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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 도중 육체가 의지를 배신한다면?

[우즈베키스탄 도보횡단기 8] 도보여행 7일(베루니 -> 토르트쿨)

등록|2008.11.14 08:23 수정|2008.11.14 17:57

베루니시내의 동상 ⓒ 김준희


도보여행을 시작한 다음부터 아침에 잠에서 깨는 시간은 거의 6시 30분 쯤이다. 현지인의 집에서 머물 경우에는 이보다 더 일찍 깨기도 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대부분 6시면 일어나서 무언가를 한다. 차를 끓이고 집 안팎을 청소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이런 분주함 속에서 나 혼자 침대에 누워 있을 수는 없다. 물론 아침에 일어나려면 몸이 천근만근이다. 도보여행의 피로가 누적된 상태이고 다리의 통증도 계속된다. 이른 아침의 쌀쌀한 날씨는 계속 나를 이불 속으로 불러들인다. 특히 간밤에 보드카를 많이 마신 날은 더욱 그렇다.

오늘 아침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계속 미적거리는 것도 못할 짓이다. 무자파르는 자기 방을 놔두고 집 마당의 평상에서 잔 모양이다. 그는 어제 나한테 "겨울에만 방에서 잔다"라는 말을 했다. 무자파르는 평상 위에서 두꺼운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얼굴만 내놓고 있다. 저럴 바에야 그냥 방에서 자는 게 훨씬 좋을텐데, 왜 굳이 야외에서 자는 것을 고집할까.

나는 무자파르의 어머니가 끓여준 차를 마시고 빵을 조금 먹었다. 그리고 출발했다. 집 밖까지 따라나온 무자파르는 나에게 길을 안내해준다. 복잡한 골목을 빠져나와서 큰길로 나가려면 그것도 꽤나 신경쓰이는 일이다.

큰길로 나와서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토르트쿨까지 몇 km냐고 물었더니 40km란다. 걷다가 한 시간 후에 만난 사람한테 물었더니 27km란다. 다시 한 시간 후에 만난 남자는 18km 남았다고 한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내가 축지법을 쓰는 홍길동도 아닌데 이렇게 빨리 거리를 좁힐 수는 없다. 걷는 도중에 현지인들에게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물으면, 이들의 대답은 전부 제각각이다. 같은 장소에서 물어도 경찰, 택시기사, 일반인 모두 다르게 얘기한다. 심한 경우 경찰은 25km, 택시기사는 40km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긴 어찌 보면 정확한 거리를 모르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도 그렇다. 내가 한국에서 길을 걷고 있는데 외국인이 다가와서 "잠실에서 수원까지가 몇 킬로미터냐?"라고 물으면 나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수원까지의 경계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수원 중심부까지의 거리를 묻는 것인지에 따라서 대답도 달라질 거다. 그러니 이들의 대답이 중구난방이어도 이들의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사전에 철저하게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고 여행을 시작한 내가 문제일 거다. 그래서 앞으로는 가급적 방향만 물어보면서 길을 걷기로 했다.

오늘 목적지인 토르트쿨로

베루니를 떠나서토르트쿨 가는 길 ⓒ 김준희


그런데 난데없이 재채기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격렬하게 연달아 재채기가 터지면서 콧물이 흐른다. 감기에 걸린 걸까. 이렇게 태양이 뜨거운데 감기는 아닐 것이다. 오래 전부터 완치되지 못했던 나의 지병 알레르기성 비염이 여기와서 도진 것이다. 코가 나의 약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나는 두루마리 화장지를 꺼내서 배낭에 매달린 스테인테스 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계속 화장지를 뜯어서 코를 풀고 콧구멍을 틀어막으며 걸었다. 그래도 별다른 소용이 없다. 재채기는 끝없이 나오고, 줄줄 새는 수돗물처럼 콧물이 흐른다. 내 몸 속에 이렇게 많은 콧물이 있었단 말인가.

왜 갑자기 비염이 도졌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코가 어떤 요인으로 인해서 자극을 받은 건데,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이나 그럴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무자파르의 집에 고양이 두 마리가 있긴 했지만, 나한테 고양이 알레르기는 없다. 어제 퍼마신 보드카 때문에 코의 상태가 나빠졌거나 아니면 피로가 누적되면서 코가 약해졌을 수도 있다.

계속 재채기를 하고 코를 풀면서 걸어가는 이 외국인을 현지인들은 아마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또다른 걱정거리가 생겨난다. 이 두루마리 화장지가 다 떨어지도록 토르트쿨에 도착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화장지를 다 쓰고 나서도 계속 콧물이 멈추지 않는다면?

걷다 보니까 별걱정을 다한다. 좋은 점도 한 가지 있다. 재채기가 반복 될 때마다 울화통이 터진다. 내 몸의 이상 때문에 나 자신에게 생겨나는 분노다. 그 감정 덕분에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면서 기운이 생겨난다. 몸 상태가 안좋기 때문에 오히려 피로가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아이러니. 이거 하나는 정말 좋은 점이다.

걷는 도중 계속 쏟아지는 콧물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가장 많이 걱정했던 것도 나의 육체적 능력이었다. 한여름 국토종단에 나섰던 대학생들이 픽픽 쓰러진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나는 사막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내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에 걱정이 더욱 가중되었다. 나의 의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나의 육체는 걷기를 거부하면 어떡하나. 육체가 의지를 배반하면 그것은 무엇의 문제일까. 허약한 육체의 잘못일까, 무모한 의지의 책임일까.

