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고 싶어도, 저 사람들 나 없으면 어찌하누"
연탄 배달 45년, 산곡동 서울연탄 이산진 할아버지
▲ 서울연탄이산진 할아버지가 끄는 100장용 수레에는 연탄 대신 주워온 파지가 담겼다. 저 수레가 이 동네 곳곳을 누비며 아랫목을 덥혔다. ⓒ 김갑봉
예년 기온을 되찾으며 영하로 내려갔던 수은주도 영상으로 올라 겨울햇살이 유난히 따사롭게 내리쬐던 지난 금요일(21일). 인천광역시 부평 산곡동 서울연탄 이산진(77) 할아버지와 배달용 리어카(인력거)를 앞에 두고 마주보고 앉았다. 할아버지가 쓴 모자와 얼굴 사이로 비추는 햇살 탓인지 40년 넘게 이 동네 아랫목을 따끈따끈하게 덥혀온 세월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그래도 가지 않고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자 이 할아버지는 귀찮은 듯 "이것 봐봐(리어카를 가리키며) 일이 없으니 고물 주워 내다 팔고 또 담아 온 게야. 일이나 있으면 신나서 대꾸라도 할 텐데 일도 없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가보드라고"라고 돌아서며 "쯧쯧…전에는 세무서에서 허구 헌 날 영업 감찰 나와 귀찮게 하더니. 요새는 장사가 안 되니 그놈들이 안 오고 무슨 기자들만 오고 난리네 그려"라고 혼잣말을 하신다.
"세무서에서 영업 감찰이 나왔어요? 그게 뭐예요?"라고 묻자, 그 때서야 이 할아버지는 조금씩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말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기 일쑤였다.
이 할아버지가 말한 세무서 영업 감찰은 연탄이 잘나가니 혹시 판매된 연탄수를 속여 세금을 덜 낼까봐 이를 감찰했었다는 얘기다. 이 할아버지에 의하면 연탄 1장마다 세금을 매겨 이를 징수했다고 한다.
우여곡절에 말문을 연 이 할아버지는 "지금도 자식들이 막 뭐라고 그려. 이 일 그만두라는 얘기지. 지난번에도 한 신문이 취재해 가서 자식들이 그걸 알고는 '기자들 오면 상대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게야. 그래서 케이비에스 무슨 인간시댄가 하는 사람들이 왔을 때도 안했다"고 말했다.
이 할아버지는 "사실 내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어. 이 동네 연탄보일러 몇 가구 안 되는데 그 사람들 나 없으면 안 되거든. 내가 일일이 배달해줘야 해. 동네 보면 알겠지만 차가 못 들어가는 골목길이 많아. 그래서 저기 저 수레(연탄 50장용 수레와 100장용 수레)에 싣고 가서 배달해. 지금같이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가 천지인데 연탄배달이 돈 되는 일이겠어. 그게 아니고 같이 살아야 하는 법이닌까 나도 이일 하고 있는 게야"라고 전했다.
45년 전 연탄가격 9원, 당시 쌀 한가마니 3000원
▲ 이산진 할아버지(77)일도 안되는데 와갔고선 자꾸 귀찮게 한다고 뭐라고 하시더니 이내 조금씩 말문을 여셨다. 자식들이 지금도 그만두라지만 그는 묵묵히 이 동네를 지키고 있다. ⓒ 김갑봉
이산진 할아버지가 연탄과 함께 한 세월은 꼬박 45년 세월이다. 80년대만 하더라도 산곡동(현 산곡1동과 2동)일대에는 연탄가게가 35군데에 달했다. 이 할아버지는 "그러니 그때도 돈은 별로 못 벌었던 게지. 그렇게 많았으니 어디 돈 벌었겠어?"하고 웃으셨다.
집집마다 연탄보일러이던 시절 이 할아버지의 연탄은 잘 나갔다. 서울연탄으로 바뀐 것은 인천에 연탄공장이 없어지면서부터다. 부평역 인근에 강원연탄공장, 주안역에 제일연탄공장 등 인천에는 당시 8개 연탄공장이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강원연탄공장에서 가져오기도 했고, 제일연탄공장에서도 가져왔는데 강원연탄이 사라지고 제일연탄에서 가져 쓰면서 산곡동 '제일연탄'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서울에서 가져오게 됐으니 서울연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가게 간판은 이 할아버지가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서울'이라는 글자 아래로 '제일'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45년 전. 이 할아버지가 이 일을 시작할 때 연탄 한 장 가격은 9원이었다. 7원에 가져와 9원에 판매를 했는데, 당시 쌀 한가마니가 3000원 정도 할 때라 연탄 백장을 팔아야 쌀 한두 되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 30년 부평지킴이이 할아버지가 연탄 100장을 싣고 갈 길을 잠시 응시하고 있다. 서울연탄이 위치한 산곡동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노동자들이 기숙했던 사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얼마 안 있어 개발이 되면, 서울연탄도 역사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 김갑봉
지금은 이 할아버지 혼자서 연탄을 나르고 있지만 예전에는 할머니와 같이 했었다. 현 가게에서 산곡동입구 삼거리(백마장 삼거리)를 지나 연탄공장이 있는 부평역까지 인력거를 끌고 가서 실어 날랐다.
세월이 흘러 연탄보일러가 점차 사라지면서, 연탄공장도 없어졌다. 이 할아버지는 "이문동에서 배달해 주는데 한번 시키면 2000장을 시켜야 해. 한 천이삼백 장 시키면 되는데 그렇게는 안 받아주거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한 트럭(2000장)을 시키는 수밖에 없어"라고 전했다.
취재가 끝나갈 무렵 동네 한 조그만 회사에서 연탄 백장 주문이 들어왔다. 반갑게 맞을 만한데도 이 할아버지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연탄 한 장에 지금은 400원 내왼데, 하루에 많이 팔아야 이삼백장 팔거든. 그걸로는 살아갈 순 없지. 그래도 나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래서 이걸 붙잡고 있는 게야"라고 말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연탄보일러 세대들도 얼마 안가 자취를 감추게 될지 모른다. 이 동네 일대가 개발구역으로 예정되면서 서울연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보잘 것 없다며 낮추어 말하는 이산진 할아버지. 산곡동은 그가 있어 반세기 넘게 훈훈한 겨울을 보냈을 것이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어느 때보다 그리운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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