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 '자소설' 10만원에 써드립니다"
[취업시장 천태만상] 구직자 유혹하는 '자기소개서 대필 전문가'
▲ 서울 소재의 한 4년제 대학 컴퓨터실. 취업 시즌을 맞아 입사지원서 및 자기소개서를 쓰느라 분주한 학생들이 많다. ⓒ 송주민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업을 하고 싶다."
엄살떠는 말처럼 보이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요즘 젊은이들의 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88만원 세대'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한 말 중 하나다. 오늘도 청년 구직자들은 번듯한 직장에 입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강구한다.
영혼까지 팔고 싶은 심정인데 무엇인들 못하랴. 자기소개서 항목을 '픽션'으로 채워넣는 행동은 이제 기업 인사담당자들도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서울 주요 대학에서 취업특강을 하는 유명 취업·인사 포털사이트의 한 컨설턴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명 '자소설(자기소개서를 소설처럼 꾸며 쓴 것을 이르는 말)'을 보면, 대학시절 동아리 및 학생회 임원을 하며 리더십을 키워보지 않은 지원자가 없다. '복지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해봤다'는 내용도 일률적으로 들어간다."
'글발'이 좋아 멋들어지게 '자소설'을 쓸 수 있는 지원자는 그나마 행운아다. 글재주가 없어 자신의 상품 가치를 제대로 치장할 수 없는 지원자들은 언제나 걱정이 태산이다. 성장배경을 쓰는 칸을 보며 숨이 턱 막히는 순간부터, 꼬박 일주일을 공들여 쓴 지원서가 서류전형에서 맥없이 미끄러지는 순간까지. 못난 문장력도 '수백 대 일'의 경쟁이 난무하는 이 바닥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서러움이다.
"자소서 때문에 골머리 앓는 분... 걱정 마세요"
▲ 자기소개서 대행 및 대필 카페의 인터넷 화면을 갈무리한 모습.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자소서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란 문구가 인상적이다. ⓒ 송주민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몰리는 곳이면 어디에나 '틈새시장'이 존재하는 법. 소설을 잘 못 쓰는 지원자라고 해서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 자기소개서(이하 자소서) 때문에 머리를 쥐어짜는 당신을 위해 수준급 '자소설'을 대신 써줄 '지식 소매상'이 있기 때문이다.
정식 직업명은 아직 없지만(자칭 '인사관리 컨설턴트'), 주 업무는 '자소서 대필'이다.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취업상담도 사실상 금전거래가 오가는 자소서 첨삭 및 대필을 위한 사전 포섭 단계다. 잘 포장된 '자소설'에 목마른 구직자들이 제 발로 찾는 시장이기 때문에, '포섭'이란 말도 사실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유독 파생상품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는 시대. 일명 '취업전략 및 자기소개서 대필 전문 컨설턴트(이하 대필 전문가)'도 극심한 취업 경쟁 속에서 파생된 기형적 형태의 직업 중 하나다. 웬만한 직장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수입도 짭짤하다고 한다.
이 유망한(?) 신종 직업은 누가 하는 것이며, 또 거래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자소서 거래가 이뤄지는 시장은 온라인 공간. 대필 전문가는 포털사이트 '다음' 등에 카페를 개설하고 수요자들과 대면한다. 규모가 큰 곳은 10만이 넘는 회원수를 자랑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카페에는 각종 취업 정보들이 나열돼 있다. 하지만 이는 부수적인 자료다. 대필 전문가와 직접 접촉하는 것은 카페에 명시된 인터넷 메신저를 통한다. 취업상담부터 자소서 거래까지, 일련의 모든 과정이 메신저에서 1대1 대화로 이뤄진다. 대필 전문가는 고객들의 부름을 받기 위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메신저에 '죽치고' 있다.
대필 전문가는 자신의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구직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상담에 들어간다. 일면식도 없는 고객에게 '검증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공표하기 위해서다. 대부분이 고학력에 조건 좋은 직업인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OO대학교 OO학과를 졸업했고 OO기업 인사 관련 일로 수년간 근무했습니다."
"까놓고, 편법 없이 자소서 쓰는 사람 몇이나 되겠나"
▲ 자기소개서 대행 및 대필 전문 인터넷 카페. 메신저 상 1대 1 대화 방법 등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 송주민
소개를 마친 뒤에는 곧바로 구직자의 구체적인 '스펙'을 묻는다. 학력부터 토익·자격증·공모전·해외연수·인턴경험 등 흔히 말하는 '취업 5종세트'를 중심으로 고객의 이력을 살핀다. 그러고는 구직자가 지원하고자 하는 기업의 특성을 구직자의 '스펙'과 비교하며 분석한다. 대략적인 합격 확률도 판가름해 준다.
전반적인 취업전략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구직자의 구미가 한껏 달아오를 즈음부터는, 자연스럽게 자소서 대필을 위한 '가격 협상' 단계가 수면 위로 오른다. 가격협상을 벌여본 바 있는 구직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자소서 첨삭은 대략 5만원 안팎, 신규 작성은 10만원 안팎에서 거래되고 있다.
