러 가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조직화된 중앙집권적인 힘의 조직적인 대응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진단한다.
"웹기반 의사소통망은 촛불시위와 같은 특별한 정세에서만 힘을 발휘할 뿐이다. 웹 기반 의사 소통망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특별한 시기가 끝나면, 텔레비전은 다시 개인들의 일상을 제압하는 막강한 능력을 보여준다. 텔레비전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본문 중에서)
저자는 오늘날 텔레비전은 중앙집권적 시스템과 자본의 힘이 결합하여 괴물 같은 상황에 도달한 미디어라고 진단하고 있다. 따라서 텔레비전이라는 괴물로부터 벗어나려면 이제는 텔레비전을 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순히 텔레비전을 시청하지 않는 소극적 부정 대신에 중앙집권적으로 내뿜는 텔레비전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적극적 부정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비평이나 방송국 시청자 참여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키보드 전사가 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한다.
개별 프로그램 피디가 누군가 보다는 방송사 대표가 어떤 정치적 성향을 지니는지, 통신위원회의 위원이 누군지에 따라 시청자라고 부르는 국민의 일상 향방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텔레비전과 시청자의 의사소통구조를 바꾸는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KBS 정연주 사장이 쫓겨나는 데도, 대통령 최측근이 방송통신위원장이 되고, YTN에 낙하산 사장이 임명되어도 가만히 있으면, 국가와 자본이 지배하는 텔레비전의 막강한 지배력은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노명우는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에서 영혼이 없는 시청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텔레비전에 대하여 '성찰'하고 생존기술을 익히는 것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책은 텔레비전이 등장하기까지 미디어 발전과정과 텔레비전이 지닌 사회, 문화적인 영향력과 경제 지향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탁월한 분석이 돋보이는 책이지만, 텔레비전에 대하여 '성찰'하자는 결론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미디어와 매체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오래된 진귀한 사진과 상세한 통계는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보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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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노명우 지음 - 프로네시스/ 250쪽, 12,000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