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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판결문 들고 아들 묘에 갈 겁니다"

[인터뷰] 36년 만에 무죄판결로 '강간살해' 누명 벗은 정원섭 목사

등록|2008.12.13 17:18 수정|2008.12.13 17:31
1973년 3월 30일 강간치사·살인 혐의로 무기징역 선고.
2008년 11월 28일 춘천지방법원서 무죄판결.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무기수의 삶을 살아가다 모범수로 20년 감형 이후, 15년 7개월 8일을 복역하고 1987년 12월 24일 성탄 특사로 석방, 이후 20년 동안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외로운 싸움 끝에 지난 11월 28일 무죄판결을 받은 정원섭(74·한국기독교장로회 충절교회) 목사를 만났다.

춘천지법은 "당시 정씨 조사 과정에서 적법 절차에 반하는 가혹행위 등 사건 수사 절차상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며 "경찰과 검찰 등이 제출한 증거로는 정씨에 대한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이같이 판시했다.

교도소 복역과 아내의 교통사고 등으로 가정마저 풍비박산 난 정 목사는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1999년 11월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2001년 10월 기각되면서 그의 억울함은 영원히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자신의 결백을 호소한 정 목사는 2년여 만인 지난해 12월 재심권고 결정을 이끌어 냈고, 마침내 춘천지방법원의 무죄판결을 얻어냈다.

자신의 것 나누는 '자비량 목회' 꿈꿨던 전도사

▲ 정원섭 목사 ⓒ 김민수

그는 어릴 적 이야기부터 꺼냈다. 부친이 사진을 직접 찍고 인화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는데, 특별히 정 목사의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다. 자연스럽게 부친의 어깨너머로 배운 사진, 17세 6·25 무렵에는 사진을 찍고 인화하는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진과 가까이 지냈다.
한국신학대학교(현 한신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정원섭은 몰라도 '카메라맨'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제1회 한국관광사진콘테스트에서 특선에 입선되어 받은 상금으로 '자비량 목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3개월 시한으로 서울 미아리 근처에 사진관을 차렸다. 그리고 이후 우이동과 세운상가에 분점을 낼만큼 사업은 성공 가도를 달렸다.

'자비량 목회'란 교인들에게 사례비를 의존하는 목회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생계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는 목회를 의미한다. 신학교 시절 진로상담을 할 때 안희국 교수가 '자비량 목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며 "너희가 벌어서 교인을 대접해라"고 하신 말씀에 감동받아 '자비량 목회'를 꿈꾸고 기도했던 것이다.

미아리에서 사진관을 운영할 때, 스케이트장을 돌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돈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벌어서 풍족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약속대로 '자비량 목회'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목회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그는 고난의 시절을 암시하는 사건을 접하게 된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그는 지금의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교회의 전도사였다. 여름성경학교 현수막을 직접 제작했는데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하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갑자기 파출소로 오라는 연락이 왔고, 파출소에서는 당시 왕십리에 있던 분소로 보냈다. "동무야"란 문구가 화근이 됐다. 매를 엄청 맞고 다음 날 석방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새신자가 등록했다. 후에 그 새신자는 파출소장 부인이라고 고백했고 도청을 하고 있다고도 실토했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내는 설교를 못하겠더란다.

몇몇 교회를 맡아 목회하면서 미션스쿨의 교목으로 활동하던 그는 큰 아들(당시 8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만홧가게 주인에서 '강간살해범'으로...

▲ 무죄판결문을 감동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정원섭 목사, 그는 이 판결문을 가지고 아들의 묘지를 찾아가 기도할 것이라 했다. 누명을 쓰고 갇힌 자들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 김민수

