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돌반지' 아닌 대주주 '금송아지' 모을 때
구조조정의 계절, 이제는 자본의 구조조정이다
▲ 겨울 한파와 함께 찾아온 경제 위기가 서민을 겨냥하고 있다. 사진은 2005년 겨울 남대문시장 모습. ⓒ 오마이뉴스 남소연
늦은 한파가 시작되었다. 계절만 겨울로 들어선 것이 아니다. 일하는 직장에서 실직의 한파가 시작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시 구조조정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11년 전 환란의 추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실물경제 '꽁꽁', 고용대란의 계절이 왔다
월가와 미국 제조업의 구조조정 한파는 거의 시차도 없이 국내로 직수입되고 있다. 시공능력 41위인 신성건설이 신청한 법정관리를 신호탄으로 건설업계에 구조조정 칼바람이 불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지고 있다.
저축은행을 필두로 금융업계의 감원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세계적인 내구재 소비 위축의 여파로 미국 본사가 생사기로에 처한 GM대우의 감산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잔업과 특근 축소에 이어 다음은 구조조정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전자나 반도체 업체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는 최근까지 초호황을 누려왔던 조선업마저도 구조조정 대상으로 거론될 정도다.
'비정규직 기간 연장'이라는 안이한 발상
이미 올해 초부터 임시직, 일용직 등 비정규직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추가 일자리 증가가 20만 명에서 15만 명으로, 다시 9만 명으로 줄어든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때문이다. 올 겨울을 분기점으로, 곧 정규직 일자리도 안전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고용대책이라고 해서 현행 2년의 비정규직 기간을 연장하자는 주장도 들린다. 어이없는 주장이다. 지금은 비정규직뿐 아니라 자영업, 청년, 정규직을 포함해 국민경제의 고용 틀 전부가 흔들리고 있는, 말하자면 고용대란 국면이다. 안이하게 비정규직의 고용 편리성을 조금 늘려서 해결될 시국이 아니다. 기업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외환위기 아니라면서 구조조정은 왜 꺼내나
'구조조정'은 업계에서만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정부 쪽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에 외환위기도, 금융위기도 없다고 여러 차례 확언을 해왔던 정부가 어째서 외환위기 정도가 와야만 있을 법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얘기하고 있는가. 사실 위기는 이미 외환과 금융시장에서, 수출시장에서, 내수시장에서, 그리고 고용시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위기의 심각성은 뚜렷한 해결의 돌파구가 없기 때문에 한두 해로 끝나지 않고 장기화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명박 정부 집권 내내 지속될 수도 있다. 사실, 외환위기 당시에는 한국과 아시아를 제외하고는 세계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미국도 신경제 활황의 정점을 향해가던 시기였다. 그래서 수출을 통해 한두 해만에 외형적으로나마 환란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과 유럽이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것은 물론, 연 10퍼센트를 넘는 고성장을 구가하던 중국까지도 성장 하락세가 점쳐지고 있다. 전 세계의 소비, 특히 우리가 주력 수출품으로 삼고 있는 자동차와 전자 같은 내구재 소비 축소가 심각한 상황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조차도 2009년 수출증가율을 3퍼센트 내외로 보고 있다. 2000년 평균의 1/5도 되지 않는 극적인 추락이다.
유일한 돌파구였던 수출마저 봉쇄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지금, 결국 경기회복을 위해서는 내수를 살리는 것 이외에 선택지가 없다. 토목 건설 같은 내수가 아니라 국민의 구매력을 높여 중소기업과 자영업이 살아나 경기가 회복되는 길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고용이 있다. 고용이 늘어야 소득이 올라가고 구매력도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구조조정된 상황, 뭘 얼마나 더 하려고
하지만 고용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부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3년 카드 대란 여파로 늘어나는 일할 사람(경제활동가능인구)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채, 고용은 낮은 수준을 지속하고 있었다. 여기에 올해부터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 취업자 수는 이미 내부적으로 소리 없는 인력 구조조정이 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난 8년 동안 전년대비 취업자 증가 수가 20만 명을 밑도는 상황으로 추락하고 있다. 늘어난 경제활동가능인구(15세 이상 인구) 가운데 취업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반대로 2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던 시기는 2003년 카드 대란 시기와 지금 뿐이다. 그나마 카드대란 시기는 그 전해인 2002년 과잉 신용팽창으로 취업자 수가 급격히 늘어난 뒤의 반작용 측면도 있고, 바로 이듬해부터는 회복세를 보였다.