"생각이 육체를 지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육체가 마음을 좌지우지해서는 안된다. 육체는 언제나 포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미국의 조지 패튼 장군이었던가? 기억을 더듬지만 재채기가 터질 때마다 생각도 함께 날아가 버린다. 이 말은 물론 옳은 말이지만 그것도 몸의 상태가 어느 정도 이상일 때 가능한 얘기다. 피로가 누적되고 체력이 떨어져 가는데도 생각이 몸을 지배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안되겠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1시가 넘었다. 오전에만 족히 50번은 재채기를 한것 같다. 두루마리 화장지도 얄팍해져 있다. 어디 식당에 들어가서 뜨거운 차를 마시고 좀 자야겠다. 자고나면 피로도 풀리고 콧물과 재채기도 마법처럼 멎어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작정했다고 해서 식당에 곧장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적한 시골길에는 식당도 찾기가 쉽지 않다. 나는 시선을 먼 곳에 고정시키고 걸었다. 지평선이 보이는 저 멀리 길가에 집 한 채가 나타나기를, 그래서 그 곳에 들어가서 잠 한숨 자고 일어날 수 있기를.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그것이 전부다.

한참 걷다보니 식당이 나타난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나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짐을 한쪽에 놓고 평상으로 올라갔다. 뜨거운 차와 함께 커다란 우즈베키스탄 만두 2개를 먹고 평상에 누웠다. 나만의 휴식시간을 맞이하는 이 즐거운 기분.

식당에서 자고 일어나 다시 걷는다

토르트쿨 도착시내 중심가로 가는 길 ⓒ 김준희


20분쯤 자고 일어났다. 이제 점점 요령이 생겨난다. 처음에는 식당 평상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지금은 아무 거리낌이 없다. 주문한 음식을 다먹고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식당 직원이 나에게 방석처럼 생긴 두꺼운 베개를 가져다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럼 그걸 베고 그냥 편하게 누워서 자면 된다. 아니 그냥 누워서 자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여행자라서 그냥 봐주는 건지 아니면 나같은 현지인들이 많은 건지 그건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콧물이 완전히 멎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재채기와 콧물이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자고 일어났을 때의 개운한 기분 때문에 걸음도 가볍다. 나는 걷다가 쉬다가 하면서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갔다. 어제 칼리지의 교장이 준 과일과 빵을 오늘 아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토르트쿨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30분. 시내 입구에 있는 가게에서 양말 한 켤레와 화장지, 10개가 들어 있는 물티슈 한 곽을 샀다. 토르트쿨을 지나고 나면 사막을 통과하고 나서야 이런 도시에 도착할 수 있다. 그것은 그때까지 제대로 씻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사막을 걷다 보면 양말도 헤질 테고, 물이 없어서 씻지 못할 때는 물티슈가 유용할 것이다. 토르트쿨은 공업도시인지 시내에 수많은 자동차 정비소와 커다란 공장이 보인다. 나는 트럭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여기 호텔이 어디 있어요?"
"호텔? 토르트쿨에는 호텔 없어요!"

이게 웬 날벼락인가. 여기까지 오면서 토르트쿨에 호텔이 있다는 얘기를 분명히 여러 차례 들었는데. 베루니보다 커보이는 이 도시에 호텔이 없다니? 그때 나타난 세 명의 아이들.

나를 도와주었던 3명의 소년

토르트쿨에서나를 도와준 3명의 소년 ⓒ 김준희


토르트쿨에서내 짐을 끌고 앞서가는 소년들 ⓒ 김준희


"호텔! 저쪽에 호텔 있어요!"

세 명의 아이들이 합창하듯이 외친다. 학교에 다녀오는 길인지 모두들 가방을 메고 하얀 셔츠에 짙은 색 바지를 입고 있다. 덥썩 끌어안아주고 싶을 만큼 반갑다. 내가 호텔에 간다니까 이들은 내 핸드카를 빼앗더니 신나게 앞장서서 걷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이 아이들은 연신 나를 보면서 뭐라고 떠든다.

걷다보니 아까 트럭 운전사가 호텔 없다고 말한 것도 이해가 된다. 토르트쿨은 내 생각보다 더 크고 복잡하다. 아이들은 날 이끌고 미로같은 시장길과 작은 골목을 헤치면서 나아간다.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 난 어디서 잠을 잤을까.

한참을 나아간 후에 호텔에 도착했다. 어차피 오늘밤만 자고 내일 일찍 떠날 예정이니까 가장 싼 방을 택해도 상관없다. 우리돈으로 약 만원짜리 방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짐을 풀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곳이 아무래도 중심가인 것 같다. 관공서처럼 보이는 커다란 건물과 멋진 조형물이 있다. 나는 한쪽의 카페에 앉아서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하고 거리를 둘러보았다. 내일부터는 진짜 고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미스킨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그곳까지의 길이 사막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미스킨을 떠나면서부터 사막이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막을 걸어서 통과할 때까지 며칠이 걸릴지도 모른다. 사막의 길에서 무엇을 만나게 될까. 아니 사막을 걷는 동안 내 몸이 과연 버텨줄 수 있을까. 머리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떠오른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경우에도 의지가 육체를 지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포기하려는 육체를 의지가 바로 잡아주지 않는다면 도보여행을 끝마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새 다가온 저녁, 서쪽 멀리 해가 지고 있다.

토르트쿨시내의 모습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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