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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마디 한자말 털기 (52) 접(接)하다

[우리 말에 마음쓰기 485] ‘자연을 접하다’, ‘접했던 질문’ 다듬기

등록|2008.11.27 10:18 수정|2008.11.27 10:18

ㄱ. 사람을 접하다 / 자연을 접하다

.. 아이들은 나와는 다른 진짜로 싸우는 조직 노동자를 접하면서 노동자가 지닌 격조 높은 인격을 배웠고 ..  《스나가 시게오/교육출판기획실 옮김-풀잎들의 교실》(동녘,1987) 103쪽
.. 아이들은 벌거벗은 채 단순하게 자연을 접해야 한다 ..  《하진희-샨티니케탄》(여름언덕,2004) 50쪽

 “노동자가 지닌 격조(格調) 높은 인격(人格)”은 “일하는 사람마다 배어 있는 훌륭한 됨됨이”나 “일하는 사람들한테 배어 있는 훌륭한 마음됨”으로 다듬어 봅니다. ‘단순(單純)하게’는 ‘그저’나 ‘꾸밈없이’나 ‘티없이’로 손봅니다.

 ┌ 나와는 다른 사람을 접하면서
 │→ 나와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 나와는 다른 사람을 겪으면서
 │→ 나와는 다른 사람을 부대끼면서
 │
 ├ 아이들은 단순하게 자연을 접해야 한다
 │→ 아이들은 꾸밈없이 자연을 만나야 한다
 │→ 아이들은 티없이 자연을 느껴야 한다
 └ …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얄궂고 짓궂은 사람이 있는 한편, 여러모로 내 삶에 피와 살이 될 뿐 아니라 미처 몰랐던 슬기를 깨우쳐 주는 훌륭한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가 걷는 길에 힘을 보태어 주는 길잡이나 스승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언제 만나느냐, 어떻게 만나느냐는 알 노릇이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만나고, 우리가 못 느끼는 사이에 진작 만났는지 모릅니다.

 세상이 온통 도시로 뒤바뀌지만, 도시에도 자연은 깃들어 있습니다. 도시에 깃든 자연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는 우리 몫입니다. 도시를 벗어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자연을 얼마나 헤아리면서 껴안을 수 있느냐 또한 우리 몫입니다. 자연이 아름답다면 왜 아름다운지, 자연을 무너뜨리면서 사람 사는 터를 넓혀야 한다면 왜 얼마나 어떻게 넓혀야 하는지를 찬찬히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만 살아남겠다고 자연 삶터를 깡그리 무너뜨린다면, 사람 또한 살아남을 수 없어요.


ㄴ. 아이들과 접하면서

..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내가 강한 점은, 직업상 늘 아이들과 접하면서 배울 수 있다는 점과, 또 내가 아들을 대하는 방식을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그 잘못된 사례들을 확실한 증거로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  《스나가 시게오-아들아 너는 세상 모든 것을 시로 노래하는 사람이 되어라》(가서원,1988) 55쪽

 “아내가 강(强)한 점(點)은”은 “아내가 더 잘하는 대목은”이나 “아내가 한결 나은 대목은”으로 다듬고, ‘직업상(職業上)’은 ‘직업 때문에’나 ‘하는 일이 그러해서’로 다듬으며, “아들을 대(對)하는 방식(方式)을”은 “아들을 다루는 모습을”이나 “아들을 부대끼는 모습을”로 다듬습니다. “자세(仔細)히 관찰(觀察)함으로써”는 “찬찬히 살피면서”나 “꼼꼼히 들여다보면서”로 손봅니다. ‘사례(事例)’는 ‘보기’나 ‘모습’으로 손질하고, “확실(確實)한 증거(證據)로 확보(確保)하고 있다는 점(點)이다”는 “틀림없는 증거로 갖고 있다는 대목이다”나 “잘 알아두고 있다는 대목이다”로 손질합니다.

 ┌ 늘 아이들과 접하면서
 │
 │→ 늘 아이들과 만나면서
 │→ 늘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 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 …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하고 어울립니다. 어느 모임에 가서 여러 사람과 부대낍니다. 함께 놀기도 하고 함께 가르치기도 하며 함께 밥을 먹기도 합니다.

 복닥복닥거리며 서로를 알아 가는 우리들입니다. 살을 부비면서 서로를 느끼는 우리들입니다. 어깨동무를 하는 동안 좀더 깊이 헤아리게 되는 우리들입니다.

 멀리 떨어져서는 좀처럼 알기 힘들고, 멀거니 금을 긋고 팔짱을 낀 채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가까이에 있어야,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서로 마음을 열 수 있고 몸이 한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ㄷ. 접했던 질문

.. 많은 자리에서 접했던 질문이었다 ..  《심상정-당당한 아름다움》(레디앙,2008) 131쪽

 ‘질문(質問)’은 ‘물음’으로 고쳐 줍니다.

 ┌ 접했던 질문
 │
 │→ 받았던 물음
 │→ 들었던 물음
 │→ 들었던 이야기
 │→ 들었던 소리
 └ …

 질문이거나 물음이거나, 아무개가 저무개한테 ‘합’니다. 궁금하니까 ‘묻’습니다. 알고 싶어서 들려 달라고 하고, 아직 모르기에 알려 달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하루이틀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수하게 주고받던 이야기는 사그라듭니다. 조촐하게 나누던 물음은 자취를 감춥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질문 있는 사람?” 하고 묻지, “궁금한 사람?”이나 “아직 모르겠는 사람?”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사 스스로 굳어 버린 말투요, 아이들한테까지 퍼뜨리는 말투입니다. 교사가 쓰는 말투가 고스란히 아이들한테 이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아니 아이들한테 스며든다고 깨닫게 된다면, 교사 된 이로서 아무 말이나 섣불리 하지 못하겠지만, 교사들은 자기 말투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자기네 말투를 따라 배우게 되는 줄 못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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