돈이 입금된 후에는 본격적인 '자소설' 쓰기 단계에 돌입한다. 우선 자소서에 들어갈 핵심적인 내용(성격·취미 등)을 구직자에게 간단히 묻는다. 그 뒤, 현란한 글 솜씨 및 노련한 '치장의 기술'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자소설' 쓰기에 들어간다.
김성찬(가명·26·A전문대3)씨는 10만원에 가격협상을 마치고 글쓰기를 위탁했다고 한다. 그는 "글로 표현하는 것에 너무 자신이 없었다. 지원서를 많이 써본 사람에게 돈을 주고라도 맡기는 편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고 봤다"며 "전문대생 치고 '스펙'이 나쁜 편이 아닌데, 서류에서 계속 낙방을 하다 보니 급한 마음에 확률 높은 방법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진한(가명·27·B대4)씨도 4번 연속 서류전형 탈락 끝에 대필 전문가를 찾았다고 한다.
"까놓고 말해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기 위해 덤벼드는 지원자 중에 솔직하고 편법 없이 자소서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안 그래도 지난 몇 년 동안 청년실업이 문제였는데, 최근 경제위기까지 겹쳐버린 상황에서 실업자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앞뒤 가릴 것이 있나."
양자 간의 '은밀한 거래'는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 과정을 통해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실제 청년 구직자와 함께 직접 대필 전문가를 찾아 취업전략 및 자소서 대필에 대한 상담을 받아봤다. 다음은 메신저에서 나눈 대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구직자 "일단 안면이 없는데, 소개 좀…."
대필자 "저는 OO대학교 OO과를 나왔고, OO기업에서 헤드헌터로 근무했습니다."
구직자 "이번에 OO기업 사무직에 지원하려고 하는데요."
대필자 "학교랑 전공이?"
구직자 "학교는 OO대이고, 전공은 OO과입니다."
대필자 "구체적인 스펙은요?"
구직자 "토익 OOO점, 자격증 OOO, OOO가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을까요?"
대필자 "나이랑 성별, 그리고 졸업 시점은요?"
구직자 "26살이고, 내년 2월에 졸업 예정입니다."
대필자 "나이도 좋고. 토익도 있고, 자소서랑 면접만 잘하시면 충분히 조건은 될 듯."
구직자 "자소서 좀 지도받고 싶은데 어떻게 되죠?"
대필자 "새로 작성하실 거면 12만원. (첨삭은 5만원 정도) "
구직자 "바로 입금할 테니 10만원에 합시다. 잠시만요."
대필자 "입금했나요?"
구직자 "지금 들어갔을 겁니다. 확인해보세요."
대필자 "네. 그럼 제가 질문 드리면 주욱 연결해서 답변 주세요. 메일 주소·지원하는 회사 분야·취미·특기,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언제까지 해드리면 되겠는지…."
기업 "티난다, 자제해야"
▲ 서울 소재 한 4년제 대학에서 진행되고 있는 취업관련 특강. 각 대학 교양 수업에서는, 기업의 인사 담당자 등을 초빙하여 취업과 자기소개서 작성 등을 지도하는 강의가 매 학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 송주민
자소서를 평가하는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공효식 LG전자 디지털미디어부문 인사차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티가 나는 방법이니, 구직자들은 힘들더라도 이런 유혹에 빠지면 안 된다"며 "자신에 대해서는 본인이 가장 잘 아는 것이고 대신 써주는 그저 그런 똑같은 유형의 지원서는 인사담당자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년 구직자들은 인사담당자의 '교과서'적인 말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자신이 쓴 '못난' 자소서는 단번에 서류전형에서 미끄러지고, 대행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자소설'은 당당히 합격자 명단에 오르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김성찬씨는 "직접 쓴 자소서는 서류서 물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신 써준 걸로는 한 대기업의 서류전형을 통과했다"며 "기업은 항상 '스펙이 다가 아니다', '솔직한 게 좋다'고 말하지만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하는 구직자 처지에선 선뜻 와 닿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극소수만 살아남는 혹독한 취업시장 구조가 낳은 결과"
엄청난 '스펙'을 쌓아도, 상위 5%정도만 원하는 직장에 갈 수 있는 왜곡된 취업 구조가 이러한 기형적 시장과 비양심적인 거래를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은 "극소수만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는 현실에서 실업에 대한 혹독한 공포와 경제위기로 인한 극심한 민생고가 겹친 불안이 낳은 결과"라며 "체불과 실업은 늘어나고, 구조조정이 심화되는 악조건 속에서 정부마저도 실업대책은커녕 특권층만을 위한 정책을 펴고 있어 청년 구직자들의 불안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취업을 하고픈 젊은이들을 공략하기 위한 '틈새시장'은 날로 커져만 가고, 과열된 취업시장 근방에는 때늦은 '파생상품'만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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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제3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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