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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려서 속터지는 할배, 그라니 우짜겠노

[서평] 뭐라, 내한테서 찔레꽃 냄새가 난다꼬

등록|2008.11.23 11:41 수정|2008.11.23 11:41

표지<뭐라, 내한테서 찔레꽃 냄새가 난다꼬> ⓒ 호미


예전 농촌 들녘에서 일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허겁지겁 살아가는 도시민들처럼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을.

들녘에서 땀 흘리며 일하더라도 지나가던 버스에서 누가 내리는지, 우체부가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지 다 보면서 일을 한다. 이웃 논에 새참 들어올 때마다 하던 일 멈추고 가서 논두렁에 앉아 한 술씩 거든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어도.

"둘이 만나면 저는 속이 터집니다. 느리기로 어찌 저토록 느릴 수가 있을까. 저는 여태까지 살면서 그렇게 느려터진 관계를 서로 용납하며 함께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느리기만 할 뿐, 그렇다고 할 일을 다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할 일은 모두 하면서 그렇게 굼뜨니, 뭐라 할 수도 없습니다. (책 속에서)"

글 쓰는 사진작가 이지누가 만난 할배도 그랬다. 외양간 소를 끌어내 50여m 떨어진 묵밭으로 가는 길이 부지하세월이다. 쇠고삐는 분명 할배가 손에 잡고 있지만 소가 외양간을 나온 이후는 소가 앞장서고 할배는 그냥 따라간다. 느릿느릿 걸으며 밭두렁 풀을 뜯어먹다가, 어느 순간 오줌줄기 좌악 쏟아내는 소를 결코 재촉하지 않는다.

묵밭에서 소 풀 뜯긴 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다. 그 모습 지켜보는 이지누는 속이 터진다. 그래도 장승처럼 서서 지켜볼 뿐 다른 방법이 없다. 소 풀 뜯는 소리 듣고, 배설하는 소리 들으며 사진기 꺼내들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할배와 소할배는 소를 채근하거나 닥달하는 법이 없다 ⓒ 호미


아흔여섯 노인에 밥공기로 커피 대접 받다

할배는 경북 성주군 수륜면 작은동 마을 토박이다. 이 마을은 서슬퍼런 일제의 징병 회오리도 비껴갈 만큼 오지였다. 할배는 이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백년 가까이 살았다. 그런 할배를 이지누가 찾아갔다.

"할배, 인자 연세가 백살 안 됐심니꺼?"
"아죽 안 됐다. 올게 아흔여섯 아이가. 그란데 니는 우예 내 나이까지 다 아노? 얄궂데이."
"성주 시내 장터거리 댕기민서 사람들한테 물어보이, 백살 잡순 할배가 정정하이 농사짓는다카길래 그래 알고 왔지예." (책 속에서)

이지누와 할배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빨간 고무로 덧씌워진 목장갑 한 묶음과 막소주 너덧 병을 싣고 간 이지누에게 할배는 냄비에 물끓여 스텐레스 밥공기에 탄 커피를 대접했다.

할배떠나는 이지누를 잡지 못해 아쉬워하는 할배 ⓒ 호미


그 뒤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가 나락 베고 낟가리 쌓고 탈곡한 나락 싣고 정미소로 나르는 힘든 할배 일을 거들었다. 봄에는 고추 모종 돕고, 여름이면 논두렁을 깎았다. 홍시며 미나리며 호박 등이 할배가 주는 새경이었다. 그러면서 정이 담뿍 들었다. 할배는 일 마치고 떠나는 이지누를 자고 가라며 붙잡기 위해 애쓴다.

"자고 가나? 올 가야 되나?"
"오늘 갈랍니다."
"와, 자고 가지. 벌써 저녁답인데……."
"아입니더……."
"그래……. 가야 되마 가야지……."(책 속에서)

그러던 어느 날 이지누는 찔레꽃 곁을 지나는 할배를 불러 세우고 "할배 몸에서 찔레꽃 향내가 난다"고 너스레를 떤다. 할아버지는 펄쩍 뛰며 부인한다. "꽃은 저짝에 있는데 냄새가 왜 나한테서 나느냐"며 "동네 개도 웃을 소리 하지도 말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런 할배를 이지누는 몇 번이고 더 놀려준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코로 맡는 향기가 진한 사람일수록 사람의 향기는 적고, 사람의 향기가 강한 사람에게서는 코로 맡을 수 있는 향기가 아니라 마음으로 맡아야 하는 향기가 풍긴다는 사실을.

"사람 맘대로 끌고 댕기마 되는가, 어데"

이지누가 만난 찔레꽃 할배는 배운 것도 가진 것 없이 이 땅을 살아간 전형적인 농민이다. 백여 년의 짧지 않은 세월을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나 우물쭈물 살아온 삶이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 부귀와 영화를 거머쥐고, 그 후손들조차 떵떵거리며 권세를 탐하는 동안 아흔 여섯이 되어서도 논농사 밭농사를 지었다.

할배는 자신의 땀이 들어가지 않는 건 욕심내지 않았다. 평생 살면서 몸으로 익힌 삶의 경험을 믿고 고집스레 살아왔다. 할배가 백여 년 살아오면서 일군 게 논밭만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일군 것이다.

그렇게 일군 할배의 삶에선 은은한 향기가 난다. 소와 함께 느려터지게 걸어가는 할배에게  왜 그리 천천히 가느냐고 묻자 답하는 말에 그 향기가 물씬 묻어난다.

"봐라. 저것도 우리맨치로 말을 모 하이 짐승이라카는 거지, 사람하고 똑같은 기라. 사람도 배고프마 밥 묵고 그래 하는데 저것도 배고프마 밥도 묵고 지 묵고 자븐 것도 무야지. 어데 사람만 지 묵고 싶은 거 무라카는 법이 있디나. 철따라 풀도 다 다르거든. 사람들도 안 그렇디나. 철마다 나는 기 다른데. 그라니 우짜노. 소도 지 물 꺼 찾아 묵는데 가마이 놔 또야지. 사람 맘대로 끌고 댕기마 되는가 어데."(책 속에서)
덧붙이는 글 이지누 글, 사진/도서출판 호미/2008. 11/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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