큰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그간 모았던 재산을 다 탕진했지만 아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고향인 춘천으로 돌아가 생계를 위해 만홧가게를 열었다. <여로>라는 드라마가 한창 인기가 좋았던 시절이었고, 당시만 해도 텔레비전이 귀했기에 만홧가게는 일정한 돈을 내고 텔레비전을 보는 곳이기도 했다.
근처에도 만홧가게가 있었으나 제법 장사가 잘되었고,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노래가사를 아이들이 배우라고 써 붙여 놓은 까닭에 간판도 없었지만 그 곳에서는 '왕국 만홧가게'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동네 초등학교 5학년 여아가 난행을 당한 후 목이 졸려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다. 텔레비전을 보러 나간다고 한 이후 사건이 발생했고, 아이의 호주머니에는 근처에 있는 만홧가게의 'TV 시청 전표'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그로 인해 경찰이 만홧가게 주인을 의심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다른 만홧가게 주인이 아닌 자신을 범죄자로 몰아간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5일간 갖은 욕설과 폭행을 당하며 조사를 받았어요. 죽은 아이의 몸에서는 성인 남자의 음모가 발견되었습니다. 살인사건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증거물이죠. 감정결과 A형의 남자로 판명되었습니다. 나는 B형이죠. 이미 경찰은 자신들이 마음먹은 대로 사건을 조작하고, 빨리 매듭지려고 했던 것이죠."

그렇게 그는 무기징역을 받고 수감되었다.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 '강간살인범'이라니, 사실 여부를 떠나 이미 언론에는 그렇게 보도되었다. 그는 한국신학대학의 명예와 기독교인들을 수치스럽게 했다는 것 때문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단다.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893번 면회!"라는 소리가 들렸고, 순간 사형장으로 끌려간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강제로 교무과장실에 가보니 김재준 목사와 이우정 선생이 면회를 와 있었다.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모를 김재준 목사의 "자살하면 안 된다"는 일침, 이우정 선생이 "정군이 자살하면 고문하고 조작한 사람이 정의가 됩니다.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죄를 일깨워줘야 합니다"하는 말에 자살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이후 교도소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마다 반갑고 새로웠단다. 문맹교육보조를 하다 검정고시반까지 맡게 되었고, 교도소에서는 수감된 이들뿐 아니라 교도관들까지도 "정 선생!"이라고 불릴 정도로 변화된 생활을 했다. 이후 무기수에서 20년으로 감형이 되고, 1987년 12월 24일 성탄특사로 가석방되었다.

"세상에서 칭찬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상이 적어요"

▲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원섭 목사와 정영대 변호사 ⓒ 김민수


이후 '자비량 목회'에 대한 꿈을 접지 않은 정원섭 목사는 자신이 졸업한 신학교 교단(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과자가 어떻게 목회자가 되려고 해!"하는 말을 하는 이가 있을 정도로 냉담했고 교단법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목사의 꿈은 좌절되는 듯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91년 목사안수를 받고 1998년에는 모교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가 되었다. 그는 '자비량 목회'를 포기하지 않고 사슴농장을 시작했고, 현재는 오소리농장도 운영하고 있다. 목회는 물론이요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며 '자비량 목회'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누명을 벗은 후의 심정을 물었다. 그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죄 없는 사람이 죄 없다는 것을 법이 인정해 준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난 16년의 세월, 저는 그런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죄판결문을 아들 묘소에 놓고 기도할 것입니다. 나 잘하는 것 쓰지 말고, 칭찬하는 것 쓰지 마세요. 세상에서 칭찬받으면 하나님께 받을 상이 적어요. 사실보도만 하세요. 감정을 절대 넣지 말고요."

3시간여의 인터뷰, 듣는 내내 써야할 말은 너무도 많았는데 마지막 당부로 인해 글줄이 꽉 막히게 생겨 난감했다.

현재 춘천지방법원의 무죄판결 이후 검찰은 이 사건에 대해 항소한 상태다. 정원섭 목사와 한신대 동문인 정영대 변호사(목사)는 "항소가 서울고등법원에 이첩되었고 결심까지는 신속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내년 봄이면 판결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정영대 변호사는 "항소한 이유를 검토해 보니 재판결과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며 '100% 무죄'를 확신했다. 정 변호사는 한신대학교 총장 윤응진 목사의 소개로 정원섭 목사를 알게 되었고 이후 이 사건의 변호를 무료로 맡아왔다.

인터뷰 동안 정 목사가 신앙고백적인 내용의 말을 할 때에는 눈가에 눈물이 맺히곤 했다. 그 긴 세월, 그의 마음에 남아있을 법한 원망 같은 것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데이빗 헨리 소루우의 <시민의 불복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받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을 쉬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이다.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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