▲ [그림1] 2001년 이후 취업자수 증가 추이(천명, 자료: 통계청) ⓒ 새사연
그러나 올해의 경우는 2005년 이후 3년 동안 그나마 유지되어온 28만여 명의 취업자 증가 추세도 꺾여서 아예 1/3수준인 9만 명 수준으로 추락했다. 현재의 추세를 볼 때, 전년 대비 취업자가 조만간 마이너스 증가로 돌아서고 취업자 절대규모가 감소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고 판단된다.
원래 저조했던 고용이 다시 마이너스로 돌입한다면 그 충격은 외환위기를 사실상 넘어서게 될 것이다. 정부가 내년 목표로 잡은 20만 명 고용창출이 어림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대마불사', 은행도 대기업도 아닌 국민이어야
그렇다면 더 고용을 줄여 구조조정을 한다는 발상이 현재 우리 경제 실정에는 무모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도 여전히 정부나 재계에서는 대기업이 살아야 고용이 유지될 것 아니냐는 이른바 대마불사 논리에 집착하는 듯하다. 국민경제에서 진정 불사해야 할 대마는 무엇인가. 은행도, 수출 대기업도 아니다. 바로 국민이다.
11년 전에도 대마불사의 논리에 따라 은행과 대기업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대마(대기업, 은행)가 기사회생한 후에 국민에게 일자리를 다시 준 것은 아니었다. 그 탓에 환란으로 일자리를 잃은 대다수 노동자들은 이후 비정규직을 전전했고, 퇴직금으로 대출을 받아 직장인 월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영업에 주 50시간 이상을 바쳐야 했다. 대기업에서 쏟아진 수많은 인력들을 채산성도 좋지 않은 중소기업들이 떠안아야 했다.
1996년에서 2006년 10년 동안 300인 미만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220만 명이 늘어난 반면 300인 이상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꾸로 78만 명이 줄어들었다. 11년 전 환란으로 대기업이 인력을 대폭 줄인 후에 지금까지 거의 고용을 늘리지 않았음을 통계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 [그림2] 기업규모별 고용정도 추이(사업체 기준, 천명, 자료: 통계청) ⓒ 새사연
실패한 인력 구조조정, 반복하지 말자
지금까지의 구조조정은 정확히 말해서 인력 구조조정이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더 이상 구조조정을 해야할 인력도 없다. 어려운 시기 인력 구조조정을 감내했다고 해서 시절이 좋아져 남긴 수익을 공유한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인력 구조조정으로 경제를 살리는 방법은 이미 실패했다. 실패한 방법을 반복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사실 외환위기 이후 줄곧 강조해 온 것은 고용이 아니라 기업의 수익이었다. 특히 은행들의 수익 창출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 수익은 고용을 줄여서 얻은 수익이었고 미래의 투자를 포기한 대신에 만들어진 단기수익에 불과했다. 개인들의 소득도 마찬가지다. 일해서 버는 노동소득을 늘리는 대신에 손실 가능성이 높은 각종 위험 펀드에 가입하여 투기를 부추기는 방식으로 일시적인 소득증대의 착시현상을 심어주었다.
인력을 줄이고 미래의 장기 수익을 포기하며 얻은 기업의 단기 수익, 지금의 노동 소득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의 소득을 담보 잡아 부채를 끌어 쓴 소비와 구매력이 결국에는 거품으로, 파산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선진국이나 한국에서나 경제 위기 극복의 실마리는 모두 정부가 쥐고 있다. 이미 시장의 해결 능력은 바닥이 났기 때문이다. 정부가 세금을 재원으로 재정지출을 가장 효율적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할 시기다. 지금은 정부가 대마불사 논리에 사로잡혀 대기업과 금융기업 자금 투입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고용 창출 효과가 발생하고 국민의 구매력이 커질 수 있는 곳에 적극적으로 재정지출을 해야 한다. 나아가 고용에 가장 직접 영향을 주는 중소기업 회생을 위해 강도 높은 공적자금 투입을 추진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대기업 주주들에게는 스스로 자본을 확충할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직접 지분매입을 하는 등 자본의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 국민의 노후를 담보한 국민연금이 굳이 쓰여야 한다면, 막아봐야 별 효과도 없는 주가를 떠받치는 데 쓸 것이 아니라 자본의 구조조정을 하는 데 쓰여야 한다. 정부가 보증할 일이 있다면 고용 확대 위험에 대한 보증을 해야 한다.
11년 전에는 금 모으기 운동을 벌여 외환위기 탈출에 힘을 보탠 적이 있다. 이번에는 서민들의 '돌반지 금 모으기'가 아니라 대주주들이 가진 '금송아지 모으기' 운동을 요구해 경제 위기의 난국을 돌파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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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http://www.saesayon.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김병권 새사연 연구센터장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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