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등굣길은 아빠의 '개똥철학' 강의길
새벽보다 일찍 일어나는 아들과 함께 걷는 등굣길
▲ 큰 녀석과 이런저런 얘기하며 느릿느릿 20분쯤 시골길을 걷다보면 정류장이 나온다. ⓒ 송성영
오늘은 우리집 큰 녀석의 등굣길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찬 기운에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녀석이 애매모호하게 말합니다.
"헤, 나는 매일 새벽보다 일찍 일어나네."
"그러네."
중학생인 큰 아이가 학교 가는 시간이 되면 여전히 어둠이 남아 있습니다. 부모 된 자로 추운 새벽길을 나서는 녀석이 안쓰러워 산책을 겸해 일주일에 두 세 차례 쯤 함께 등굣길을 나섭니다.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이며 녀석이 좋아 하는 역사이야기나 때로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삶과 죽음에 관련된 '심오한 철학'을 주고 받아가며 아주 느릿느릿 걸어갑니다. 녀석의 등굣길은 아빠의 '개똥철학'을 전수받는 또 다른 배움의 길이기도 합니다.
"아빠,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봐?"
"죽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죽어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과 한 몸이라고 보는데?"
"어째서?"
"일단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가겠어?"
"땅속으로 들어가지."
"땅속으로 들어가서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 흙이 되겠지? 그 흙은 또 다른 생명을 키우겠지? 흙은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살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어? 그래서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 짐승이든 풀이든 돌이든 간에, 살아 있든 죽어 있든 모든 것은 하나인 것이지."
"그러네."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마찬가지여, 나눠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것이기도 한 것이지. 어제가 즐거우면 오늘이 즐겁고 오늘이 즐거우면 또 내일이 즐거운 게 아니겠어?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재미있게 즐겁게 살아야겠지. 네가 만약 학교 다니는 게 즐거움보다 괴로움이 더 많다면 당장 그만 둬야 좋은 겨. 논어에 그런 말 나오지.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그 말 나도 알어."
"아빠 생각에 그 말은 그냥 배우면 즐겁다는 식의 단순한 말이 아니라고 봐. 뭐든지 즐겁게 배워야 한다는 겨. 그래야 그 지식이 즐겁게 평화롭게 쓰이게 되는 겨. 네가 만약 나중에 뭔가 되겠다고 출세욕으로 죽어라 공부한다면 그건 오히려 세상을 탁하게 만드는 겨.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 출세한다 해도 너는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겨. 네가 괴로우면 어떻겠어? 주변 사람들도 괴롭겠지? 결국은 아무리 많이 배워도 즐겁게 배우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배우면 누군가를 괴롭힐 수밖에 없는 겨, 아빠도 그랬을 거여, 고통스럽게 배웠기 때문에 그 지식으로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괴롭혔을 겨."
"그래서?"
"그래서는 뭘 인마 그래서여? 기왕 배우는 거, 즐겁게 배우고 익히라는 거지."
학력신장 위주로 가르치는 학교에서 즐겁게 배우고 익히라는 말은 억지소리인지도 모릅니다. 좀 더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에 보내는 것을 지상과제처럼 여기고 있는 학교 현실에서 즐겁게 배우고 익히는 것은 수행자들이 도를 깨치는 일 만큼이나 분명 험난한 일일 것입니다.
느릿느릿 20분도 채 안 걸리는 버스 타는 정거장으로 향하는 걸음걸음에 시나브로 사방천지가 밝아 옵니다.
"우리 인효가 새벽을 깨우고 있는 셈이네."
새벽이 녀석을 깨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녀석이 새벽을 깨워가며 지식 창고인 학교라는 '먼 길'을 나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녀석에게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 등굣길에 늘 덧붙였습니다.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하지만 녀석이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그 말을 입 밖으로 쉽게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녀석에게는 중학교라는 공간이 점점 억압의 공간으로 다가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 있지, 아까도 말했지만, 학교 다니는 거 재미없으면 지금 당장 가지 않아도 돼."
"아녀, 친구들 만나는 게 재미있어."
"그려 그럼 다행이고, 친구들하고 놀 때 공부 잘하고 못하고를 차별하믄 절대로 안 되는 겨, 알겠지?"
"당연하지, 모두 모두 좋아 하믄 나도 좋고 다 좋지."
언젠가 녀석이 수업시간에 시 한 편을 써서 관심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녀석은 등굣길에서 생각했던 것을 시로 옮겼다고 합니다. 시 쓰는 최은숙 선생이 녀석의 '가을바람'이라는 시를 보면서 그랬습니다. 알게 모르게 아빠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고. 그 영향력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내가 보기에도 녀석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아빠의 등굣길 개똥철학'을 즐겁게 배우고 익힌 듯 합니다.
따뜻한 가을바람아
시원한 가을바람아
추운 아침 내 등판에 오지 말고
욕심 가득한 저 사람에게도 오지 마라
오려거든
벼 베실 때 우리 아빠
더운 등판 식혀주고
낙엽 질 때 우리 엄마
힘드시니 마당 낙엽 쓸어주고
놀다 지친 우리 동생
이마 땀도 닦아 주렴
졸졸 조는 개울물도
자장자장 쓰다듬고
여기사는 것도
저기 사는 것도
모두모두 사랑하렴
▲ 큰 아이 등굣길 ⓒ 송성영
"얼레? 버스 정류장 건물이 어디로 갔다냐?"
버스 정류장에 들어서 있던 비바람막이 건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휑하니 정류장 표지판 하나 달랑 서 있는 곳에 녀석과 늘 같은 시간대에 버스를 타는 여학생이 우산을 들고 오돌 오돌 떨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제 다 철거한 거 같은디."
"바람막이도 되고 좋았는데 왜 하필이면 이 추운 겨울에 철거했다냐, 그것도 멀쩡한 것을."
연말이 되면 그러하듯 돈 많은 사람들이 돈 쓸 구멍을 찾고 있나 봅니다. 나라 살림 거덜 나고 없이 사는 사람들 죽겠다 죽겠다 하고 있는 판국에 뭔 놈의 세금이 그리 남아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하나니, 모두 모두 사랑해야 되니, 어쩌니 했던 내 머릿속의 그럴듯한 '개똥철학'은 흔적 없이 사라진 정류장 건물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저만치서 녀석을 학교에 데려다 줄 버스가 함박눈을 헤치며 두 눈에 불을 켜고 무섭게 달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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